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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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겨울나무 - 제5화 작년까지 신문기자 노릇을 했거든요
춤추는 겨울나무
제5화 작년까지 신문기자 노릇을 했거든요
1979.10.05 방송
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고려야구 동산유지 공동제공.

(음악)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다섯 번 째.

(음악)

(음악 소리)

- 저녁 초대 감사합니다.

- 병원에서 바로 오시는 길인가요?

- 네. 시내로 나오자면은 1시간은 걸립니다.

- 아하, 그러실 거예요.

- 담배 피시죠. 안 피시든가요?

- 아니요. 그래서가 아니고, 여자한테 담배 권하는 남자 흔치 않거든요.

- 저도 여자한테 담배 권해본 적이 없는데 저도 모르게 그렇게 했어요.

- 아하, 직감이 대단하시군요. 이 여자는 담배를 필 것이다 느끼셨기 때문이겠죠?

(잔잔한 음악 소리)

- 그랬을까요?

- 아무튼 좋아요. 전 여자가 무슨 담배야? 건방지게. 이런 눈초리를 하는 남잘 별로 존경하질 않거든요. 아하하.

- 그러실 겁니다.

(라이터 불 붙이는 소리)

- 근데 어젠 왜 제게 담배를 안 주셨죠?

- 어젠 그걸 못 느꼈던 모양이죠.

- 아하하. (두 사람 모두)

(잔에 술 따르는 소리)

- 들까요?

- 네.

(마시는 소리)

- 시원한데요.

- 음, 술 많이 하세요?

- 마실 만큼 마십니다. 대중이 없어요. 분위기가 좋으면 많이 마시구요.

- 닥터들은 스트레스가 많아서 많이 마시는 편이라고들 하던데요?

- 대체로.

- 수연 씨는 어떻습니까?

- 조금요. 통 못 마셨는데 술 많이 마시는 사람들 속에서 지내다 보니까 조금 하게 됐어요.

- 글 쓰는 분들 술이 쎄죠?

- 그렇더군요. 게다가 전 작년까지 신문기자 노릇을 했거든요.

- 네-. 소설을 쓰시려고 신문사를 그만두셨습니까?

- 두 가지 하긴 힘들었어요. 그리고 늙은 여기자는 뭐랄까, 어딘지 억세고 초라해 보이는 것 같아서요.

- 아하하하. (두 사람 모두)

- 수연 씨가 늙은 여자라고 하니까 우습군요. 정말 늙은 여기자가 들으면 노하겠습니다. 아하하.

- 차라리 진짜 늙은 여기자는 관록이 있죠. 올드미스는 절대로 그런 관록이 붙질 않아요. 아하하.

- 그럼 올드미스의 고비를 넘어서거나 결혼을 해야 관록이 붙겠군요.

- 아하하하, 어쩌다가 늙은 여기자의 관록에 대해서 얘길 하게 됐죠. 호호호.

- 그런데 어제는 소득이 있었습니까? 별로 보신 게 없는데. 워낙 시간이 빡빡해서.

- 아유, 왜요? 분위기도 알았고 환자가 치료받는 과정 같은 것도 조금 알았고 아, 또...

- 또 뭡니까?

- 또, 어떤 젊은 정신과 의사의 양심? 그게 제일 큰 소득이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소득이기도 했구요.

- 의사들은 그 정도의 양심은 다 갖고 있습니다.

- 아하, 하지만 전 어제 그걸 처음 확인했거든요. 처음이란 건 참 중요한 것 같애요. 선생님 덕분에 전 의사를 어떤 경우에도 신뢰하고 존경할 것 같애요.

- 저야말로 이건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군요. 의술이 인술이 아니라 상술이라는 지탄의 소리가 드높은 이 마당에 이건 대단한 보너스예요.

- 으으음, 그런가요?

- 그런데 이 선생님은 왜 신경외과의가 되신 거예요? 그럴 만한 이유라도...

- 있죠. 제 삼촌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정신질환을 앓으셨어요. 결국 그 병 때문에 자살을 하셨는데, 제가 중학교 다닐 때였어요. 그때 전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삼촌은 대단한 사색가여서 전 늘 그분을 외경의 눈으로 바라봤었는데 그 병 때문에 날개를 한번 펼쳐 보시지도 못하고 생을 끝내고 말았죠. 아마 그때부터 정신과의사가 되리라고

마음 먹고 있었나 봐요. 망설임없이 의대에 진학했고 망설임없이 신경외과를 전공했으니깐요.

- 후회는 없으세요?

