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뷰’는 가수,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에서 시인, 화가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안녕하십니까?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이 시간 오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가수 한 분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패티 김 입니다. -네. 아주 알맞게 곱게 그을리신 패티 김을 오늘 모셨습니다.
어떻게 얼굴이 검어지신거 같아요. 조금 검어졌죠. 아무래도 더운 지방을 여러나라 다니다 보니까 좀 많이 그을렀어요.
-월남 때문에 아마 그런가보죠? 네.
-신혼여행 겸해서 떠나신 일거리들이 많아서 아마 오히려 바쁘시고 그러셨을것 같아요. 아.. 뭐, 바쁠때는 바쁘죠. 그런데 저희는 역시 음악을 사랑하고 또 음악없이 살면은 아마 재미가 없을거예요. 하니까 허니문이었어두요 노래하고 또 연주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제일 즐거웠었어요.
-네. 네. 지금은 저희라고 길옥균씨 하고 패티 김 하고 두 분을 말씀하셨지만 오늘 들어볼 얘기는 두 분이 만나시기 이전에 패티 김의 얘기를 듣기 위해서 모셔봤습니다. 패티 김 이라는 이름이 붙으신지가 몇년이나 되셨어요? 음.. 패티 김 붙은 이름이요 한 7년 됬어요 지금 . -노래 부르시기 시작하구서 이제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구서 한 일년 후에 제가 이름을 땄어요.
-네. 그 이름은 어떻게 연유가 된거예요? 이름이.. 이제 제가 59년에 노래 시작을 했어요. 59년 3월 부터. 그 때는 미8군 식으로 시작을 했는데요. 제 본명이 김혜자예요. 은혜 혜자 아들 자자 인데요. 그런데 아무래도 미군을 상대로해서 그 때는 쇼 그룹이 많았죠. 김혜자하면 자꾸 외우는데 힘들어해요. 그리고 그 때만해도 어려서 그랬겠지만요 그 미국이름이 참 부럽고 참 듣기가 좋았던거 같고 또 그 시절에 제가 패티 페이지를 참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 분이 그 때 한참 인기였었죠? 한 7,8년 전에. 그러니까 뭐 어떤분들은 패티 페이지하고 좀 비슷하다고도 하고 아마 거기서 온 동기일거예요. 내가 이름을 지은 이유가.
-그러니까 손수 지으신거군요. 그렇죠. 제가 패티를 땄죠.
-네. -인제 8년 노래하셨으면은 어떻게 긴.. 그렇게 뭐 과히 길지는 않다고 하시겠죠? 길지는 않아도 짧은 시간도 아니죠?
-금방 간것 같겠어요. 8년. 8년. 글쎄 어떻게 생각하면 참 길었던 8년 이구요. 또 어떻게 한 편 생각하면 참 짧은 8년 이었고 그래요.
-외국에 많이 다니시고 그랬으니까 아마 제 생각에는 금방 갔으리라 이런 생각 같아요. 네. 참 시간이 빨리 갔어요.
-어렸을 때 패티 김 그러니까 김혜자씨는 노래 물론 잘하셨겠죠? 어려서 네.. 저 학교다닐 때 뭐 독창 뭐 합창회 말고 그 학예회라고 했죠. 그랬을 때 뭐 독창 같은거 뽑히고 그랬어요. 합창단에도 항상 들고.
-근데 지금은 약간의 그 허스키라고 하나요? 아주 가늘구 낭랑한 음성은 아니신거 아니예요? 네. 그것이 없어졌죠 저한테서.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안 그러셨군요. 어렸을 때는 안그랬어요. 제가 데뷰 당시만해도 참 목소리가 고왔죠. 하고 고음을 올라갈 수 있었구요.
-지금도 뭐 고음까지 올라가신다는걸 제가 음악가에서... 올라가지만 옛날 보다는 좀 얕아졌죠. 그 대신 아래로 내려가고 폭이 좀 넓어진 셈이예요.
-네. 음성을 많이 쓰면은 아마 달라지는 모양인데요. 그리고 음식하구요 일기하고 아마 외국에 오래살면 조금 바뀌는 것 같아요.
-아, 섭취하는 그 음식물에 따라서... 그런 것 같아요. 네.
