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극장 거리마다 낯선얼굴
고려야구 제공입니다.
『 언제인가 우리가 처음 만난 밤은. 쓸쓸한 겨울 거리에 눈 송이 처럼 흩어지는 낯선 얼굴.
밀려오는 그리움이여. 지난 가을 당신은 낙엽을 태우는 불꽃이더니, 이제는 한줄기 바람되어 흘러가는가.
사랑을 그 누가 아프다 하리. 우리마음 깊은 숲속에서 길고 긴 어두움을 흐느끼는 겨울 바람이여.』
김경란 극본 이규상 연출 열 네번째.
- 부탁이에요. 가만히 있어요. 네?
- 흠.
(문 여는 소리)
- 어서와, 지훈씨.
- 아니.
- 꽃을 가지러 왔어. 영훈씨가.
- 꾳?
- 응. 어머니에게 간대.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 그래?
- 아니요. 인사하러 왔어요. 인천에 갔다 오겠다고 말입니다. 어때요? 형님도 꽃 한다발 주시지 않겠어요?
- 그래야겠지. 하지만, 다음에. 오늘은 그런 기분이 아니니까.
- 네. 오늘은 그냥 갑니다. 언제 한번 얘기를 해야겠죠.
- 얼마든지. 하지만 우리집에서 하지 않게 되기를 빈다. 거기서는 다시 보지 않도록 하지.
- 거기서 얘기 하게 될 겁니다.
- 영훈씨, 어서 가세요.
- 흠.
(발소리 및 문 여닫는 소리)
- 꽃을 주었어?
- 응. 앉아. 차 한잔 끓여 줄께.
- 여기 있어야 하나?
- 응.
- 이젠 그만 둬.
- 그만 두지 않아. 난 아무것도.
(유리잔 소리)
- 아무것도?
- 응.
(물 따르는 소리)
- 난 말이야. 방심했었어. 혜수가 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어. 하기는 넌 내게
그런 상상을 불허하게 했어. 2년동안 철저히 사랑해 주었어. 날.
- 사랑?
- 그래. 넌 사랑을 지켜주었어. 난 여자 욕심이 많은 놈이었잖아?
- 후훗. 그랬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자, 들어요.
- 널 만나지 못했다면 아니, 그 때 혜수가 떠나버렸다면 난 역시 그런식으로 살았겠지?
- 참, 그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 어느 여자?
- 정림이던가?
- 잘 살고 있겠지.
- 내가 잘 못한 일인지도 몰라. 난 집요한데가 있는 여자인가봐. 하지만 그 땐, 지훈씨를 포기할 수는
없었어. 대체 왜 사랑은 그렇게 집요하고 또 왜이렇게 허약한 걸까? 지훈씨. 난 요새 지훈씨를 사랑하
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 생각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거야.
- 뭐랄까. 내가 갖지 못한 것 때문에 지훈씨에게 이끌렸다는 기분이야. 지훈씨는 힘이 있었으니까. 지
훈씨 눈초리를 받을 때마다 난 온몸이 아팠어. 그걸 힘이라고 생각했어. 지금 생각하니까 그건 낯설음
이었어. 도대체 지훈씨가 내 남자 같지가 않아.
- 그래서?
- 그만 뒀으면 좋겠어.
- 그리고. 다시 집요한 사랑속으로 빠져 들겠어?
- 뭐라고?
- 이 허약해진 사랑을 버리고 말이야. 그건 안돼. 알겠어?
- 난 내운명을 살고 싶어.
- 나 역시. 넌 나를 지웠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내가 너를 안 지웠어.
- 왜 말이 안통하지? 지훈씨와는? 어째서 내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아? 왜! 한마디도 내 말이 지훈씨에게
스며들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숨이 막혀.
- 혜수.
- 답답하단 말이야.
- 혜수. 왜 그래. 요새. 전엔 안그랬잖아.
- 가 줘. 가. 그래, 우리 엄마한테 날짜 정하고 약혼, 결혼 다 해. 혼자서 할 수 있지? 지훈씬 뭐든지 다
할 수 있잖아. 가라니까.
- 영훈인가? 영훈이야?
(음악)
- 엄마.
- 흠..
- 엄마. 영훈이에요.
- 어. 너 왔니? 영훈이 왔구나.
- 어디가 아파요?
- 괜찮다. 몸살이 왔나보다.
