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얼굴
고려야구 제공입니다.
『 언제인가 우리가 처음 만난 밤은. 쓸쓸한 겨울 거리에 눈 송이 처럼 흩어지는 낯선 얼굴.
밀려오는 그리움이여. 지난 가을 당신은 낙엽을 태우는 불꽃이더니, 이제는 한줄기 바람되어 흘러가는가.
사랑을 그 누가 아프다 하리. 우리 마음 깊은 숲속에서 길고 긴 어두움을 흐느끼는 겨울 바람이여.』
김경란 극본 이규상 연출 스물 두번째.
(문 여닫는 소리)
- 어머! 미스 윤 나왔어?
- 네. 선생님. 어제 못 나와서 죄송해요.
- 어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 후후. 이것저것 복잡한 일이 있어서 바다에 갔었어요.
- 바다?
- 네.
- 그 남자랑?
- 네?
- 아이 저, 서울역에 10시에..
- 아니에요.
- 그래? 어쨌든 미스터 서 헐레벌떡 달려오고 열 번은 전화했을 거야. 얼른 전화해 줘.
- 네.
- 오늘은 별일 없지?
- 네. 물론이에요. 선생님.
- 그럼, 나 전시회 장소 계약하고 집으로 가겠어. 이제 얼마 안남았어.
- 그렇군요. 정말. 다녀오세요.
- 으응.
(문 여닫는 소리)
(음악)
(그릇 달르락 거리는 소리)
- 아니, 왜 벌써 수저를 놓니?
- 됐어요.
- 니가 요샌 아무래도 일이 있는 모양이다.
- 후후. 없어요. 그런거. 어머니?
- 응?
- 이모들 좀 오시라고 해요.
- 아니 왜?
- 의논할 일이 있어요.
- 무슨?
- 어머니 생신 말이에요.
- 아휴, 얘. 관둬라. 내가 지금 얼굴 내놓게 생겼니? 그런 자리에.
- 그러니까 해야 하는 거에요. 급해요. 닷새 남았으니, 초대하실 분도 정해야 하고, 그런 일들은 이모들이 잘하잖아요. 하하하. 극성 스러우니까요. 하하.
- 별로 내키지가 않는구나.
- 아버지가 제안하신 거에요.
- 그럴리가 있겠니? 매해 잊어 버리시는 분이.
- 하하하하. 올핸 잊어버릴 배짱이 없으셨나봐요. 저 오늘 전화하세요. 아셨죠?
- 흠. 그..그래.
(전화벨 소리)
- 아, 저 제가 받겠어요.
(전화기 드는 소리)
- 여보세요?
- 나.
- 아니, 어디야?
- 나와. 기다릴께.
- 응. 알았어.
(전화기 내려 놓는 소리)
(음악)
- 어딜 갔었니.
- 바다에요.
- 말하고 가면 안되니? 아무래도 네가 역마살이 낀 모양이다.
- 후훗. 엄마 화 푸세요. 언제까지 새침하실 거에요.
- 아휴. 얘가 엄마한테.
- 이리 주세요. 제가 얹을께요.
- 아유, 참.
- 하. 됐어요. 뭐 또 할일 없어요?
- 됐다. 어휴.
- 엄마.
- 거기 물 한컵 다오.
- 하하. 네.
(물 따르는 소리)
- 어머니.
- 어?
- 아무래도 엄마 안색이 나빠요. 병원에 계셔야 겠어요.
- 괜찮아, 별로 힘든 일도 없고.
- 아니, 난 자꾸.
(문 여닫는 소리)
- 실례 합니다.
- 아니.
- 영훈씨.
- 왠일이야?
- 어휴, 안녕하세요.
- 흠. 나가자.
- 누구냐?
- 아, 아니에요. 나 잠깐. 나.. 다녀올께요.
- 아, 손님이 오셨는데, 들어오라고 하지 않고.
- 아니에요. 다음에 또 뵐께요.
- 아니야. 그래도 들어왔다 가라.
- 저, 다녀올게요.
