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얼굴
고려야구 제공입니다.
『 언제인가 우리가 처음 만난 밤은. 쓸쓸한 겨울 거리에 눈 송이 처럼 흩어지는 낯선 얼굴.
밀려오는 그리움이여. 지난 가을 당신은 낙엽을 태우는 불꽃이더니, 이제는 한줄기 바람되어 흘러가는가.
사랑을 그 누가 아프다 하리. 우리 마음 깊은 숲속에서 길고 긴 어두움을 흐느끼는 겨울 바람이여.』
김경란 극본 이규상 연출 스물 다섯번째.
- 영훈아, 아버지가 오셨니?
- 아, 아니에요. 엄마.
- 욕심이 생기는 구나.
- 엄마.
- 아버지를 뵙고 싶다. 영훈아, 엄마는 아무래도.
- 엄마, 제발.
- 참, 그 긴세월을.
- 영훈씨. 전화 걸고 오겠어요.
- 그만 둬! 그만! 이리 돌아와요.
- 전화를 걸께요. 아버지를 오라고 할게요.
- 오지 않아. 그들은 그들의 일이 무사히 끝나기 전까진. 아니, 이젠 와도 내가 받아 들이지 않아.
- 엄마가 보고 싶어 하시잖아요.
- 헉헉헉.
- 엄마!
- 허헉헉헉.
- 끝까지 바보에요. 엄마가 미워요.
- 영훈아. 영훈아.
- 흑흑.
- 의사는 어디갔어요?
(문소리)
- 엄마, 살아야 되요. 사시는 거에요.
- 영훈아.
- 흑흑.
- 언제나 난 죽음을. 단지 널 어떻하니.
- 사는 거에요. 그것만 생각해요.
- 널 어떻하니, 널. 당신이 와야. 내가.
- 엄마!
- 영훈이를 부탁하는데. 부탁해야 쉽게 떠나지.
(문소리)
- 선생님. 흑흑.
- 허억.허억.
- 고비에요. 넘기면 살 수 있을 겁니다. 간호원. 진통제.
- 네.
- 선생님, 가세요? 여기 함께 계셔 주세요.
- 응급 환자가 있습니다.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고요. 만성환자니.
- 흐음.
(음악)
- 하느님, 난 당신을 믿지 않지만 당신이 계시다면.
(내려치는 소리)
- 영훈씨.
- 당신이 계시다면, 당신이 계시다면 어머니를 살리세요. 그래야 내가 삽니다. 난 여태껏 충분히 괴롭게 살아왔지만, 죽진 않았어요. 어머니, 어머니가 계시니까.
- 영훈씨. 흑흑.
- 흑흑.
- 나를 봐요. 나를 좀 봐요.
- 흑흑. 저리가. 저리 가요.
- 영훈씨.
- 가요.
(발소리)
- 하늘이시여, 당신은 보십니까? 나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을 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나는 보입니다. 당신도 보세요. 그리고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그를 살려주세요. 그래야 내가 삽니다.
(음악)
(문 두드리는 소리)
- 여보.
- 거기 서 계세요.
- 뭐라고?
- 거기 서 계세요.
- 어떻게 됐니?
- 가까이 오지 마세요. 너무 늦었습니다.
- 뭐라고?
- 돌아가세요.
- 하아, 어머니는 괜찮으신 모양이구나.
- 네. 괜찮으세요.
- 다행이다.
- 다행이에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발소리)
- 아버지, 의사말이 고비는.. 왜 그러고 계세요?
- 나가!
- 왜 이래.
- 너희 아버지 모시고 가.
- 미안하다. 하지만 그 땐 어쩔 도리가 없었어.
- 없었겠지. 물론. 수화기 속으로 들리더군. 웃음 소리들. 그 웃음을 지키기 위해선 죽어가는 사람 소원쯤 두어 시간 미룰 수도 있었겠지.
- 영훈씨.
- 흑흑.
- 그만, 조용히 해야 돼요.
- 혜수, 어딨었어.
- 지훈씨, 자. 그만해요. 지훈씨 그만 나가 줘.