- 허. 어디봐요. 이마를 짚어 볼께요.
- 하아.
- 엄마. 안되겠어요. 열이 너무 높은거 같아요.
- 괜찮다니까.
- 가만 있어요. 엄마. 내 병원에 갔다 올게요. 박 선생님 모시고 올게요.
- 영훈아.
- 네.
- 이젠, 서울에 가지 말아라.
- 허어..
- 엄만 이제 지쳤다.
- 이제야 지쳤어요. 엄마?
- 그래, 네 형이 다녀갔어. 좋은 아이더라.
- 형이 엄마를 지치게 했죠.
- 아니다. 지나간 세월이. 흠. 얘 너 점심 먹었니?
- 허어. 엄마 대답해 봐요. 아버질 정말 사랑했어요?
- 영훈아. 네가 그 집에 들어간다는 건 남이 보기엔 우스운 일이야. 이해들을 못해. 아버지 조차도.
- 엄마는 요.
- 엄마는 알아. 하지만 그러지 말아라.
- 흐흑. 엄마 그만해요. 저, 다녀올게요.
(문소리)
- 아줌마, 이 꽃 어때요?
- 어. 정말 곱구나. 어디서 낫니?
- 흐흥. 오빠가 사오셨어요.
- 아, 여기다 놔 선희. 하아. 오늘 수고했어. 고마워.
- 괜찮아. 흐음. 꽃은 여기다 놓고, 아줌마 어때요? 향기가 좋죠?
- 어, 그래. 정말 곱구나. 이 겨울에.
- 오빠. 얼른 갔다 와.
- 괜찮다니까.
- 하아. 갔다 올게. 아, 너 미음 좀 끓여라.
- 응. 오빠.
(음악)
(음악)
- 수미씨 있습니까?
- 수미씨.. 왜.. 왜 그러시는데요? 손님.
- 할 얘기가 있어서요.
- 뮤직박스에 아마 있을 겁니다.
- 아, 그래요?
(발소리)
(통통통통 - 문 두드리는 소리)
- 잠깐 나오세요.
(문 여닫는 소리)
- 어, 왠일이세요?
- 하하, 술친구 좀 돼줄래요?
- 그러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 하하하. 시원시원해서 좋군요.
- 아이, 춘식씨 안주 좀 만들어.
- 그래, 자 술.
(술 병소리)
- 나도 한 잔 주세요.
- 네.
(술 잔에 술 따르는 소리)
- 무슨 일이에요? 왜 혜수언니하고 함께 오지 않았어요?
- 영훈이 어떤 놈입니까?
- 글쎄요. 후훗.
- 관심 없어요?
- 있어요.
- 어떤 점이 그래요?
- 예쁜 얼굴이에요.
- 그리고?
- 음. 순수라고 그러나요? 때가 묻지 않았어요.
- 착하다는 뜻인가요?
- 아니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지 않은 종의 사람일지도 모르죠. 제 멋대로니까요. 규격이 없다고나
그럴까. 아무튼 마음놓고 괴로움에 젖어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건 일종의 여유죠.
- 꽤 깊이 관찰 했군요.
- 흐음.
- 하아.
- 이복 동생이세요?
- 후후. 예리하군요.
- 형제끼리의 싸움은 무의미해요.
- 그 대신 역사가 길죠. 카인과 아벨부터.
- 영훈씨가 카인의 역할인가요?
- 내가 아벨이 아닌걸요. 나도 나쁜 놈이거든.
- 하하. 힘든 싸움이군요. 한쪽이 착한게 좋아요.
- 성경에선 누가 이겼죠?
- 아벨.
- 헤수는 어때요? 꽃꽃이 잘 가르킵니까?
- 풍부해요. 꽃에 대한 감각도. 가끔 꽃과 인생을 혼동하긴 하지만, 후훗. 언니의 환상을 지훈씨가 아, 아
니에요.
- 계속해 보세요.
- 이해할 수 있을까요?
- 사람을 놀라게 하는 군요. 수미씬.
- 하지만, 난 혜수언니가 지훈씨와 결혼하기를 원해요. 할꺼죠?
- 네.
- 어떻게 하실 거에요?
(음악)
(음악)
인생극장 김경란 극본 거리마다 낯선 얼굴 이규상 연출 열 네번째로 고려야구 제공이었습니다.
(입력일 : 200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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