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정하연 연출 이규상
- 우선 마십시다. 어려워 할거 없어요. 아가씨.
- 하실 말씀 하세요.
- 특별히 할 얘기는 없어요. 아까 말한대로 잘못은 세사람 모두에게 있는거고
- 세사람이라고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상관이 없어요.
- 자신만만하군. 아가씬.
- 그건 윤선생님과 사모님 두분 사이의 문제에요.
- 그래요? 증거가 있는데두요.
- 증거요?
-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기가 막혀서.
- 무슨 증거요.
- 자존심이 상했지만 난 남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끼자 사람을 사서 뒷조사를 시켜 봤어요.
- 그런데요.
- 벌써 오래전 얘기죠. 제작년 부터니까요. 부산을 자주 가더군. 아가씨 사진을 처음 본건 그 때 였어요. 그 때 보다 많이 세련돼있어서 하마터면은 아가씨가 다방에 들어설 때 몰라볼 뻔 했어요.
- 제가 윤선생님을 만난건.
- 알아요. 그 땐 아가씨가 순진했었다는것도. 하지만 서울에 와서도 계속 남편을 만났죠. 얼마 전에는 아파트까지 샀고.
- 분명히 말씀드리죠. 전 윤선생님을 좋아해 본적이 없어요. 다만.
- 비겁하군. 아가씬. 그렇게 안봤는데. 지금에 와서 이런 관계니 뭐니 따지는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 난 아가씨한테 책임을 물으러 온것도 아니야. 그저 아가씨 얼굴이나 한번 보고 또 아가씨도 나하고 얘기라도 하면은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을 뿐이에요. 그만 가보겠어요. 실례 많았어요. 참.
- 네?
- 우리가 만난거 말이에요. 우리 두사람 만의 문제로 해둡시다.
- 알겠어요.
- 또 하나 빼먹었군. 한마디만 더 해두겠어요. 제 남편이 갖고 있는 회사는 실질적으로 내것이나 다름없어요. 그 점 착각하지 말아요. 됐어요.
- 차 값 내가 내겠어요. 여깄어요.
- 그래서.
- 그래선 뭐. 그렇다는 거지.
- 너 조심해라. 그러다가 드럽게 걸린다.
- 내가 걸릴게 뭐있어.
- 세상엔 그런 여자들 많다구. 자기가 잘못해놓곤 우리 같은 여자들 때문에 남자들이 타락한다고 믿는거지. 기가 막혀서.
- 불쌍하더라.
- 불쌍할거 없다. 그 회사도 자기거라면서 그 여자가 뭐가 불쌍하니?
- 아니, 윤선생.
- 뭐?
- 이제 알거 같애. 윤선생 얘기들을.
- 얘가 왜이래?
- 윤선생을 무시하는거야. 경제력 같은걸 내세워서.
- 그렇겠지. 하지만 사내가 오죽 못났으면 그랬겠니. 동정할거 없다. 뭐 해먹고 살게 없어서 여자 그늘에서 살어?
- 언니. 남의 일을 그렇게 단정적으로 잘라서 얘기하지 마. 사람마다 사정이 다 다른거 아니야?
- 보지 않아도 뻔해. 그런 관계 한두번 봐왔니?
-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세상 살 필요가 없는거야. 사는게 다 그런건데 뭐.
- 너 잘하면 그 사람하고 진짜 연애 하겠다?
- 하면 안돼?
- 뭣하러 하니. 빈털털이나 마찬가진데.
- 빈털털이?
- 그렇잖니. 경제력을 여자가 가지고 있는데. 니가 계속 만나봐. 몽땅 빼앗기고 알몸으로 내쫓길거 아니야?
- 그럼 내가 벌어 먹이지 뭐.
- 누구 팔자 한번 늘어졌구나.
- 농담이야.
- 그나저나 오늘부터 어디 나갈거니?
- 일 나갈데 없을라고?
- 에휴, 나야말로 죽든지 시집을 가든지.
