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인생극장. 달려오는 사람들. 롯데삼강 제공입니다.
(광고)
김남 극본. 달려오는 사람들. 이규상 연출. 열아홉 번째.
(음악)
(쇠문 여닫는 소리)
- 접니다.
- 아이, 사장님 어떻게 여길-. 비가 오시는데 이렇게 늦게.
- 네, 비가 오는 날이로군요.
- 앉으세요. 여기.
- 좀 있다 가도 됩니까?
- 어머, 무슨 말씀을요.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 네, 어딜 좀-.
- 아이, 나 좀 봐. 쓸데없는 얘기만 묻고. 차 한 잔 대접해 드릴게요.
- 그래도 될까요?
- 아이, 어서 앉기나 하세요. 그렇게 서 계시지만 말구요.
- 아, 네.
(기침 소리 및 찻잔 부딪치는 소리)
- 감기?
- 아, 모르겠어요. 비를 조금 맞았더니.
- 바다에 갔다 왔소?
- 왜요?
- 여기 바다를 스케치 해놓은 게 있군. 비가 오는 날 같은데.
- 네. 관찰력이 보통 아니세요? 으흠.
- 이 화실은 언제부터 있어온 겁니까?
- 대학 졸업하면서부터요.
- 좋군요...
- 신문에서 봤어요. 사장님 회사 사고 소식.
- 그래요. 알고 계시군요.
- 그 때문에 어딜 다녀오시는 길이에요?
- 그렇소. 병원에, 경찰에. 그리고 유가족 집에.
- 사장님,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전-.
- 얘기해 봐요, 미스 오.
- 사장님이 난관을 극복해내리라고 믿어요. 전 그걸 믿어요.
- 고맙소. 난 사실 우습게도 그런 얘기 한마디를 들으려 여기 온 거요.
- 정말이세요?
- 사실이오. 미스 오, 사람은 난관에 처하면 어리석어지는 모양이야. 난 어디에 가면
그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아무데도 없었소. 그래서 결국 여기를 찾아왔소.
(음악)
- 뭐라고? 자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 네, 사장님께서 병원에서 나오시면서 가볼 데가 있으시다구요.
- 그래, 서 사장이 차를 운전해가고 자넨 그냥 돌아왔단 말이지?
- 네.
- 서 사장이 운전은 할 줄 아나?
- 네, 요즘은 전혀 손을 안 대시지만 본래 운전면허를 갖고 계십니다.
- 그렇지, 회사 초창기 땐 손수 운전을 했었으니까.
- 멀리 가신 건 아닐 겁니다만 비도 오고해서 제가 같이 모시고 가려 했지만-.
- 적극 거절했어?
- 네, 그냥 혼자서 계시고 싶다면서요.
- 어허, 그 사람 이젠 큰일났구만. 엎친 데 덮친다고 이 판국에 공장사고까지 생겨서
오늘밤 야간회의를 소집해 놓았는데 당사자가 없으면은 회의는 무슨 놈의 회의야!!
- 죄송합니다. 저도 전혀 연락을 받지 못해서요.
- 어딜 간 건지 자네 짐작도 안 가나?
- 네, 전 전혀...
- 짐작 가는 데도 없어?!!
- 네, 짐작... 모르겠는데요.
- 정말이야?
- 네. 정말입니다.
- 이 친구, 정신 없구만. 응? 혼자 그렇게 돌아다녀 버리면은 어떡하라는 거야?!! 어떡해!!
(음악)
(차 멈추는 소리)
(차문 여닫는 소리 및 발자국 소리)
- 여기가 어디에요? 사장님.
- 여기 2층에 조그만 다방이 하나 있는데 들어가 봅시다.
- 어머, 이런 델 어떻게 다 아세요? 여긴 변두린데.
- 가봅시다. 아, 얼른 와요. 비 맞지 말고.
- 네.
(발자국 소리)
(문 여닫는 소리 및 잔잔한 음악 소리)
- 네, 어서 오세요.
- 아이, 조그만 다방이로군요.
- 오, 저기 앉읍시다.
- 여긴 언제 와보셨어요?
- 미스 오.
- 처음이에요.
- 차 드릴까요?
