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스타앨범 / 나의 데뷰
유쾌한 응접실 / 정계야화
노변야화 / 주간 종합뉴스
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나의 데뷰
작곡가 이봉조 편 - “건축과 나와서 시청에서 근무하다…”
작곡가 이봉조 편
“건축과 나와서 시청에서 근무하다…”
1967.06.15 방송
‘나의 데뷰’는 가수,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에서 시인, 화가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 안녕 하세요.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를 모시고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이 시간, 오늘은 우리 가요계에서 너무도 유명한 작곡가 한 분을 모셨습니다.

- 네. 이봉조 입니다.

- 아주 날씨가 더워졌어요.

- 네. 근데 뭐 밖에보다 이 동아방송 스튜디오 안에는 겨울 같애요. 저 뭐 여름에 피서들 많이 그 바캉스 붐이라고 그래서 불고 그랬는데 이 선생님의 경우는 뭐 기회가 있으셨어요? 바쁘시죠?

- 일년에 한 번쯤 놀면 다행인데 지금 현재까지도 그게 잘 안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좀 노는 기회를 만들어야죠.

- 네. 이 저 창경원의 벚꽃같은 구경은.

- 아 그거 도저히 못 해 봤습니다. 한번도.

- 네. 연주 하시느라고는 아마 가실수도 있으실 거에요.

- 그렇죠. 이제 공개방송 할 때 한번 가봤죠.

- 네. 바쁘신 생활 이니까. 아 이런 바쁘신 생활 시작 하신지 몇 년쯤 되셨을까요?

- 요새처럼 이렇게 바쁜거는 한 3년 정도 됐구요. 제가 음악을 시작 한지는 한 12년 정도 됐을 겁니다.

- 네. 맨 처음에 시작하신다는게 인제 테너 색스폰으로 연분을 맺으신거죠?

- 네. 역시 제일 처음엔 테너 색스폰을 불었지만은 그 어렸을 때 부터 저희집에 그 피아노가 한 대 있어서 피아노를 좀 치다가 그 음악의 무엇을 캐치한 모양 입니다.

- 네. 피아노를 가지고 계셨군요. 어리셨을 때 집에 피아노를 가지고 계셨어요?

- 네. 그때 뭐 우리 고향이 진주니까 진주 같은 데는 많이 없었는데 아마 아주 좋지 못한 피아노가 하나 있었어요. 뭐 심심할 때 좀 치고 하는것이 어떻게 지금까지 아주 음악으로 흘러나간 그런 동기가 될 성 싶습니다.

- 네. 가족분들 중에 누구 음악하신 분이 계셨던 모양이죠?

- 저희 가족 그 친척은 상당히 많습니다. 근데 이 음악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 근데 어떻게 피아노가 있었나요?

- 그러니까 어떻게 그 집에 여하간에 한 대 있었어요.

- 그러면은 레슨 같은거를 받지 않으시고 처음에는 그냥 집에 있으니까 이렇게...

- 그렇지요. 뭐 아마추어 로서요. 도가 여기다 레가 여기다 그거 모르고 그냥 아 이정도 소리나면 이렇다 그런 정도에 쳤죠.

- 네. 작곡 같은건 뭐 물론 그 때는 생각 안하셨나 보죠?

- 그럼요. 그땐 뭐 고등학교 다닐 때는 작곡은 생각 안했죠.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앞으로 이 음악을 꼭 해서 성공 해보겠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 네. 어떡하다가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그랬는데 아마 그게 제일 큰 계기가 됐던 모양이네요.

- 그리고 제가 이 중학교도 들어갈 때 음악은 전혀 생각도 안했구요.

- 그럼 다른 과...

- 네. 저는 한양공대 건축과 나왔습니다.

- 네.

- 네. 그래서 공대 건축과 나와서 또 시청에 한 2년 근무 했습니다.

- 네. 그 계통의 일이요?

- 아니죠. 건축과 계통 이지요.

- 네.

- 그 뭐 별 좋은 성적은 못 얻었지만은 일단 근무는 했는데 그 때 당시 지금 그 시민회관요.

- 네.

- 그게 그 때 당시 운함회관으로 건립 됐죠.

- 네.

- 그리고 지금 새로 된 야구장 이요.