-어렸을 때 부터 그럼 가수가 되야겠다 그런 생각 하셨어요? 그런 생각은 저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가수가 된다는건 뭐 상상도 안했던 일이구요. 어려서 소학교 졸업할 때 까지도 나는 교원을 참 동경하고 있었어요. 교원 되는 것을.
-여선생. 네. 여선생님. 그렇게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내가. 그래서 나도 이다음에 크면 꼭 선생이 되야지 했는데. 교원이 되야지 했는데. 이제 중학교를 들어가서는 운동을 좀 했어요 수영을. 그러니까 또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고. 뭐 이렇다한 목적이 없었어요. 그래가지구 이제 고등엘 올라가서는 음... 저기 운동선수가 됐으면 했죠.
-네. 그랬는데 결국 이제 가수가 되신거죠? 네.
-사랑의 세레나데 라는게 패티 김이 부르셨던거죠? 요즘 많이 들어보는 곡인데요. 오늘 첫 번째로 준비했습니다.
♪ 사랑의 세레나데(패티 김) ♪
-데뷰라는게 인제 뭐 여러가지 일반 무대의 경우도 있겠고 뭐 레코드도 있고 한데 패티 김의 경우 8군하고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요? 8군하구요. 제가 이제 대학을 가야할 땐데 참 공부하기가 싫었어요.
-수영만 좋아하시고. 네. 공부하기가 참 싫었어요. 그래서 그때 막 갈팡질팡 했어요. 집에선 자꾸 대학가라 그러고. 나는 이제 그 때 주의가 대학가서 괜히 뭐 전공할 목적 딱 하나도 없는데 괜히 그렇게 서성서성하느니 어디 직업을 얻어가지고 직장을 갖겠다... 인제 그런 맘이었는데 우연히 이제 저희 오빠 친구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기타를 치시는 분이예요 옛날에. 그래가지구 나를 만나드니 옛날에 혜자가 노래를 잘했는데 노래하지 않겠느냐 그래요. 그러니까 난 뭐 귀가 번쩍했죠. 그래서 김용순씨라고 그 때 미8군쇼 삼양이었었어요 그 때는 그 때 김용순씨가 베니스쇼라는걸 가지고 계셨는데 그 분한테 소개를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제일 처음에 미국노래 재산이 ‘you don’t know me’ 따라라라라라 띠라라라라라 이거하고 ‘memories~..’ 이거요. 이거 두 곡 이예요. 그래서 그것을...
-학교 시절 부터 그건 아주 뭐 거의 완숙하게 하셨군요. 네. 그렇죠. 많이 했어요. 그랬더니 그것을 들어보시더니 참 좋아하시더군요. 그렇다고 잘하면 잘하면 괜찮을 것 같데요. 그래서 그 노래 자꾸자꾸 연습하고 해가지고 그 노래 두 곡으로 시작을 한 셈이예요 결국은. 그래가지고 앵콜이 나오면 도로 또 그 곡을 했어요. 노래가 재산이 없어서. 그런 일이 있고 그래요.
-역시 가수가 된 후에는 이제 레파토리도 많이 가지고 있어야 될거예요. 앵콜같은 그런 경우에는. 그러니가 이제 8군에서 맨 첫 무대가 어떻게 공연이 저녁이었겠군요 그럼. 그렇죠 저녁이죠. 맨 처음에는 뭐 그냥 신입생이니깐요 한 일주일을 따라다녔어요. 가서 보고 구경하고. 그러다가 이제 노래를 시작했는데. 내가 제일 먼저 관중앞에 선 것이요 물론 미군이었지만은 저 오산에 있는 클럽이었어요. 그랬는데 인제 옷을 그 때 아주 화려한 그린컬러로 해줬어요 나를.
-누가요? 그러니까 그 쇼에서.
-네. 그 때 뭐 물론 좀 기지도 좀 싸고 그렇지만 색깔이 조금 무뎠으면 참 좋아보였어요. 그런데 그 때는 학교에서 금방 졸업했고 그러니깐 뭐 그냥 아주 살도 통통하고 그랬어요. 미군들이 막 휘파람 불어요 나가니까. 그래가지구 얼어서요 전주를 자꾸 하는데 나가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이 발하나 띠는것이 한 일분에 한번씩 띠다시피 해가시구 막 사람들이 웃고 그런일이 있는데. 참 그 때.. 그 때 내가 맨 처음에 노래 할때는요 무대에 서서 이 두 팔이 없었으면 하는것이 제일 소원이었어요.