- 응, 저 커피.
- 네, 저두요.
- 흠...
- 이상하시다. 사장님. 어딜 꼭 가보실 데가 있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 뭐, 그전에 갔던 나이트클럽을 생각했나?
- 아, 아니요. 사장님은 좀 엉뚱한 곳이 있어서 거긴 생각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 기대 밖이라는 얘기군.
- 네, 좀 놀랐어요.
- 미스 오, 비 오는 늦은 밤에 이런 데를 같이 오자고 해서 미안해요.
- 미안하실 건 없어요.
- 그렇지만 와보고 싶었소. 갑자기... 미스 오한테 가기 전부터 사실 여기 혼자 오고 싶어서
기사를 보냈던 거요.
- 차 드세요.
(찻잔 부딪치는 소리)
- 사장님, 왜 그 창 있는 쪽을 그렇게 찬찬히 보세요?
- 저기 저 창 아래에 내 책상이 있었소. 낡은 책상, 삐꺽이는 의자.
- 네?
- 4년 전 말이오.
- 4년 전이라뇨?
- 이 작은 변두리에 사무실 얻어서 4년 전에 처음으로 회사에 손을 댔어요.
- 어머나, 그럼 여기가...
- 여기서 1년 좀 못되고 10개월쯤 지냈소. 이쪽은 물건 쌓아두는 창고였고 저기엔 고물상에서 사온
헌 소파가 있었고. 밤이 늦으면 집에 가지 않고 그 소파에서 자곤 했지. 연탄난로 하나 피워놓은 채...
아하하하... 재미없어요? 미스 오.
- 아, 아니에요. 얘기 해주세요. 듣고 싶어요.
- 대학을 졸업하자 난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할려고 했어요. 교수가 되려 했어.
- 네.
-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누가 자본을 조금 대줄 테니까 오퍼상을 하나 해보라더군.
오퍼상, 사람 몇이서. 수출무역의 구멍가게 같은 거 말이오.
- 여기... 에서요?
- 자신도 없었지만 별로 부담을 갖지 않았소. 다만 사회 첫 경험이니까 모험 삼아서, 경험 삼아서 한번 해보자.
- 이렇게 커질 줄은 예상을 못하셨나요?
- 못했어, 전혀... 첫해에 이 창고 같은 골방에서 수출이 500만 불이 되더군. 다섯 명 직원이 스물한 명으로,
그날 밤 밤새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면서 우리들의 인생을 축하했고 정직히, 성실히 노력하면 반드시 보답이 있는 거라고
믿었소.
- 사장님, 차가 다 식었어요.
- 식은 건 그 차뿐이 아니야. 내 인생도, 내 젊음도, 욕망도, 꿈도 다 식었소.
- 다시 불을 붙이세요. 안 되나요? 사장님.
(음악)
- 음악을 틀까?
(음악 켜는 소리)
- 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 소리)
- 고속도로에 나오니까 두렵나?
- 아니에요.
- 비가 오고, 밤이 깊어지고 차는 과속으로, 하지만 난 달려보고 싶소.
난 달려보고 싶어.
- 어디까지요, 사장님.
- 그 사장 소리 좀 집어치울 수 없나?
-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요.
- 내 이름은 서태진이요.
- 이름을 부를 순 없어요.
- 왜, 왜 못 불러?! 난 이제 이름도 못 불리울 사람인가?! 그래, 그렇지.
난 이미 내 이름 같은 건 무시하면서 살아왔으니까. 자, 속력을 좀 더 높일까? 무섭나?
- 아, 몰라요! 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진 않아요. 사장님 얼굴을 보고 있어요.
- 내 얼굴이 뭐가 보이나?
- 눈물이에요. 사장님 울고 계시죠.
(차 급정거하는 소리)
- 위험해요.
- 철이 난 후로 난 울어본 일이 없소. 내 눈물을 본 사람이 없소.
- 사장님.
- 미스 오.
- 네.
- 날 잠깐만 안아줘요. 잠깐만, 제발...
- 사장님. 음...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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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인생극장. 김남 극본. 달려오는 사람들. 이규상 연출. 열아홉 번째로 롯데삼강 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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