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정하연, 연출 이규상.
- 빈털털이. 윤상도씨는 빈털털이. 얼마나 좋아? 난 윤선생님이 빈털털이가 돼서 날 찾아온 사실에 감격을 했다구.
- 음.
- 아프세요?
- 내 머릿속엔 지영이 생각 뿐이었어.
- 어딜 헤매고 다니셨어요?
- 모르겠어. 아무데고.
- 사모님이 선생님 찾아 오셨었어요.
- 내 아내가?
- 선생님 걱정 하시던데요.
- 자존심 때문이겠지.
- 무슨 자존심이요?
- 그 여자의 자존심.
- 사모님을 나쁘게 말씀 마세요. 사모님은 선생님 사랑하는것 같았어요.
- 날.
- 집으로 돌아가세요.
- 이젠 끝난게야.
- 부부란 쉽게 갈라서지 못한다고 하던데요?
- 결혼 부터가 잘못 된게야.
- 난 돈과 출세에 눈이 어두워서 그 여잘 택한거고. 그 여잔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날 택한거야. 여지껏 한번도 날 남편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 어떻게 됐든 그건 선생님 자신이 선택한 인생이에요. 그러니 선생님 스스로 책임을 지셔야죠.
- 그래야지. 책임, 그래 져야지.
- 어떻게요?
- 이혼 했다는 얘긴 안하던가?
- 누가요? 사모님이요?
- 그저께 구청에 갔었지. 지영이와의 관계를 알고 이혼하자고 하더구만. 쓰라는데로 서류에다 쓰고 도장까지 찍어줬어. 내 명의로 돼있던 재산도 다 넘겨줬고, 그리곤 정신없이 헤매고 다녔어. 지영이가 보고 싶었지. 하지만 지영이 만날 면목이 없었고. 난 빈털털이야. 수중엔 돈 한푼 없다. 며칠동안 난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옛날 생각이 나더구만. 언제나 배가 고파서 현기증을 느끼면 살았었지. 하지만 난 외롭지 않았어.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어. 지영이, 난 행복했어. 예전에 잊어버렸던 내 모습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어. 귀찮게 하진 않겠어. 아침에 내 여길 나가지. 난 잘 알고 있어. 이 나이에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기반도 다 잃어버린 사내가 얼마나 볼품 없는가를. 내 귀찮게 하진 않겠다고.
- 선생님.
- 아니야. 날 동정할 필요없어. 이건 그래. 내 책임 이니까.
- 당분간 여기 계세요.
- 날 동정할 필요 없다니까.
- 동정이 아니에요. 선생님. 선생님을 동정하는게 아니에요. 여기 계세요. 선생님이 다시 용기를 회복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때 까지만 제가 도와드릴께요.
- 내가 어떤 인간인지 벌써 잊었나 지영인. 난 헌신적으로 날 도와준 여자를 헌신짝처럼 버렸던 남자야. 지영이도 언젠간 배반할거라고.
- 그래도 좋아요. 전 바라는거 없어요. 지금의 선생님 모습이 보기 좋은것 뿐이에요. 그래서 도와드리고 싶은것 뿐이에요.
- 지영이.
- 한 가지만 약속하세요. 이러지 않으시겠다구요.
- 음.
- 약속 하지요?
- 그래. 약속을 하지.
- 그럼 됐어요. 주무세요. 선생님.
- 집을 옮기겠다구?
- 그래야지
- 섭섭하구나. 헤어지게 돼서.
- 만길이도 그렇고 이 집에 더 있을 수 없잖아?
- 얘, 지영아 너 그나저나 너 정신차려.
- 정신 차리고 있어. 걱정마.
- 도데체.
- 충고할거유? 충고면 그만둬.
- 그래. 관두자. 하지만 한 가지만 얘기하자.
- 뭐야.
- 정신차려.
- 차리고 있다니까.
- 윤상도씨 너무 믿지 말라구.
- 안 믿어.
- 생각해봐라. 지금은 너한테 미쳐서 그사람이 집이고 뭐고 다 버리겠다고 나오지만 시간이 지나봐. 죽었소 하고 집에만 들어가면 당장 돈더미에 올라 앉는데 왜 사서 고생하겠어? 마음 달라진다고.
