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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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 얼굴
제20화 - 혜수씨가 없어졌어요?
제20화
혜수씨가 없어졌어요?
1979.12.20 방송
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 얼굴는 1979년 12월 1일부터 1979년 12월 31일까지 제31화에 걸쳐 방송되었다.
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얼굴

고려야구 제공입니다.

『 언제인가 우리가 처음 만난 밤은. 쓸쓸한 겨울 거리에 눈 송이 처럼 흩어지는 낯선 얼굴.

밀려오는 그리움이여. 지난 가을 당신은 낙엽을 태우는 불꽃이더니, 이제는 한줄기 바람되어 흘러가는가.

사랑을 그 누가 아프다 하리. 우리 마음 깊은 숲속에서 길고 긴 어두움을 흐느끼는 겨울 바람이여.』

김경란 극본 이규상 연출 스무번째.




(바람소리)

- 영훈씨?

- 어?

(발소리)

- 아직 있었군요.

- 흠. 기다렸어요.

- 갈 줄 알았어요.

- 올 때까지 기다렸을 거에요.

- 여기 쭉 서 있었어요? 추워보여요. 어디든 들어가요. 40분이나 서 있었어요?

- 하아, 시간은 잊고 있었어요.

- 가요. 마치 동상같이 얼어 있는거 같애. 하핫.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을게요.

- 가요.

(발소리)

- 어디로 가요?

- 발차시간이 10분 남았어요.

- 발차?

- 네. 떠나요. 우리.

- 어디로.

- 바다.

- 가요.

(기차역 방송 소리 및 발소리)

- 이 차에요. 올라가요. 흠. 앉아요.

- 야간 열차는 처음이에요. 꼭 한번 타보고 싶었어요.

- 피곤할 거에요. 힘들어요.

- 아름답잖아요. 하긴 아름다운 건 언제나 조금씩 힘들어요. 어머니는?

- 괜찮으세요. 늘 상해 있는 분이시니까.

- 어머님, 뵙고 싶어요.

- 우리 어머니?

- 네. 영훈씰 보면 엄마가 뵙고 싶어요. 아름다운 분이실거 같아요.

- 하아, 그래서 힘이들게 사시나 봐요.

(기차 기적소리)

- 기차가 움직여요.

- 흠.

(기차 소리)

- 춥죠?

- 조금.

- 이거, 흠. 걸쳐요. 자, 어때요. 따뜻해요?

- 하아, 따뜻해요. 나 나쁜 여자죠?

- 후후.

- 후훗. 그런거 같아요. 늘 따뜻하고 싶어해요. 나 때문에 더 추운 사람 같은 생각 안하고요. 나쁘죠?

- 아니요.

- 나쁘고 싶어요. 하지만 결국 나쁘지 못하고 말아요. 영훈씨의 따뜻함은 받았어요. 하핫. 자요. 입으세요.

- 하아, 괜찮아요. 걸치고 있어요.

- 입어요. 못 견뎌요 나. 영훈씨 추운 걸 못 견뎌요.

- 흐음. 주세요. 흠.

- 한강을 건너는 모양이에요.

- 이 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가슴이 벅차와요.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어렸을 때 엄마랑 이 소리를 들으며

서울을 떠나와서 그런 모양이에요. 그땐 우리가 먼 어느나라로 가버리는 줄 알았어요. 자라서 이 소리같은 시

를 발견했어요.

- 어떤?

- 먼 어느나라로 가자. 나의 친구나 형제가 아무도 없는. 예를 들자면 모로코나 에티오피아 같은 곳. 될 수 있

으면은 존재하는 왕이 있고, 봄 가을이면 인육시장이 장엄히 벌어지는 그러한 나라에 가 나는 한 마리 노예가

되자.

- 그만 영훈씨. 가슴이 아파요. 우리 아픈건 그만 둬요. 봐요. 멀리 불빛이 너무 아름다워요.

- 이대로 서울을 떠나버렸으면 좋겠어요.

- 영훈씨. 이리 주세요. 후훗, 손 잡고 싶어요.

- 하아, 어떻게 지냈어요?

- 비참한 기분으로 가르치고, 꽃을 꽂고, 꽃시장을 돌아다니고 그랬어요. 어떻게 지냈어요?

- 그런거 알아요? 나 다 팽개쳐 버리려고 했어요. 내 등뒤에 꼽추에 혹처럼 붙은 그 운명이라는 거.

- 그래서 도망쳤어요?

