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얼굴
고려야구 제공입니다.
『 언제인가 우리가 처음 만난 밤은. 쓸쓸한 겨울 거리에 눈 송이 처럼 흩어지는 낯선 얼굴. 밀려오는 그리움이여. 지난 가을 당신은 낙엽을 태우는 불꽃이더니, 이제는 한줄기 바람되어 흘러가는가. 사랑을 그 누가 아프다 하리. 우리 마음 깊은 숲속에서 길고 긴 어두움을 흐느끼는 겨울 바람이여.』
김경란 극본 이규상 연출 스물 일곱번째.
- 얘, 지훈아. 지훈아.
- 어유, 어. 왜 어머니.
- 하하. 아침 안 먹니?
- 아, 못 먹겠어요.
- 아유, 대체 왠 술을 이렇게 마셨니?
- 물 좀 주세요.
- 오, 그래.
(물을 잔에 따르는 소리)
- 여깄다.
- 음. 아.
(물 마시는 소리)
- 아, 됐어요. 나 좀 더 자겠어요.
- 무슨 일 있었니?
- 아뇨.
- 무슨 일이냐.
- 어머니?
- 응?
- 찾아 보세요.
- 아니, 뭘?
- 어머니 맘에 드는 여자요.
- 뭐?
- 빨리요. 착하고 바보 같은 여자를 하나 구해 보세요.
- 미쳤니. 너?
- 왜요. 싫으세요? 엄마가 원하는 여자를 찾아 달라는데.
- 한밤중에 홍두깨구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게다.
- 자겠어요. 나.
- 그래. 찾아 보마. 저, 그보다 먼저 아침이나 먹어라. 가지고 올라오마.
-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엄마.
- 뭐가 아니야 또.
- 찾지 마세요. 다른 여잔. 혜수가 있으니까요.
- 네가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다. 실없는 녀석.
(문 여닫는 소리)
- 바보야, 팽개쳐 버리는 거야. 팽개쳐 버리는 거야. 더 생각할 여지가 없어. 하지만 혜수도 그 녀석도 그것을 원해. 팽개쳐 버리는 걸. 그건 해줄 수가 없어. 아니야, 아니야.
(음악)
- (이것만은 알아둬야 해. 혜수는 행복해야 해. 난 혜수를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어.)
- (한번쯤 물어봐 주세요. 혜수를 그렇게 사랑했니? 아주 부드럽게 인간적인 목소리로 물어보세요.)
- (혜수는 나의 운명이야. 내가 나의 방탕과 무절제를 극복해서 얻었어. 난 혜수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혜수는 나의 운명이야.)
(유리 깨지는 소리)
(음악)
- 영훈아.
- 네. 흠.
- 이쪽으로 얼굴을 돌려봐라. 흠. 엄마를 좀 봐.
- 그냥 내버려 둬요. 엄마.
- 왜 그러니? 왜 엄마를 못 봐?
- 하. 엄마 괜찮으시겠어요?
- 뭐가 말이냐.
- 몸 말이에요.
- 괜찮다.
- 선희가 아침 해 놨대요. 갔다 드릴게요.
- 괜찮다.
- 계세요. 그럼. 난 서울에 가겠어요.
- 거긴 뭣 하러 가.
- 가야 해요. 걱정 마세요. 내 일때문에 그래요.
- 그 집엔 가지 말아라.
- 거긴 끝났어요.
- 오늘 오겠니?
- 네.
(음악)
- 미스 윤, 굉장히 피곤해 보여.
- 아니에요.
- 어디 아픈거 아니야?
- 하하. 어서 꽂으세요. 아직 세 작품이나 더 구성하셔야 하잖아요.
- 글쎄 말이야. 아유, 힘이 들어 괜히 시작했나봐.
- 그래도 끝 보다는 시작이 좋아요.
- 난 얼른 끝냈으면 좋겠는 걸? 호호호.
- 호호호호.
(문 여닫는 소리)
- 안녕하세요.
- 호호. 어.
- 어머, 수미.
- 지나다가 들렀어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 응, 어서와.
- 앉아.
- 네.