- 후회 없습니다. 전 의사로서 만족하고 있어요. 보람도 있구요.

- 아하하, 드시죠.

- 네.

(음악)

- 운전 잘하시네요. 술 드시고도. 아하하.

- 출퇴근 하다보니 늘었습니다.

- 어, 거긴 정말 차가 없으시면 곤란하시겠더군요.

- 그래서 운전을 배우고 차를 마련했죠. 순전히 출퇴근용으로요.

- 그런 불편이 있긴 해도 거긴 참 조용하고 나무도 많고 공기도 맑고. 아하, 그야말로 숨쉴 만하던데요?

- 닭장 같은 아파트하곤 비교도 안 되죠. 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은 저 닭장 같은 아파트로, 이 먼지 낀 거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거기 있는 겁니다.

이 거리에서 상처받고 이 거리로 돌아와야 하는, 상처가 아물어서 거리로 나왔다가 재발해서 돌아오는 환자들을 볼 때가 제일 가슴 아픕니다.

병원과 세상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삼촌 생각이 나는 게.

- 아... 힘드시겠어요. 아주.

- 아픔 없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 아, 그렇긴 하지만...

- 그래도 오늘은 수연 씨 덕분에 아주 유쾌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발견도 했구요.

- 위대한 발견이라뇨?

- 여자하고도 얼마든지 유쾌하게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거 말입니다. 이건 순전히 수연 씨의 능력 때문일 겁니다.

- 아하하하, 그래요? 전 그런 면에서 유능해요. 전 친구가 많거든요. 으으흥.

- 친구가 많기 때문에 유능한 게 아니라 유능하기 때문에 친구가 많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아핫, 그럴까요? 신문기자 노릇을 몇 년 하는 동안 전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과 만나는 일에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전 좀 괴짜예요. 처음에 별로 인상에 남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별로 없어요. 지나치게 직관적이라고나 할까요?

- 그럼 전 두 번을 만났으니까 세 번째 만날 가망이 있는 거군요.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까?

- 아, 저는 선생님께 단지 원수를 갚았을 뿐인데요?

- 어, 참. 그랬던가요?

- 아하하하하.( 두 사람 모두)

- 어쨌거나 친구가 많다는 건 행복한 일일 겁니다.

- 글쎄요. 많다는 건 없다는 얘기도 되잖아요? 전 요즘 친구 때문에 쇼크를 받은 적이 있어요.

- 쇼크를? 왜요?

- 선생님 방에서 마주쳤던 세인이 언니 말이에요.

- 그분이 어쨌는데요?

- 글쎄, 나하고는 제일 친한 친군데 말 한마디 없이 파리로 가버렸지 뭐예요.

-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죠.

- 그랬는지도 모르죠. 워낙에 깔끔한 아이니까. 아, 그런데도 섭섭해요.

- 예...

- 그 친구 얘길 하니까 갑자기 보고 싶어지네요.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걘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아이예요.

그런데도 어쩐지 걜 보고 있으면 행복하지 못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거든요. 왠진 모르지만...

- 네...

- 어쩜 세경인 친구에게도 말못할 일이... 네,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친구에게도 말못할 일... 그럼 강세경 씨는 도대체 왜 병이 난 걸까? 친구에게도 말못할 사연이란 대체 뭘까?

- 어머, 다 왔군요. 그새.

- 세울까요?

- 아, 네.

(차 세우는 소리)

(음악)

(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

- 점심 안 먹나?

- 어, 벌써 그렇게 됐나?

- 아, 정신없는 모양이군. 하긴 그렇기도 할 거야.

- 그렇기도 할 거라니?

- 보기 좋던데.

- 뭐가?

- 설마 사촌여동생하고 술을 마신 건 아닐 거고.

- 귀신이군.

-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걸 봤지.

- 역시 술꾼은 다르다니까.

- 광화문 바닥이 아무리 넓어도 거기가 거기야. 동창들하고 2차 하러 가는데 딱 나오더군. 내 빌딩 그늘로 슬쩍 숨었지. 그 여자 어제 왔던 여자지? 소설가라는.

- 맞았어. 흐흐흠.

- 하하하, 내 눈이 틀림없거든. 역시 처녀였던 모양이지. 유부녀가 밤중에 외간 남자하고 다닐 리 없고.

(급히 뛰어오는 소리)

- 선생님! 7호실 환자가, 7호실 환자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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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동아방송 개국 16주년 기념 오백만 원 고료 라디오 드라마 입선작 배명숙 극본 춤추는 겨울나무 이기상 연출 다섯 번째로 동산유지, 고려야구 공동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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