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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 편 - 패티 김이 된 사연, 미8군에서 노래 하던 시절
패티김 편
패티 김이 된 사연, 미8군에서 노래 하던 시절
1967.06.09 방송
‘나의 데뷰’는 가수,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에서 시인, 화가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안녕하십니까?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이 시간 오늘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가수 한 분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패티 김 입니다.
-네. 아주 알맞게 곱게 그을리신 패티 김을 오늘 모셨습니다.

어떻게 얼굴이 검어지신거 같아요.
조금 검어졌죠. 아무래도 더운 지방을 여러나라 다니다 보니까 좀 많이 그을렀어요.

-월남 때문에 아마 그런가보죠?
네.

-신혼여행 겸해서 떠나신 일거리들이 많아서 아마 오히려 바쁘시고 그러셨을것 같아요.
아.. 뭐, 바쁠때는 바쁘죠. 그런데 저희는 역시 음악을 사랑하고 또 음악없이 살면은 아마 재미가 없을거예요. 하니까 허니문이었어두요 노래하고 또 연주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제일 즐거웠었어요.

-네. 네. 지금은 저희라고 길옥균씨 하고 패티 김 하고 두 분을 말씀하셨지만 오늘 들어볼 얘기는 두 분이 만나시기 이전에 패티 김의 얘기를 듣기 위해서 모셔봤습니다. 패티 김 이라는 이름이 붙으신지가 몇년이나 되셨어요?
음.. 패티 김 붙은 이름이요 한 7년 됬어요 지금
.
-노래 부르시기 시작하구서 이제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구서 한 일년 후에 제가 이름을 땄어요.

-네. 그 이름은 어떻게 연유가 된거예요?
이름이.. 이제 제가 59년에 노래 시작을 했어요. 59년 3월 부터. 그 때는 미8군 식으로 시작을 했는데요. 제 본명이 김혜자예요. 은혜 혜자 아들 자자 인데요. 그런데 아무래도 미군을 상대로해서 그 때는 쇼 그룹이 많았죠. 김혜자하면 자꾸 외우는데 힘들어해요. 그리고 그 때만해도 어려서 그랬겠지만요 그 미국이름이 참 부럽고 참 듣기가 좋았던거 같고 또 그 시절에 제가 패티 페이지를 참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 분이 그 때 한참 인기였었죠? 한 7,8년 전에. 그러니까 뭐 어떤분들은 패티 페이지하고 좀 비슷하다고도 하고 아마 거기서 온 동기일거예요. 내가 이름을 지은 이유가.

-그러니까 손수 지으신거군요.
그렇죠. 제가 패티를 땄죠.

-네.
-인제 8년 노래하셨으면은 어떻게 긴.. 그렇게 뭐 과히 길지는 않다고 하시겠죠?
길지는 않아도 짧은 시간도 아니죠?

-금방 간것 같겠어요. 8년.
8년. 글쎄 어떻게 생각하면 참 길었던 8년 이구요. 또 어떻게 한 편 생각하면 참 짧은 8년 이었고 그래요.

-외국에 많이 다니시고 그랬으니까 아마 제 생각에는 금방 갔으리라 이런 생각 같아요.
네. 참 시간이 빨리 갔어요.

-어렸을 때 패티 김 그러니까 김혜자씨는 노래 물론 잘하셨겠죠?
어려서 네.. 저 학교다닐 때 뭐 독창 뭐 합창회 말고 그 학예회라고 했죠. 그랬을 때 뭐 독창 같은거 뽑히고 그랬어요. 합창단에도 항상 들고.

-근데 지금은 약간의 그 허스키라고 하나요? 아주 가늘구 낭랑한 음성은 아니신거 아니예요?
네. 그것이 없어졌죠 저한테서.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안 그러셨군요.
어렸을 때는 안그랬어요. 제가 데뷰 당시만해도 참 목소리가 고왔죠. 하고 고음을 올라갈 수 있었구요.

