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얼굴
고려야구 제공입니다.
『 언제인가 우리가 처음 만난 밤은. 쓸쓸한 겨울 거리에 눈 송이 처럼 흩어지는 낯선 얼굴.
밀려오는 그리움이여. 지난 가을 당신은 낙엽을 태우는 불꽃이더니, 이제는 한줄기 바람되어 흘러가는가.
사랑을 그 누가 아프다 하리. 우리 마음 깊은 숲속에서 길고 긴 어두움을 흐느끼는 겨울 바람이여.』
김경란 극본 이규상 연출 스물 세번째.
(문 여는 소리)
- 어이, 미스 윤. 꽃이 왔어.
- 어머, 그래요? 어머 여기가 꽃동산이 되어 버리겠어요.
- 자, 어서 안으로 나릅시다.
- 예.
- 아, 저쪽 구석 부터 차근차근 넣도록 해요. 양쪽에.
- 예예.
- 의자는 저쪽으로 미뤄야 겠는데요?
- 네.
- 아유, 어때. 꽃 처리 해야 되겠는데, 약품 충분해?
- 글쎄요. 살펴 볼께요.
- 아유, 조심하세요. 장미 이쪽에 얹어요. 네 됐어요.
- 저, 선생님. 다른건 다 있는데, 아스피린하고 백반을 더 준비해야 겠어요.
- 그럼 어서 사와야 겠네.
- 그럼 지금 사올께요.
- 그래.
(발소리 및 문 여닫는 소리)
- 얘, 혜수야.
- 어? 너 왔구나.
- 어딜 그렇게 급히 가니? 자기가 오라고 하고선.
- 하하. 들어가서 꽃 나르는 것 좀 도와줘. 나 약국 가.
- 왜? 어디 아파?
- 아니, 꽃 때문에 그래.
- 하하하. 꽃이 어디 아프대?
- 후훗, 카네이션은 아스피린을 먹어야 하고, 장미는 백반이 있어야 오래 가.
- 고급이구나 걔들. 응. 같다 와. 그럼.
- 응.
(발소리 및 문 여닫는 소리)
- 안녕하세요.
- 아유, 경주 왔어? 왠일이야?
- 혜수가 아스피린이 필요한 모양이에요.
- 아스피린?
- 네. 몸 감기에는 아스피린. 마음 감기에는 수다. 하하하.
- 하하하. 아유, 참.
- 수다 들어주러 왔는데, 꽃 부터 날라야 겠어요.
- 하하하. 응 아무튼 좀 도와줘. 아유, 정신이 없어. 호호호.
- 그럼 아저씨. 내가 차 위에서 꽃을 내릴테니까, 거기서 받으세요.
- 아, 그럽시다. 하하하.
- 자, 받아요.
- 예.
(음악)
- 인천이 옆 동네인 줄 알아?
- 후훗, 옆 동네였으면 좋겠어. 시간과 거리는 답답한 굴레야.
- 하아, 왜 왔어.
- 술 사주러. 술 마시겠다고 그랬잖아.
- 고마워.
- 고마워?
- 응.
- 후훗. 이상하다 그런 소리 들으니까.
- 어, 여기 들어갈까?
- 응. 어, 좋아.
(문 여는 소리)
(사람들의 소란스런 소리)
- 어서오세요. 자, 이리 앉으세요.
- 앉지.
- 응.
- 술 좀 주세요.
- 뭐로 들겠어요? 막걸리?
- 소주 주세요.
- 안주는.
- 어, 뭐 먹을테야. 족발?
- 아무거나.
- 저, 파전 있죠?
- 예. 있어요.
(사람들의 작은 소란거리는 소리)
- 귀찮아? 나.
- 아니.
- 내가 참 비현실적인거 같애. 나 같지가 않아. 사실, 나 다시는 오지 않으려고 했어.
- 알아.
- 툭툭 털어버리니까 이렇게 오기가 쉬워져.
(병들 부딪치는 소리와 병 따는 소리 및 술 따르는 소리)
- 뭘 털어버렸어.
- 환상.
- 하아, 그런게 여태껏 살고 있었니? 이 세상에.
- 응. 내 환상은 그런거야. 사랑하면 사랑 받아야 한다. 반드시. 그거 거뒀치웠어. 우린 친구야.
(술 마시는 소리)
- 커억, 어휴, 어휴 써.
- 흐흐흐.
- 어유, 무슨 술이 이 따위야.
- 흐흐흐.
- 웃지마. 이거 맛있는데, 먹어 봐. 영훈씨도. 어서.
- 그래.
- 아줌마, 여기 파전 더 줘요.
- 수미야.
- 응?
- 넌 어떻게 살꺼니?
- 몰라, 지금껏 괜찮게 살았어. 사는 일이 내겐 힘들지 않아.
- 하, 그래 그렇게 살아. 힘들지 않게.
- 후후, 그럴께.
