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얼굴
고려야구 제공입니다.
『 언제인가 우리가 처음 만난 밤은. 쓸쓸한 겨울 거리에 눈송이 처럼 흩어지는 낯선 얼굴. 밀려오는 그리움이여. 지난 가을 당신은 낙엽을 태우는 불꽃이더니, 이제는 한줄기 바람되어 흘러가는가. 사랑을 그 누가 아프다 하리. 우리 마음 깊은 숲속에서 길고 긴 어두움을 흐느끼는 겨울 바람이여.』
김경란 극본 이규상 연출 서른 한번째로 마지막 번째.
(개 짖는 소리)
- 하아, 자, 어떠냐 해리. 몸이 후끈후끈 하지? 자, 이제. 이제 그만그만. 아아아, 그만해 해리. 자꾸 덤비지 말고, 가서 쉬어라. 흠.
(문 여닫는 소리)
- 이제오니?
- 네. 엄마.
- 아, 왠일이니? 아침에 산보를 다 하고.
- 간편하게 살려고요.
- 하하. 자, 마셔라. 시원할꺼다.
- 네. 어머니도 내일부터 같이 뛸까요?
- 얘, 하하. 징그러운 소리 말아라. 근데, 요새 너 어떻게 된거냐?
- 왜요?
- 통 말이 없고, 너무 생각에 잠겨 있어.
- 이제 됐어요. 어머니.
- 음. 그래. 혜수는?
- 어머니, 나 밥주세요. 배고파 죽겠어요.
- 얘.
- 그래요. 엄마. 시간이 필요해요.
- 내가 좋은 여자를 골라보겠다.
- 그만 두세요. 필요 없어요. 아유, 빨리 밥주세요.
- 하하. 그래 들어오너라. 식당으로.
- 네.
(음악)
(문 여닫는 소리)
- 아유, 미스 윤이 왠일이야? 하하.
- 안녕하세요. 선생님. 보름 만이죠?
- 그래.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어?
- 하아, 미안해요. 어쩔 수 없이. 전시회는?
- 응, 성공적이었어.
- 힘드셨죠?
- 하하. 그야. 근데, 여기 다시 나올꺼야?
- 왜요? 그만둬요?
- 아유, 그만 두긴. 그동안 쭉 혜수가 도와줘서 만든 꽃꽃이 회인데?
- 하하. 고마워요. 선생님. 그럼 꽃을 몇가지 더 주문해야 겠어요.
- 으응? 그래? 하하하. 아유, 이제 여기가 가득차는 거 같애. 매일 어느 한 구석이 빈거 같았거든? 하하.
(전화벨소리)
- 제가 받겠어요. 선생님.
(수회기 드는 소리)
- 네. 은화입니다.
- 혜수?
- 네.
- 오래간만이군.
- 그렇군요.
- 보고 싶은데.
- 끊겠어요. 전화.
- 만나고 싶어, 보고 싶다는 말이 맘에 안든다면.
- 나 일해야 돼요.
(수화기 내려 놓는 소리)
(음악)
(초인종소리)
- 누구세요?
(문 여는 소리)
- 어, 어머.
- 안녕하세요? 영훈씨 있어요?
- 오빠, 나갔어요.
- 아, 어딜갔을까?
- 아마 바닷가에 나갔을 거에요.
- 바닷가에?
- 네. 저쪽 차도 있죠? 거기서 버스를 타고 가면 돼요. 종점이니까요.
- 알았어요. 고마워요.
- 하하. 아니에요. 안녕히 가세요.
(문 닫는 소리)
(음악)
- 아유, 왠 겨울비가 이렇게 내리는지 모르겠네?
- 그러게 말이에요. 하지만 아름답죠? 촉촉히 젖은 거리가.
- 글쎄? 난 추워보이기만 해. 하하하.
- 하하하.
(문 여는 소리)
- 안녕하세요.
- 아유, 미스터 서가 왠일이야? 누상 전화를 해서 나를 귀찮게 하더니.
- 하하하. 죄송합니다. 선생님.
- 하하하. 아유, 데려가려면 아예 데려가든지, 귀찮아서 살 수가 있나.
- 저, 선생님. 잠깐 나갔다 올게요.