- 꽃 꽂을 테야?
- 아유, 아니에요. 언제 포기했는데요. 뭐.
- 너무 이르지 않아?
- 그래도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 나도 전시회를 포기할 까봐.
- 어머. 호호호.
- 호호호호.
- 잘 지냈어?
- 네. 언니는 요?
- 그저.
- 얼굴이 나빠 보여요.
- 그래?
- 생각 중이에요.
- 뭘?
- 포기할까 말까. 영훈씨는 인천으로 돌아갔어요. 이젠 볼 수가 없게 됐는데도 난 보고 싶어요.
- 자, 수미? 가 있어. 내가 있다가 갈께.
- 그래요. 오세요. 사실은 지금 인천으로 갈까 했는데, 그러지 않는게 좋겠어요. 선생님, 저 가요.
- 어, 또 와 수미.
- 네.
(문 여닫는 소리)
- 하아.
- (내 말을 들어야 해요. 난 아마 빼앗게 될 겁니다. 형에게서 가장 귀한 것을.)
- (뭘 빼앗아요? 그만 둬요. 그런 건.)
- (뭔가 단념한다는 건. 참 힘드는 일이에요. 끊어버린다는 건. 희망을)
- (그걸 가져요. 우리.)
- (난 끊어야 해요. 당신에 대한 나의 희망을. 가요. 난 가요.)
- (가세요. 가요. 가요.)
- 아니, 미스 윤. 왜 그래?
- 음. 아니에요. 잠깐. 죄송해요.
- 얼굴이 백지장같애.
- 신경쓰지 마세요.
- 좀 쉬어. 응?
- 네.
(음악)
(문 여닫는 소리)
- 안녕, 춘식씨.
- 어서 와.
- 히히. 반겨줘서 고맙다.
- 반겨 준게 아니야. 놀랜거지.
- 뭘, 놀래?
- 냄새 기차게 맡는다.
- 에이, 뚱딴지 같은 소리 관두고 커피나 한 잔 줘.
- 형, 맥주 두 병 꺼내 주세요. 안주 하나 하고요.
- 어머, 영훈씨 왔어?
- 응.
- 왜?
- 일 하려고.
(병 부딪치는 소리)
- 자, 여깄다.
- 아유, 춘식씨. 춘식씨가 좀 갔다 줘.
- 내가? 오냐.
- 후훗. 앉아.
- 응.
- 어쨌든 와서 반갑다. 변덕쟁이구나 영훈씨. 아이, 말하고 싶은 기분 아니야?
- 응?
- 혼자 있고 싶어?
- 아니야, 아니야.
- 그런 얼굴인데 뭐.
- 그래, 혼자이고 싶다. 철저하게.
- 그럼 왜 여기 왔어?
- 기다리는 거야.
- 뭘?
- 내가 마땅히 치뤄야할 일들. 아니, 형을 기다리고 있어.
- 지훈씨?
- 응.
- 왜?
- 수미야.
- 알았어. 좋아. 기다려. 난 음악이나 틀을 테니까. 이상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온통 허전해 지는지 모르겠어.
(음악)
(전화벨소리)
- 네. 은하 입니다.
- 나.
- 지훈씨.
- 내 말들어.
- 듣고 싶은 말이 없어요. 끊어요.
- 난 할 말이 있어. 그러니 들어. 다 잊어 버리는 거야.
- 하나도 잊어 버리지 못할 거야. 잊어 버릴 수가 없는 거야.
- 난 잊을 수 있어. 그러니까 너도 잊어. 혜수도.
- 지훈씨. 안 돼.
- 돼.
- 지훈씨가 괴로워.
- 더이상 긴 말은 하지 말자. 결혼해.
- 지훈씨. 제발 이러지 마.
- 내일 만나. 기다려.
- 지훈씨.
(전화 끊는 소리)
- 하아.
(음악)
김보연, 유민석, 박 일, 김 민, 오세홍, 권희덕, 안경진, 정경애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석
인생극장 김경란 극본 거리마다 낯선 얼굴 이규상 연출
스물 일곱번째로 고려야구 제공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7.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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