- 네.

- 제가 그 종종 나가서 공사 감독도 한 일도 있어요.

- 네.

- 아마 지금쯤 그 길로 쭉 나갔다면 지금 상당히 그 건축 기술자로서 좀 활약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 권위 있는. `떠날 때는 말 없이` 선생님 작곡 하시고 연주한 곡이죠? 연주 맡아 보셨고, 현미 씨가 불렀구요.

- 네. 그런데 이 지금 노래도 있었지만은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한 번 소개해 드리고 싶은건 저희 그 악단의 연줍니다.

- 네. 그럼 들어보기로 하죠.

♬ 떠날 때는 말 없이

- 네. 아주 웅장한 연주인거 같은데요. 근래에 녹음하신 겁니까?

- 제가 한 6개월 전 쯤 했습니다.

- 네. 아 여러명으로 구성 돼있는거 같애요.

- 네. 한 20명 정도 되죠.

- 네. 그럼 많은 숫자죠? 이 경음악단은.

- 네. 이 저 재즈밴드로써는 아마 그 편성이 제일 클 겁니다.

- 네. 이봉주 씨 자신의 테너 색스폰 연주가 지금 곁들여 있는거죠.

- 네. 중간에 약간 나오죠.

- 네. `떠날 때는 말 없이` 들어 봤습니다. 그 건축기사의 꿈이 거의 이루어 졌던 꿈이 인제 작곡가로 바뀌어진 애기 들어보고 싶은데요. 그 당시 샐러리 맨으로 근무를 하시다가 어떻게 어떤 계기로 바뀌어 지셨는지요.

- 그 제가 인제 음악을 학교 졸업 맞고 그만두고 건축만 할려고 시청에 들어갔죠. 그래서 근무를 매일 하는 도중에 12시 부터 1시 까지는 직장 음악 시간이에요.

- 네.

- 그러면 우리가 오전중에 근무를 하다가 12시 되면 음악이 각 과에 다 나오게 되었습니다. 스피커를 통해서. 그런 도중에 그 제가 과거에 좀 불었던 색스폰 소리가 종종 나와요. 그럴 때 인제 마음이 건축도 건축이지만은 야 이거 어떻게 좀 다시 한번 더 해볼 수 없느냐 해서 한 2년 안 하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 네. 근무 하시던 시청에 다시 그 연주하기 위해서 가거나 공개방송 그런 경우는 없으셨어요?

- 한 번 갈라고 애를 썼는데 제가 인제 이 이달 내로 꼭 한번 가야 되겠어요.

- 네. 시청 분들이 아마 들으셨으면 기다리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은 인제 색스폰을 맨 처음에 대중 앞에서 연주 하셨던 데가 언제로 기억을 하세요?

- 제가 그 대학교 1학년 땐데요. 저희 학교 신입생 대환영회 때가 있었어요.

- 네.

- 뚝섬에서 했는데 제가 그 많은 학생들 앞에서 처음으로 불어 봤어요.

- 네. 틀리지 않고.

- 그 때는 뭐 형편없는 기술 이지만은 그래도 참 좋아 했습니다. 그 학생들이. 그리고 그 후에 제가 8군에 인제 들어가서 제가 상당히 나이는 스물 세살 때죠. 처음으로 제 악단을 조직을 했습니다.

- 네.

- 해서 8군 지금 28군단의 임원단으로 각 지구를 순회 했죠.

- 네.

- 그리고 한 4~5년 있다가 인제 일반으로 나왔습니다.

- 네.

- 나오고 난 후에 그 처음으로 제가 편곡을 했죠. `밤안개` 라는거.

- 네. 편곡으로 시작이 된거죠?

- 네. 그러자 인제 그게 어떻게 사람들이 저를 좀 잘 봐서 그런지요. 그게 어떻게 밤안개 하고 많이 그 유행이 좀 됐어요.

- 네. 현미 씨와 함께.

- 그렇겠죠.

- 네.

- 그리고 인제 그 다음에 영화가 나오는데 인제 `아빠 안녕` 이라든지 또 `맨발의 청춘` 이라든지 `보고싶은 얼굴` 이라든지 이런 영화 음악을 조금 했습니다.

- 네. 그게 그러니까 선생님 작곡으로 되신 건가요?