- 응. 그래. 어서 나가봐.
- 안녕히 계세요. 또 뵙겠습니다.
- 어, 안녕.
(음악)
- 그동안 잘 지냈어?
- 네.
- 하지만 얼굴은 핼쓱하군.
- 그래요? 차차 나아지겠죠.
- 어색하게 그럴거 없어. 어차피 내가 찾아온 거니까.
- 우연히 만난 것 보다 나쁘군요.
- 의지보다는 운명쪽이란 뜻인가?
- 의지니 운명이니 그런거 따질 때는 지났어요. 철저하게 나는 사는 일이 절박해요.
- 어떻게 살겠어.
- 사랑하면서.
- 후후. 사랑이라. 그게 얼마나 하찮은 건지 혜수가 보여줬잖아.
- 하지만 미움보다는 좋아요.
- 그런가?
- 나, 할 얘기 없어요.
- 내가 혜수를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해? 미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가능하면 경멸도.
- 그렇게 해요. 하지만 인생은 그러지 말아요.
- 거짓말이야.
- 네?
- 너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야.
- 하아, 알아요.
- 지독하게 사랑하는 여자를 미워하면서 인생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 미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인생을 미워할 필요는 없어요. 하긴 난 알아요. 지훈씨는 잘 해나갈꺼에요.
- 그래. 잘 해나갈꺼야.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 난.
- 지훈씨? 그만 해요. 타인의 인생에 관여하지 말아요.
- 난, 널 포기하지 않아.
- 그만. 오늘은 나 이만큼만 괴로워도 충분해요. 어느날 지훈씨가 아파서 견딜 수 없어지면 또 오세요. 나 피곤하지 않을게요.
(음악)
- 우산 써, 영훈씨.
- 어. 하아, 수미.
- 왜 그러고 앉아 있어? 춥지도 않아?
- 왠일이야?
- 그냥 왔어. 비도 내리고 마음도 쓸쓸하고. 보고싶고.
- 춥지 않아?
- 약간.
- 가자. 저쪽.
- 어디?
- 전철역.
- 얘기 좀 해 우리.
- 가면서 얘기 하자.
- 겨울비 좋아해?
- 응.
- 운거야?
- 응.
- 왜?
- 응.
- 무슨 생각하고 있어? 남의 말을 한마디도 안듣고.
- 하아, 비를 보고 있었어.
- 처음보나 뭘.
- 수미.
- 응?
- 그럴거 없어. 애써 명랑하려고 하지 말아.
- 후, 그래. 좋아.
- 하려고 했던 말. 해 봐.
- 덤비고, 대들고 싶었어. 하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 왜?
- 겨울비를 맞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약해졌어. 나 갈께.
- 바래다 줄께.
- 관 둬. 우산 안써도 되겠지? 이미 다 젖어 버린 걸 뭐. 안녕.
(전화벨소리)
- 여보세요?
- 나에요.
- 어디에요.
- 인천. 거기 비와요?
- 네. 거기는?
- 여기도 비가 와요. 뭐 했어요?
- 꽃을 주문하고 꽃꽂이를 가르치고, 차를 마시고, 후후 뭐했어요?
- 항구를 기웃거리며 외항선을 살펴봤어요. 수평선을 보면서. 비를 맞고 앉아 있었고요.
- 참 쓸쓸해요.
- 추워요. 감기 들거 같아요. 며칠 누워서 앓아야 겠어요.
- 뜨거운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많이 넣어서 먹어요. 그럼 쉬이 날 꺼에요.
- 하하. 뭐 하고 있어요?
- 꽃을 꽂고 있어요.
- 늘 꽃을 꽂는 군요.
- 영원히 꽃을 꽂아야 할거 같아요.
- 돌아가요. 이젠.
- 그래야 겠어요.
- 우산 있어요?
- 없어요.
- 그럼 비닐 우산을 하나 사요.
- 그냥 맞으면서 갈래요. 끊어요.
- 사랑해요.
- 끊어요. 전화요금 많이 나와요.
- 끊어요.
- 안녕.
(수화기 내려 놓는 소리)
- 하아.
(발소리 및 문 여닫는 소리)
(음악)
(입력일 : 200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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