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얼굴
고려야구 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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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인가 우리가 처음 만난 밤은. 쓸쓸한 겨울 거리에 눈 송이 처럼 흩어지는 낯선 얼굴.
밀려오는 그리움이여. 지난 가을 당신은 낙엽을 태우는 불꽃이더니, 이제는 한줄기 바람되어 흘러가는가.
사랑을 그 누가 아프다 하리. 우리 마음 깊은 숲속에서 길고 긴 어두움을 흐느끼는 겨울 바람이여.』
김경란 극본 이규상 연출 스물 한번째.
(파도소리)
- 새벽은 참 추워요.
- 너무 어둡고요.
- 어머.
- 오오. 아, 조심해요.
- 하핫.
- 괜찮아요?
- 어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 자, 날 잡아요. 흠.
- 추울 수록 체온은 따뜻한 건봐요.
- 혜수 손은 참 작아요. 마치 후훗. 새를 한 마리 안은거 같아요.
- 한마리? 후훗.
- 후후후. 자, 여기에요. 다 왔어요.
- 어서 벨을 눌러요.
- 어. 여기 벨 같은거 없어요. 믿을 건 목청 뿐이죠.
(똑똑똑- 두드리는 소리)
-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인!
- 후훗.
- 주인.
- 믿을만한 목청인데요?
- 후후후.
(두드리는 소리)
- 여보세요.
- 누구세요.
- 문 좀 여십시오.
- 예, 잠깐 기다리시오. 원 꼭두새벽에.
(문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
- 누구시오?
- 방 있습니까?
- 예, 있어요. 아유, 춥소. 어서 들어오시오.
- 감사합니다. 자, 어서 들어가요.
- 네.
- 따뜻한 방 있습니까?
- 곧 따뜻해 질게요. 불을 때면.
- 그럼 어서 불을 때 주세요.
- 그러슈, 자, 이 방으로 들어가요.
(문 여는 소리)
- 네. 어서 들어가요.
- 네.
- 잠깐만 기다리슈. 뜨뜻하게 불을 땔테니.
- 네. 고맙습니다. 아저씨.
(문 여닫는 소리)
- 춥죠? 자, 이불 둘러 싸요.
- 영훈씨도 이불을 덮어요. 춥잖아요.
- 추운 줄 모르겠어요. 도대체.
- 얼음인가요? 춥지 않게.
- 후후. 변온 동물인가봐요. 들려요? 장작타는 소리.
- 그래요. 태우고 있군요. 소리만 들어도 따뜻한 거 같아요. 마치 고향에 온 것 처럼.
- 난 언제나 불을 피웠어요. 내가 한없이 초라해 질때면 불꽃이 되어 활활 타고 싶었어요.
- 하아. 난 졸음이 와요.
- 누워요. 자, 음.
- 그럴까봐요.
- 여기, 여기 있어요. 머리를 드세요. 음. 됐어요. 이제 눈 감아요.
- 후훗. 사람이란 참 덧없는 거죠? 이렇게 멀리 파도소리가 들리는 곳에 단 둘이 왔는데도 하룻밤 못 잤
다고 졸음이 쏟아져요. 내가 밉지 않아요?
- 미워 봤어요. 어디.
- 영훈씨도 자요. 등 밑이 따뜻해져 와요.
- 흠.
(음악)
- 실례합니다.
(문 여닫는 소리)
-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 어머, 아유 왠일이세요?
- 영훈씨 있어요?
- 오빠요? 글쎄 말이에요. 어젯밤에 안들어왔어요. 서울에 계신거 아니에요?
- 하하. 그런가 보죠. 가보겠어요. 실례했어요.
- 아니에요. 아유, 그보다 멀리서 오셨는데, 대체 어딜갔지?
- 돌아오겠죠 뭐. 원래 바람같은 사람 아니에요? 안녕.
- 안녕히 가세요. 그럼.
(음악)
(파도소리)
(문 여는 소리)
-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저씨.
- 예. 이제 일어났수? 흐흐흐흐. 해가 중천에 떴다오.