- 혜수.
- 어서. 나가.
- 흠.
(발소리 및 문 닫는 소리)
- 영훈아. 내가 잘 못했다.
- 아니, 잘하셨어요. 그래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을 거에요. 그 시간에 아버지가 오셨더라면.
- 흠. 여보.
- 잠이 드셨어요. 어쩜 아버지를 기다리느라고 못 가셨는지도 모르죠.
- 영훈아.
- 그렇게 한 여자의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그 여자를 위해서 그렇게 해줄게 그렇게 아무것도
없었습니까?
- 영훈씨, 제발 진정해요.
- 가만히 있어.
- 조용히 해야 돼요. 조용히.
- 알았어.
- 나가요. 나가서 좀 가라앉혀요. 자.
- 흑흑.
(발소리 및 문소리)
- 어딨어요?
- 모르겠어요.
-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려요.
- 함께 있겠어요.
- 위험해요.
- 제발, 다른 생각을 해요. 어머니 사셨어요. 그걸 기뻐하세요. 미워하지 마세요. 형을. 그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에게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거든요.
- 그래서 내 어머니의 죽음과 자기 어머니의 생일잔치를 혼동합니까? 그래요?
- 영훈씨. 쉬어야 해요. 너무 지쳐 있어요. 앉아요. 의자에.
- 혜수씨. 가요. 내 눈에 띄이지 않는 곳으로 가요. 그래요.
- 싫어요. 곁에 있겠어요.
- 내 말 들어야 해요. 난 빼앗기게 될 겁니다.
- 뭘 빼앗아요? 그만 둬요. 그런 것은.
- 형에게서 가장 귀중한 것을 빼앗을 거에요.
- 영훈씨.
(음악)
(음악)
(문 여닫는 소리)
- 어서오세요.
- 나에요.
- 어. 야 임마. 여기가 너희집 건너 방인줄 아니? 들어왔다 나갔다 멋대로 하게.
- 죄송해요. 형, 수미는 어디갔어요?
- 안나온다. 요즘.
- 그래요? 전화 좀 할까요?
- 멋대로 마음대로 해라.
(수화기 들고, 거는 소리)
- 네, 여보세요.
- 영훈이야.
- 어머, 거기 어디야?
- 가게.
- 오, 그래? 돌아왔어?
- 응.
- 아무일도 없었어?
- 응.
- 어머닌 다 나으신 모양이지?
- 응.
- 기다려, 나갈께.
- 그러겠어?
- 응. 영훈씨?
- 응?
- 기다렸어.
- 그래.
- 보고 싶었어.
- 와라. 끊는다.
(수화기 내려 놓는 소리)
(전화벨 소리)
- 은하 입니다.
- 나야.
- 끊어.
(수화기 내려 놓는 소리)
- 왜 그래?
- 아, 아니에요. 선생님. 꽃 좀 봐주세요.
- 응. 괜찮은데? 강렬하고.
(전화벨 소리 및 수화기 드는 소리)
- 네. 은하 입니다.
- 답답하긴. 나와. 혜수. 나와 줘. 나 지금 괴롭다.
- 왜 괴로워? 지훈씨가.
- 글쎄, 암튼 난 너와 얘길 해야 할 거 같애.
- 얘기해.
- 내가 잘 못 했어. 그 땐 그렇게 위독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 지나간 일이니까 쉽게 얘기 할 수 있는 거야.
- 그럴지도 몰라. 용서해.
- 내가 용서할 건 없어. 됐어 이젠?
- 아니, 하나 더.
- 뭐야.
- 난 네가 왜 그 곳으로 달려갔는지 이해 못하고 있어. 옹졸하게도. 그것도 용서해.
- 알았어.
(수화기 내려 놓는 소리)
(음악)
김보연, 유민석, 박 일, 김규식, 김 민, 오세홍, 안경진, 김환진, 정경애, 홍경화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석
인생극장 김경란 극본 거리마다 낯선 얼굴 이규상 연출
스물 다섯번째로 고려야구 제공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8.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