(문 여닫는 소리)
- 아니. 쟤가?
(발소리)
- 왠일이야? 참. 사람 놀래켜 하는 여자로구나?
- 어디갔었어? 어제도 왔었어. 하~ 내가 왜이러지? 지겹게. 어디갔었어.
- 수미야. 우리 이러지 말자. 이젠 찾아오고 그러지 마.
- 흥!
- 무슨 소리야?
- 몰라? 코웃음이라는 거야.
- 돌아가!
- 그래. 돌아갈께. 안녕.
(발소리)
- 수미! 그리가면 어떻게! 위험해!
(차 지나가는 소리)
- 수미!
- 흑흑.
- 대체 왜이래!
- 놔! 가라면서. 무슨 상관이야.
(호루라기 소리)
-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차도 한 복판에서! 죽고싶어!
- 네! 죽고 싶어요!
- 뭐야? 죽기전에 유치장에 가야겠어, 아가씨.
- 죄송합니다. 아저씨. 조심하겠습니다.
- 미안해요. 아저씨.
- 돌아가시오.
(차소리)
- 이왕이면 건너가게 해주시지 않고.
- 시끄러! 어서가.
(차소리)
- 이상하지? 건너게 해줄 수도 있는 걸. 구태여 되돌아가게 한담. 어리석어.
- 따뜻한 어리석음이야. 그런 걸로 사람들이 살아가.
- 그래서. 어딜 갔었어.
- 바다에 갔어.
- 바다?
- 응.
- 혜수 언니도?
- 응.
- 뭘 얻었어.
- 포기.
- 포기?
- 응. 미움, 사랑 다 포기했어. 어울리지 않니? 나한테 그런 짓들이. 어렵게 부여잡았다가 쉽게 놔버리고. 흐흐흐. 수미야. 이제 돌아가.
- 후, 알았어. 돌아갈께.
(발소리)
- 영훈씨?
- 응.
- 술마시러 안갈테야?
- 나중에. 나중에 갈께.
(음악)
(문 여닫는 소리)
- 혜수?
- 응. 어서 와.
- 그래. 꽃 심었구나. 무슨 꽃이니?
- 지훈씨. 나 괴롭히지 마.
- 괴롭혔니?
- 물어보고, 다그치고, 비난하고. 그런 편이 좋아.
- 가끔씩 지치는 일도 있어야지. 그래. 혜수 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른이 되어가는 거지.
- 하긴, 그건 큰 일이 아니었으니까.
- 어딜 갔었어.
- 바다.
- 혼자?
- 아니.
- 그럼.
- 영훈씨.
- 뭐야?
- 영훈씨랑 갔었어.
- 이유가 뭐야.
- 이유 같은 건 없어. 무서워. 그렇게 보지 마.
- 무서워?
- 응.
- 하아, 하긴 나도 무섭다. 흐흐흐. 사랑하니 그 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알아?
- 알아. 하지만 어차피 난 갔다 왔어. 그래. 이런 얘긴 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무일도 없었어.
- 아무 일도?
- 부끄러운 일은 없었어. 하지만, 무서운 일이 있었어. 나 영훈씨 사랑해.
- 죽고 싶니?
- 몰라.
- 죽고 싶니? 흐흐. 하하하. 그래, 그런 비현실적인 단어는 집어치우자 우리.
- 지훈씨. 미안해. 난 정말.
- 화.. 화가 나는 건지, 그보단 발 밑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 제발 그런 약한 모습 보이지 마. 날 때리든지, 차갑게 돌아서 가버리든지 그래. 지훈씨.
- 아니, 다 그만 두자. 금요일이 어머니 생신이야. 와서 꽃을 꽂고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거야.
- 지훈씨.
- 대답해! 꽃을 꽂는 거야! 알았어!
- 하아.
(음악)
김보연, 유민석, 박 일, 김 민, 권희덕, 안경진, 정경애, 신성호,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이원석
인생극장 김경란 극본 거리마다 낯선 얼굴 이규상 연출
스물 두번째로 고려야구 제공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8.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