- 그렇죠. 제 작곡이죠.

- 네.

- 그리고 그게 어떻게 또 흥행이 또 괜찮았어요. 그러는동안에 이제 제가 또 악단은 역시 제가 쭉 가지고 있었으니까 또 극장 같은데도 하고 뭐 이 우리 악단 계통이나 가요 계통은 사람들 눈에 많이 띄고요 그러면 자동적으로 그럭저럭 되는 겁니다.

- 말씀 들으면 쉬운거 같지만 아마 사실이 그렇지 않을 거에요. 선생님 말씀대로면은 쉽게 유명하게 될 수 있는거 같은데요. 사실 뭐 그렇지 못한게 아니에요.

- 그 뭐 꼭 유명하게 될 필요가 없죠. 그 유명한 사람은 유명한 사람대로의 고민이 굉장히 큽니다. 전 뭐 아직까지 유명한 사람 축에 들어가진 않지만은

- 네.

-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 `맨발의 청춘` 이라는거는 그 후죠. 작곡 여러개 하신.

- 그래도 `맨발의 청춘` 도 시초죠.

- 아 `아빠 안녕` 그 땐 가요?

- 네.

- 네. 최희준 씨의 노래였죠?

- 네.

- 네. 들어 보겠습니다.



- 유명한 사람이 돼서 고민이 많다고 그러셨는데요. 한 가지만 좀 들어 볼까요? 어떤 고민을 가지고 계신가

- 저는 별로 고민이 없어요. 유명한 사람 얘기 들으니까 그런 고민이 있어요. 근데 예를 들어서 한 가지 이런거는 있더군요. 제가 그 일본에 갔을 때 그 호텔 안에서나 밖에나 제가 가령 뭐 아주 옷을 험악하게 입었다든지 구두를 안 신고 그냥 거리를 걸어 다녔다든지 이럴 때는 일본에서는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쳐다 봐주는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은 이제 한국에 들어와서 내가 목걸이에 내가 만약 그냥 이상한 걸 건 사람들이 많이 쳐다 볼거에요. 그러니까 그런데서 조금 이제...

- 좀 불편하실...

- 고민 보다도 불편도 아니지만은 뭐 그렇죠.

- 우리같은 사람들은 잘 어떻게 보면은 납득이 안 가는 얘기기도 하죠.

- 네.

- 그리고 저 빌리본 악단 요 전에 연주 할 때요.

- 네.

- 이 선생님 지휘 하시던데 어떻게 된 거에요?

- 네. 아 그거는 그 때 당시 `하숙생` 하고 `떠날 때는 말 없이` 를 미리 그 악보를 편곡을 해서 저희들이 일본에 보내 줬습니다. 그런데 역시 한국에 와서 연주할 때 그 양반이 지휘하고 그냥 그렇게만 알고 저희들은 그냥 구경만 갔는데 그 자리에서 아마 빌리본이 각국 나라 순회하는 도중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제일 인상 깊고 제일 그 관중들의 도가 높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기분이 대단히 좋아서 자기 악단이지만은 그런 역사는 없지만은 한국 사람이 올라와서 직접 한 번 지휘를 해달라 하는 그 자리에서 직접 얘길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도 깜짝 놀라서 올라갔지만은 좀 떨리긴 했지만 또 좋았구요.

- 네.

- 전 또 앞으로 그런 기회는 좀처럼 없을상 싶습니다.

- 네. 갖기 갖으시기 힘든 영광을 그날 누리신 셈이 되겠어요. 그쵸?

- 네. 네.

- 앞으로 작곡 인제 작곡 계통으로 활약을 해 주실거죠? 연주도 물론 쭉 하실거구요.

- 네. 양쪽 다 해야죠. 역시.

- 여러가지 좋은 작품 많이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 네. 노력 하겠습니다.


- 코티 벌꿀비누 분포, 동산유지 제공 나의 데뷰. 오늘은 가요계에서 너무도 유명한 작곡가 이봉조 씨를 모시고 얘기와 음악을 들어 봤습니다.

(입력일 : 2007.09.13)
프로그램 리스트보기

(주)동아닷컴의 모든 콘텐츠를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등에서 무단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by donga.com. email : newsro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