- 나쁜 일 곁으론 가지마.
- 나쁜 일? 그게 내게로 오면 그것도 좋은 일로 생각할 수 있어. 괴로움도 겪어보니까 그렇게 무서운 건 아니야.
- 몰라서 그래.
- 그래. 난 몰라. 하지만 말이야.
(술 마시는 소리)
- 흠. 카야.
- 난 술같은 여자는 되고 싶지는 않아. 그런 여자는 너무 아파.
- 술은 아파서 마셔.
- 많이 마셔봐, 괜찮아. 난 안주같은 여자로 남아 있겠어. 그게 내 한계야.
- 바보야, 은청이.
- 술을 마셨으면 안주 먹는거야. 몇 번 말해야 알아? 어서.
- 그래. 흐흐흐.
(음악)
- 취하는 구나, 꽃 향기에.
- 너무 많으니까, 마치 꽃 무덤 같아.
- 차나 한 잔 끓여.
- 관 둬. 나 움직이기 싫어.
- 왜 그러니 또?
- 도망가고 싶어.
- 뭐가 널 쫒아오니?
- 숨막히게 쫒아와. 도망가고 싶어. 이 생활에서. 이 끈적거리는 삶에서.
- 어디로 갈테야?
- 그걸 알면, 내가 안가고 여기 꽃더미 속에 앉아 있겠니?
- 소리지르지 마. 대체 니가 괴로운 이유가 뭐야? 지훈씨. 좋은 남자야.
- 때로는.
- 적에도 너에겐 언제든지 그래. 너에겐 진실해.
- 진실이 뭔데?
-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못하는 거야.
- 내게도 그건 있어.
- 물론 있겠지.
- 넌, 환상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 그럼 아니야?
- 흠. 환상이야. 하지만 내 환상은 깨어져서 환멸이 되는 그런 건 아니야. 깨어지면 내 생활이 돼.
- 그게 환상이라는 거야.
- 지훈씨의 사랑을 내가 몰라? 알아. 그러니까 그 사랑을 벗어나고 싶을 만큼 내 진실도 커. 알아? 난 내 어두움과 내 아픔을 사랑해. 영훈씬 그걸 가졌어. 그를 따뜻하게 살게 해주고 싶어. 그러고 싶지만. 흑흑. 경주야. 난.. 경주야.
(음악)
(문 여닫는 소리)
- 영훈아.
- 아니.
- 얘기 좀 하자.
- 왜 부르지 않았어요.
-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서 들리더군. 니가 어딘가 가겠다고 하는 소리를.
- 무슨 일이에요.
- 알텐데.
- 모르겠어요.
- 혜수.
- 그만 해요.
- 흠.
(발소리 및 차 치는 소리)
- 어, 이게 형 차에요?
- 어.
- 하, 좋군요. 멋있어요.
(내려치는 소리)
- 흐흐. 역시 내 손만 아프군요. 좋은 차 가지셨어요.
- 난 바쁘다.
- 나도 바빠요. 태워다 주시겠어요?
- 아니, 여기서 얘길 끝내기로 하지. 혜수는 내 여자야.
- 그래요. 형 여자에요.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 내겐 중요해.
- 내 여자. 내. 말하자면 소유가 중요하단 말이지요.
- 그런 뜻이 아니야. 내게 그 여자가 필요하단 뜻이야.
- 필요? 필요라고 그랬어요? 그걸로 따지자면은 난 형보다 혜수씨가 더 필요해요.
- 그런 소린 용서하지 못해!
- 그럼 무슨 소릴 듣고 싶으세요.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싶은가요?
- 좋아. 다 듣자. 무슨 소릴 하고 싶어.
- 됐어요. 형이 뭘 알겠어요. 가세요.
- 이 것만은 알아야 돼. 혜수는 행복해야 해. 난 혜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 알아요.
- 그러니 이젠 혜수를 내버려 둬. 접근 하지 마!
- 그런 소리. 접근? 흐흐흐. 그렇게 표현하지 마세요. 난 혜수 때문에 내 미움을 팽개쳤어요. 미움같은게 너무 초라해서 그리고 내가 너무 초라해서, 혜수에게서 떠났어요. 알겠어요? 한 번쯤 물어봐 주세요. 혜수를 그렇게 사랑했니? 아주 인간적인 목소리로 물어보세요.
- 결코 못할 소리라는 걸 알잖아? 너도 이건 알아야 해. 혜수는 나의 운명이야. 나의 방탕과 무절제를 극복해서 얻었어. 그래서 난 혜수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 가세요. 이젠.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어요. 엄마에게 가야 해요. 갑니다.
(발소리)
- 하아.
(음악)
김보연, 유민석, 박 일, 유근옥, 안경진, 정경애, 김환진, 이효숙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석
인생극장 김경란 극본 거리마다 낯선 얼굴 이규상 연출 스물 세번째로 고려야구 제공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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