-무대에서는 그게 어렵다구요. 네. 이 팔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요. 이거 뭐 한번 올리면 내리지를 못해요 내가. 이걸 어떻게 내리나 노래하면서 그 생각 뿐이고, 한번 또 내렸으면 올려야 되는거 어떻게 올려야 되나 하고 말이죠. 그래서 이 팔좀 없었으면 내가 가만히 서서 노래하기 제일 좋겠다 그랬어요.
-옛날에 패티 김의 얘기죠. 8년 전에. 그렇죠. 네.
-태양이 뜨거울 때. 한 곡 또 들어보겠습니다.
♪ 태양이 뜨거울 때 - 패티 김 ♪
-미국으로 가시기전에 그러니까 8군 그 쇼에만 출연하시고 일반 스테이지는 서시지 않고 가셨어요? 아니... 일반 그러니까 미국 가기 전에 섰죠 여러번. 그랬는데 제가 제일 먼저 일반 무대에 선 것이 60년에 제가 일본엘 갔어요. 그래서 61년 5월인가 그 때 돌아와가지고 그 때 처음으로 인제 한국 무대에 섰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내가 일본에서 교포인줄 알구요 무대 뒤에 오면 한국말 할 줄 아느냐고 그런 일도 있고 그랬어요. 그 때가 그니까 61년이죠.
-네. 스테이지도 인제 그 외국사람 8군 군인들 앞에 서보셨고 또 우리나라 일반 스테이지에 서보셨고 또 인제 미국에 가서 또 첫 번째 스테이지가 있었을거 아니예요? 미국가서는 금방 서시지 않으셨겠죠? 금방했죠. 이제 가서 뭐 2주일 여유 있었어요. 그래가지구 맨 처음에 간 곳이 물론 라스베가스 였구요. 거기서 참 오래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처음으로 저는 가수되고 된 후에는 리코딩 가수가 되는 것이 참 그러니까 드림이라고나 할까요? 그 다음에 이제 뮤지컬 브로드웨이 쇼의 스타가 되는것이 내 제일 큰 꿈이고 아직까지도 그래요.
-네. 그럼 살짝이 옵서예 그것이 제 1단계가 아닐까요? 그렇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물론 했구요 미국에서 한 6개월 반동안 했어요. 뮤지컬 쇼.
-아, 미국에서두요? 네. ‘플라워 드럼 송’이라고 영화 에도 했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그것이 한 4년인가 했죠 그 쇼가.
-네. 첫 번째 무대에는 뮤지컬이 아니셨겠죠? 첫 번에는 그냥 스테이지 였구요. 거기서 한 6개월 하다가 픽업 되가지고 뮤지컬 쇼에 이제 출연했죠.
-네. 첫번째 그 미국에서 불렀던 그 곡을 기억하세요 지금? 맨 처음에 부른 곡이 내가 우리 한국에서 61년에 처음으로 한국 무대에 설 때 ‘썸머타임, 바드레틸, 스타..’ 이런거 불렀거든요. 그거 가지고 갔죠.
-네. 네. 그러고 그 외에 이제 조금 째즈 째지 한거요 ‘베이신스 스트릿 블루스’ 같은거 뭐 그런것도 불렀고.
-네. 미국에서 뮤지컬 여러곳에 출연하시고 우리나라에 와서 처음에 살짝 ..가 되겠죠? 그렇죠.
-앞으로도 또 욕심나는거 많으시겠네요. 앞으로 욕심 이라는 것은 뭐 좀 더 노력해서 공부해야 겠구요. 또 자꾸 해외 나와서 좀 듣고 봐야 겠구요. 또 언젠가는 브로드웨이에 한번 서는 것이 제일 큰 꿈이예요.
-네. 자꾸만 나가시지만 말고 오셔서 우리에게 좋은 노래도 좀 많이 들려주십시오. 그야 물론이죠. 이번에 우리가 귀국해가지고는요 아 앞으로 한국에서도 좀 잔잔하게 집도 마련해가지고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