- 잠이나 자고 있어요. 시집 못가면 나하고 살면 되잖아.
- 뭐가 좋아서 키득 거리니?
- 나 지금 괭장히 신나.
- 뭐?
- 언니는 이 기분 모를거야. 뭔가 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이 생겼다는 이 기분.
- 윤선생님, 오늘은요. 제가 한잔 살게요. 괜찮죠?
- 음. 뭐.
- 뭐드시겠어요. 이왕이면요 비싼걸로 하세요.
- 비싼거?
- 돈 좀 한번 써보게요.
- 맥주나 마시지.
- 아이 왜그렇게 기운이 없죠?
- 지영이. 혹시.
- 알고 계세요?
- 미안해. 그런 일을 당하게 해서.
- 당하다니요. 뭘요?
- 내 책임이야.
- 선생님, 나 있잖아요. 오늘은 선생님 기운 북돋아 드릴려고 만난거에요. 힘내세요. 힘!
- 웃을일이 아니에요. 아주머니하고 싸워서 이겨야죠.
- 이게 무슨 전쟁인가?
- 이제 알았다구요. 윤선생님 고민. 그건 고민도 아니에요. 선생님이 못나서 그래요. 네. 선생님이 못난 거에요. 자기 아내 아니에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애초부터는 선생님이 잘못하신 거에요. 아주머니를 한 여자로서 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도 느낄 수가 없었던 거라구요.
- 무슨 뜻이야.
- 집으로 들어가서요. 싸우세요. 남편답게 호령을 하세요. 그러면 아주머니도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될거에요.
- 그 사람 하고는 이미, 이미 끝난거야.
- 바보 같은 소리 그만 하세요. 이대로 물러나면 선생님이 비겁한거에요. 가만있자, 선생님이란 호칭 취소하겠어요. 아저씨라고 하죠. 아저씨, 힘내세요. 힘. 아셨죠?
- 음.
- 아직도 자신 없어요? 아저씨, 그럼 다시는 안 만날거에요. 해보는거죠?
- 아하하하.
- 좋아요. 오늘 강의는 이것으로 끝이에요.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배우면 까먹기 쉬우니까요.
- 지영아. 지영아. 니 잘만났데이. 얘기 좀 하제이.
- 나 일나가야돼.
- 마 일 안나가도 되는기라.
- 뭐?
- 하하. 마 내 참 살다보니 별난 횡재가 다 있는기라.
- 횡재?
- 마 하도 궁해갖고 청계천 7가에 가서 마 고물상이나 한번 해볼라고 했는기라. 얼마전에 그래 마 그림을 한 장 안샀나. 마 이게 마 다 떨어진긴데 아이 그러니까 이게 알고보니께 이게 마 무지막지 한기라. 아이 그 이조때 그 누구라 그린긴데 마 삼백만원 넘는다 안카나.
- 삼백만원?
- 마 그래 안팔았나. 자, 보그레이. 여기. 마 백만원짜리 수표가 아니라. 하나, 둘, 셋.
- 그 말을 나더러 믿으란 말이야?
- 아니 그라믄 마 이돈이 어디서 났겠노.
- 그걸 내가 알어?
- 아니 그라믄 내가 훔쳤단 말이가?
- 글쎄 그걸 누가 아냐고.
- 하하 나 미치겠네. 마 하여간 따라 오르레이.
- 아휴, 놔.
- 아니 와그라노 니. 마 내는 진심으로 니를 사랑하는데 참말로 이럴끼가.
- 어디서 그 돈이 났는지 모르지만 그 돈 가지고 앞으론 좀 인간답게 살라고.
- 이 돈이 어디서 났는지 니 알고싶제.
- 뭐?
- 니 그거를 알면 마 놀래 자빠질낀데. 으잉?
제14화 말 따윈 안 믿어요. ◀ ▶ 제16화 그 여잘 만났단 말이야? (입력일 : 2007.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