- 하하. 네. 그렇군요.
- 방 뜨뜻합디까?
- 하하. 네. 아저씨 늦었지만 밥 좀 주시겠어요?
- 어, 그야 물론이지.
- 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 아니, 어디 가려고?
- 네. 바다 곁으로 가고 싶어서요.
- 그럼 다녀오시오. 아직 자고 있수?
- 후후. 네.
- 흐흐흐흐.
(파도소리)
(음악)
- 여깁니다.
- 후훗. 미안해요. 제가 좀 늦었죠.
- 아닙니다.
- 서울은 이제 아무데나 길이 막혀요.
- 나오실때 까지 혜수에게서 연락 없었죠?
- 네. 얘가 어딜 갔을까요.
- 지난번에 만나서 혜수 별 말 없던가요?
- 흠. 글쎄. 까다로운 얘니까요. 결혼하자고 그랬어요?
- 네. 해야죠. 나도 이젠 사회인이고 말입니다.
- 결혼을 앞두곤 여자들은 지난 일을 정리하고 싶어해요. 그래서 그럴꺼에요.
- 그렇다면 기다려야죠.
- 혜수와 꼭 결혼 하실꺼에요?
- 네.
- 필요하세요? 혜수가.
- 사랑합니다.
(음악)
(파도소리)
- 영훈씨.
- 어.
(발소리)
- 흐흐. 일어났어요?
- 허헉. 깜짝놀랐어요. 혼자 가버린줄 알고요.
- 후후후. 애기군요. 혜수씬.
- 언제 나왔어요? 한참 됐어요?
- 네. 아기천사 같이 잠든 얼굴을 더이상 볼 수가 없어서.
- 후훗.
- 나왔어요.
- 왜요?
- 말하자면은 덮쳐버릴거 같아서.
- 하하.
- 흐흐흐.
- 큰일날 뻔 했네요. 겨울바다가 이런거에요? 마치 봄 처럼 따뜻해요. 눈이 오면 좋았을 껄.
- 아, 눈이 오면 안되죠.
- 왜?
- 한없이 슬퍼져요.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다가 휙 바닷물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 우리도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싶어질 꺼에요.
- 바다속으로? 참 파도는 자유스럽죠? 우리는 뭔가 묶여있는거 같은데.
- 묶여 있어요?
- 후후. 그런거 같아요. 자유롭고 싶어요.
- 음. 무엇이 우리를 묶을까요.
- 아직 환상, 허영, 윤리.
- 허.
- 윤리가 가장 무서워요. 난.
- 사랑만큼 무서워?
- 사랑? 그게 얼마나 허약한 건데요.
- 얼마나 집요한건데요. 사랑이.
- 후후. 모르겠어요. 영훈씨. 우리 뛰어가요. 저기 바위있는데 까지.
- 가요. 흐흐흐. 자, 뛰어요.
- 후후후.
- 하하하하하.
(뛰는 소리)
- 바람소리 들려요?
- 들려요.
- 바람처럼 빨리 달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모든거 다 잊어 버리게.
- 혜수씨.
- 왜요. 영훈씨.
- 알아요? 나. 다 팽개쳐 버리려고 했어요. 미움같은거. 그게 너무 초라해 보였어요. 20년 동안 쌓아 올
린 미움이었는데, 그리고 사랑하고 싶었어요. 사랑하려면 내가 결코 누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알
아요?
- 알아요.
- 사랑이 이길려고 해요. 미움을 말이에요. 근데, 그 사랑은 내 마음속에서 발견한 것이었어요. 내 형의
헉헉. 혜수.
- 나 안아줘요. 참을려고 그러지 말고요. 나 사랑해요. 영훈씨를 요.
- 혜수. 혜수. 혜수.. 혜수.. 혜수..
(파도소리)
- 울어요. 지금. 흠..
- 이렇게 슬플 수가 없어요. 너무나 슬퍼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에요.
(파도소리)
(음악)
(음악)
인생극장 김경란 극본 거리마다 낯선 얼굴 이규상 연출. 스물 한번째로 고려야구 제공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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