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정하연 연출 이규상
- 우째 된깁니꼬. 명자 언니요. 이게 왠 핍니꼬.
- 난 안죽어. 절대로 안죽어.
- 어디서 다쳤는교.
- 이 바닥에서 내 아까운 청춘 다 흘러갔어. 물거품처럼. 아니 맥주 거품처럼. 내 청춘 누군가가 다 마셔버렸다구. 그런데 내가 어떻게 죽어. 어떻게 죽어.
- 말을 해 보이소. 어디서 다쳤는교.
- 야. 술이나 가져와.
- 억수로 취해갖고예.
- 취해? 이 기집애야 내가 술에 취한 것 같으니? 나 나 술에 안 취해. 내 인생 내 청춘 술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꿈에 취하고 취하고 또 취해서 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는데 내가 또 취해? 또 취해서 또 속으란 말이니? 또 속아?
- 답답하구만. 어디서 다쳤는지 말이나 하소. 언니예. 나 땜에 명보씨하고 싸운거 아닙니꺼?
- 그 자식. 걱정마라. 이제 다시는 널 괴롭히지 못할거다. 이 자식이 내가 따지니까 치더라. 치라고 그랬지. 어차피 썩어 문드러진 내 살덩어리 찢어지든 말든 그래 어디 쳐봐라. 때려봐. 악쓰고 쥐어뜯고 물어뜯고 그랬지. 때려. 더 때려 이놈아. 내가 피투성이가 돼서 쓰러지니까 겁이 났던 모양이지. 도망치더라. 뒤에다 대고 소리쳤지. 고소 하겠다고. 그 자식 당분간은 거기 못 나타날거야. 널 괴롭히지도 못할거고. 지영아. 이 바보같은 년아. 넌 자유가 된거야. 이 못난년. 다신 속지 말라구. 그런 쓸데없는 놈들 한테 속지 말라구. 지영아, 넌 자유라고. 못난년.
- 언니예.
- 그래. 그렇게 된거야. 사람이 말이지 막바지에 몰리면 제일 무섭다고 하지?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강하다고도 하고. 난 민자언니하고 서울로 올라왔어.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교훈에 따라서 말이야. 서울 와서 몇달 동안은 민자언니 신세를 톡톡히 졌지. 어린애? 그게 궁금해? 어린앤 어떡했느냐구. 그건 말 못해. 너무 끔찍해서 말 못해. 아이 그 얘긴 하지 말자고. 누구나 남한테 말하기 싫은 상처 같은걸 갖고 사는거 아니야? 그걸 들춰내는건 악취미야. 하여간 이것만은 밝혀두지. 난 민자언니하고 둘이 살게 됐어. 그것 뿐이야. 그리고 난 아주 변해버렸어. 인생에 달관한 여자. 뭐 그쯤 돼버린거야.
- 나갈거니.
- 어. 언닌?
- 난 오늘 좀 쉬어야겠다. 감긴가 몸이 영 안좋은데.
- 그러게 내 뭐래. 쉬는김에 푹 쉬라니까.
- 니 신센 안져. 벌수 있을 때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 언니. 언닌 돈 안 벌어도 돼. 집에서 그저
- 살림이나 하구. 기집애.
- 갔다올게.
- 너무 까불지 말어.
- 까불다니?
- 이 세상 이라는게 그렇게 호락호락한게 아니야. 너무 자신만만 하다간 또 한번 크게 다친다.
- 아유 다치고 말것도 없어 언니. 난 말이지 한가지 원칙은 세웠다.
- 무슨 원칙.
- 명랑하자. 어때?
- 좋구나.
- 아하하하하.
- 청애 5번 미스 리에요. 이름이요? 어떤 이름을 좋아하시는데요? 명자? 경자? 그 전엔 주로 경자 였었는데요. 아, 꽃숙이 이건 어때요. 꽃순이 보다는 품위가 있구요. 꽃숙이 기억하기 좋고 부르기 쉽고 꽃숙이라고 하죠. 피차 좋을데로. 자, 술 마시죠. 나도 마십니다. 매상도 올리고 나도 취하고 싶어서요. 취해야죠. 취해야 세상이 그럴 듯 하게 뵐게 아니에요? 아저씨 아 아니 선생님 아니 아니 사장님 맨정신 갖고 놀지도 못해요. 그러니 취해야죠. 당신들만 몽롱한 눈으로 세상을 보겠단건 나빠요. 자, 술 마셔요. 꽃숙이라는 이름이 못마땅하시면 바꾸죠. 나요? 경잡니다. 경자. 남산공원에 올라가서 경자야! 하고 소리쳐 보세요. 아마 3천 5백명은 달려 올거에요. 경자. 이경자. 그게 내 이름이에요.