- 도망? 하하. 그래요. 도망가려고 했어요. 미움같은게 너무 하잘것 없고, 초라해 보여서요. 20년을 쌓아 올린

미움이었는데. 그게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거 같았어요. 그런데, 아, 나 담배 좀.

- 그래요.

(종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

- 흠.

(담뱃불 부치는 소리)

- 후..

- 창 밖이 칡흑이에요. 이상하죠?

- 뭐가요?

- 얼굴이 확실하게 보여요. 창 유리로 어두운데 보이다니.

- 때로는 어두운데서야 보이는게 있어요. 별이라던가.

- 안 보이는 것도 좋아요. 저 어둠속에 눈이랑 논둑이 있고, 따뜻한 아랫목이 있고, 오손도손 잠이 드는 가족

이 있다고 생각하면.

- 흠. 왜 늦게 나왔어.

- 무서웠어요.

- 안 나오려고 했어요?

- 네. 하지만 보고 싶어서. 기다렸던 체취라도 느껴보려 했어요.

- 안 오면 내가 죽여버리려고 했어요.

- 후훗. 내가 운이 좋았구나.

- 웃지 말아요. 모르겠어요. 난 혜수씨를 죽일지도 몰라요.

- 애기 같아. 영훈씬.

- 응?

- 그만 둬요.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영훈씨에 의해서 파괴될 거라고. 파멸 될거라고?

-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어요.

- 영훈씨에 의해서라면 기꺼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 아, 우리 커피 마셔요.

- 커피 있어요?

- 저기 오잖아요.

- 음. 커피도 파는 구나.

- 하하. 그래요. 커피는 따뜻하니까.

(음악)

(문 여닫는 소리)

- 윤 선생님.

- 오오, 안녕.

- 혜수, 어디 갔어요?

- 안 나왔어. 오늘.

- 그래요?

- 집에 있나? 어디 아픈거 아냐? 나도 지금 궁금해 하던 참이야. 연락없이 안 나올 사람이 아닌데 싶어서.

- 집에 가보죠. 안녕히 계세요.

- 그래요. 안녕.

(음악)

(문 여닫는 소리)

- 어머, 왠일이세요?

- 전화 좀 써도 됩니까?

- 예. 쓰세요.

(발소리와 수화기 드는 소리 및 전화 돌리는 소리)

(전화벨 소리)

- 여보세요. 경주씨 있습니까?

- 전데요?

- 저, 서지훈 입니다.

- 어머, 지훈씨. 안녕하셨어요?

- 안녕하세요.

- 왠일이세요?

- 어, 혹시. 혜수 거기 있지 않나 해서요.

- 혜수요? 아니요. 아니, 왜요? 혜수에게 무슨 일이라도.

- 아, 아니에요. 그럼 혜수와는 요즘 연락이 없었어요?

- 전에 한번 만나긴 했어요. 한 일주일 됐나?

- 네. 알았습니다.

- 근데, 왜 그래요? 혜수가 없어졌어요?

- 없어질리야 있습니까. 집이나 직장에 없어서요. 내게도 연락이 없고.

- 하아, 그럼 얘가 어딜 갔나?

- 저, 아무튼 그 쪽으로 연락이 되거든 제게 연락 좀 주십시오.

- 저, 잠깐. 지훈씨. 한번 만나기로 해요. 우리.

- 그럴까요? 언제 시간 있습니까?

- 한 두시쯤?

- 그래요. 그럼 어디가 편하겠어요?

- 지난 번에 혜수와 함께 만났던 곳에서 만나죠. 비원 앞에.

- 좋습니다. 있다가 뵙죠. 흠.

(전화기 내려 놓는 소리)

- 아니, 무슨 일이에요?

- 아, 아닙니다.

- 혜수씨가 없어졌어요?

- 네.

- 다른 친구네 집에 있는거 아니에요?

- 그럴만한 데가 없어요.

- 흐응. 이상하군요.

- 가보겠어요.

(발소리)

- 아 참. 저 영훈씬 서울에 이제 안오는 모양이죠?

- 훗, 글쎄요.

- 그럼 지훈씨가 이긴 셈인가요?

- 이기고 지고,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단지 내가 이기고 싶었을 뿐이죠.

- 그런 생각하면 질지도 몰라요.

- 가겠습니다.

(발소리)

(문 여닫는 소리)

- 하아, 춘식씨. 나 간다.

(발소리)

- 어딜. 주말이야. 바빠 질꺼야.

- 혼자 수고 좀 해. 나 인천에 좀 가봐야 겠어.

(음악)

(음악)

인생극장 김경란 극본 거리마다 낯선 얼굴 이규상 연출

스무번째로 고려야구 제공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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