-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 너 배짱한번 두둑하다? 왜 손해날 짓 하냔 말이야.
- 손해? 민자언니 어쩜 그렇게 영리하우?
- 비꼬지마.
- 그렇잖우. 손익계산 그렇게 잘 따지는 양반이. 관둡시다. 언니 약점 찔러서 이로울거 하나 없지. 하지만 내 생각은 그래. 산다는걸 어떻게 손익으로 따지우? 뭐가 손해고 뭐가 이익인지 그걸 어떻게 판단할 수 있어. 안그래? 내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갈거라구.
- 그래. 니 인생 니껀데 구워먹든 삶아먹든 마음데로 하라구.
- 언니, 나도 생각이 다 있어. 나 맹꽁이 아니야. 언니가 걱정하는 만큼 어수룩하지 않아.
- 큰소리 치지마. 너 하는짓이 그래. 불안하다구.
- 언니, 윤상도씨는 날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구. 다른건 몰라. 그것만은 확실하다구 그런데 내가 뭘 더 바래. 그러면 됐잖아? 사랑도 없이 잘도 살아가는데 사랑하는 사람 있는데 왜 못살아. 난 자신 있다구.
- 치, 이제야 실토를 하는구나?
- 잘 될거야. 난 그렇게 믿어. 세상은 자기가 잘 될거라고 믿으면 잘 되게 되있다고. 그렇다고. 세상은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인거야. 만사를 우울하게만 생각하면 만사가 다 우울한거지. 하지만 세상을 내가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는데 이놈의 세상이라고 나한테 화를 내진 않을거 아니야?
- 지영아. 놀래지 말그라. 잡아먹지 않을기라.
- 뭐야.
- 니 내가 마 지겹제?
- 아시는군.
- 내는 내 자신이 잘 아는기라. 내는 모든 사람한테 지겨운 놈인기라. 그래. 결단을 내린기라.
- 결단?
- 낸 떠날끼다. 마 어디로 떠나느냐. 마 죽으러 가는건 아니고.
- 죽으러 갔으면 좋겠어.
- 그렇지 않아도 니 악담 덕분에 마 온몸에 두드러기가 다 난기라.
- 그래. 어디로 간다고.
- 내는 이 세계에서 발을 씻기로 했다. 발씻고 참되고 인간답게 살기로 결심한기라.
- 허. 사람 되셨군.
- 지금 당장은 마 내가 어디로 가는지 말해 줄 수가 없다. 아 그러나 자리 잡으면 곧 연락 할끼라.
- 나한테 연락 안해도 되니까 만길씨나 잘살아.
- 그러수가 있나. 마 내가 이래 열심히 살라꼬 애쓰는 이유가 뭔데. 마 지영이 니랑 우리도 우붓하게 살아보고 싶어서 안그러나. 니는 와 그걸 모르노.
- 하하. 그러세요?
- 비웃지 말그라. 뭐 아니 비웃어도 좋다. 지금은 마 실컷 비웃그라. 하지만도 내도 생각이 있고 결심이 있는기라. 내가 인간다워지고 돈도 벌고 그라면 니도 생각이 달라지겄제. 안그렇나. 니가 내하고 천생에 원수진것도 아니고 마 그래도 니는 한 때 내 마누라가 아나었나.
- 하하하.
- 그래. 그래. 지금은 마 실컷 비웃그라. 하지만도 내가 성공한 다음에는 니 국물도 없는기라. 알았제? 그라믄 내는 간다.
- 잘가.
- 고맙데이.
- 만길씨.
- 부르지 말그라. 마 마음 약해진데이.
- 거짓말처럼 만길인 가버렸어. 끈덕지게 내 주위를 맴돌며 사람 애를 먹이더니 훌쩍 사라져 버린거야. 처음엔 믿어지지가 않았어. 저 흉악한 인간이 또 무슨 재주를 넘으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만길인 정말 어디론가 가버린거야. 그래 이제 잘 된 모양이지 싶었지. 이사도 했고 윤상도씨는 윤상도씨데로 조금씩 원기를 회복하고 일자릴 찾아 나섰고. 그래, 나한테도 오랜만에 희망이 생겼던거야.
제16화 그 여잘 만났단 말이야? ◀ ▶ 제18화 그 사람 돌려 보내세요. (입력일 : 2007.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