- 또 갈거니?
- 응.
- 거긴 가지 말어.
- 가봐야돼.
- 바보같은 짓 그만 하라구. 잊어버려. 잊어버려야지.
- 언니, 나 말야 내 애 죽일 때 하나님하고 약속한거 일주일에 한번씩은 그 애를 만나서 놀아주겠다고. 나 안가면 꼬마들이 하루종일 나만 기다려. 가봐야 한다구.
- 마음만 아프지 무슨 소용이야.
- 그래도 가봐야 돼.
- 마음대로 하렴. 미친년.
- 어서오세요. 또 오셨군요.
- 안녕하세요. 부탁한거 꾸려놨어요?
- 네. 여기. 여기있어요. 이거면 돼요?
- 네. 그런데 왠 장난감은 일요일마다 이렇게 잔뜩 사가세요?
- 나요? 고아원 원장인가 보죠?
- 아, 이제야 알겠군요. 일요일 마다 고아원 같은데에 방문해서 고아들에게 장난감을 선물하는거 아니에요?
- 그런가보죠. 고마워요.
- 조심해 가세요.
- 다음 일요일에도 또 부탁해요.
- 어이구.
- 어 어머나.
- 아이구 아 이거 미안합니다. 아가씨.
- 괜찮아요.
- 제가 치워드리죠.
- 아이 그냥 놔두세요.
- 한눈을 팔다가 그만. 아니 혹시 미스 민 아니오?
- 엄마야.
- 미스 민 맞죠? 미스 민.
- 아저씨.
- 아니 언제 서울로 올라왔어.
- 일년 반쯤 됐어요.
- 이거 많이 달라졌구만.
- 그래예?
- 오 사투릴 쓰니까 이제야 겨우 지영이 답구만.
- 사투리 난 안써요.
- 일년 반 동안.
- 아이 저 독종인지 모르세요?
- 그런가? 아니 그런데 뭘 잔뜩 사가지고 어딜 가는게야?
- 갈 데가 있어요.
- 어디.
- 나중에요.
- 가는데가 어디야.
- 그것도 나중에요.
- 내 얼굴을 보니까 끔찍한가?
- 아니요.
- 그럼.
- 아저씨 하곤 우연히 잘도 만나 잖아요? 또 그렇게 만날 거에요.
- 우연히. 하하하하. 평생 우연이란 말인가.
- 그럼 됐죠 뭐. 그만 가봐야 겠어요.
- 연락처나 좀 알려줘요. 직장 나가는데는 있나? 가만 있거라. 미스 민 벌써 결혼한거 아니야?
- 모르죠. 먼저 갈게요.
- 음...
- 하하하하하. 애들이 미스 민 오길 얼마나 기다리는지 몰라요. 토요일 밤부터 잠도 안 잔 다니까.
- 그래요?
- 정말 고마워요. 불쌍한 애들을 돌봐줘서.
- 아이 별말씀을요. 제가 하고싶어서 하는 일인데요 뭐. 저는 그 애들이하고 같이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해요. 그러니까 감사는 제가 해야죠?
- 오호. 그럼 다행이군요.
- 아참, 솔잎인 잘 있어요?
- 그 애가 좀 아픈가봐요.
- 어머 그래요?
- 그 앤 워낙 몸이 약해서.
-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원장 선생님 솔잎이 있죠? 저 어렸을 때 하고 많이 닮았어요. 제가 어렸을 때 그랬데요. 작고, 비쩍 마르고, 얼굴이 까맣구요. 그리고 그냥 허구한 날 아팠데요. 솔잎이 그 애만 보면 왠지 정이 가요.
- 하하하. 그런 애가 정이 더 가는 법이지요.
- 아이 근데 그 앤 정말 너무 못생겼어요. 원장 선생님 솔잎이 한테 갔다 올게요.
- 어. 그러세요. 의무실에 데려다 놨어요.
- 네.
제8화 앞으론 제발 지를 찾지 마세예. ◀ ▶ 제10화 이 세상 원한 갖고 살고 싶지 않아 (입력일 : 2007.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