-지금도 뭐 고음까지 올라가신다는걸 제가 음악가에서...
올라가지만 옛날 보다는 좀 얕아졌죠. 그 대신 아래로 내려가고 폭이 좀 넓어진 셈이예요.

-네. 음성을 많이 쓰면은 아마 달라지는 모양인데요.
그리고 음식하구요 일기하고 아마 외국에 오래살면 조금 바뀌는 것 같아요.

-아, 섭취하는 그 음식물에 따라서...
그런 것 같아요. 네.

-어렸을 때 부터 그럼 가수가 되야겠다 그런 생각 하셨어요?
그런 생각은 저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가수가 된다는건 뭐 상상도 안했던 일이구요. 어려서 소학교 졸업할 때 까지도 나는 교원을 참 동경하고 있었어요. 교원 되는 것을.

-여선생.
네. 여선생님. 그렇게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내가. 그래서 나도 이다음에 크면 꼭 선생이 되야지 했는데. 교원이 되야지 했는데. 이제 중학교를 들어가서는 운동을 좀 했어요 수영을. 그러니까 또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고. 뭐 이렇다한 목적이 없었어요. 그래가지구 이제 고등엘 올라가서는 음... 저기 운동선수가 됐으면 했죠.

-네. 그랬는데 결국 이제 가수가 되신거죠?
네.

-사랑의 세레나데 라는게 패티 김이 부르셨던거죠? 요즘 많이 들어보는 곡인데요. 오늘 첫 번째로 준비했습니다.

♪ 사랑의 세레나데(패티 김) ♪

-데뷰라는게 인제 뭐 여러가지 일반 무대의 경우도 있겠고 뭐 레코드도 있고 한데 패티 김의 경우 8군하고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요?
8군하구요. 제가 이제 대학을 가야할 땐데 참 공부하기가 싫었어요.

-수영만 좋아하시고.
네. 공부하기가 참 싫었어요. 그래서 그때 막 갈팡질팡 했어요. 집에선 자꾸 대학가라 그러고. 나는 이제 그 때 주의가 대학가서 괜히 뭐 전공할 목적 딱 하나도 없는데 괜히 그렇게 서성서성하느니 어디 직업을 얻어가지고 직장을 갖겠다... 인제 그런 맘이었는데 우연히 이제 저희 오빠 친구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기타를 치시는 분이예요 옛날에. 그래가지구 나를 만나드니 옛날에 혜자가 노래를 잘했는데 노래하지 않겠느냐 그래요. 그러니까 난 뭐 귀가 번쩍했죠. 그래서 김용순씨라고 그 때 미8군쇼 삼양이었었어요 그 때는 그 때 김용순씨가 베니스쇼라는걸 가지고 계셨는데 그 분한테 소개를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제일 처음에 미국노래 재산이 ‘you don’t know me’ 따라라라라라 띠라라라라라 이거하고 ‘memories~..’ 이거요. 이거 두 곡 이예요. 그래서 그것을...

-학교 시절 부터 그건 아주 뭐 거의 완숙하게 하셨군요.
네. 그렇죠. 많이 했어요. 그랬더니 그것을 들어보시더니 참 좋아하시더군요. 그렇다고 잘하면 잘하면 괜찮을 것 같데요. 그래서 그 노래 자꾸자꾸 연습하고 해가지고 그 노래 두 곡으로 시작을 한 셈이예요 결국은. 그래가지고 앵콜이 나오면 도로 또 그 곡을 했어요. 노래가 재산이 없어서. 그런 일이 있고 그래요.

-역시 가수가 된 후에는 이제 레파토리도 많이 가지고 있어야 될거예요. 앵콜같은 그런 경우에는. 그러니가 이제 8군에서 맨 첫 무대가 어떻게 공연이 저녁이었겠군요 그럼.
그렇죠 저녁이죠. 맨 처음에는 뭐 그냥 신입생이니깐요 한 일주일을 따라다녔어요. 가서 보고 구경하고. 그러다가 이제 노래를 시작했는데. 내가 제일 먼저 관중앞에 선 것이요 물론 미군이었지만은 저 오산에 있는 클럽이었어요. 그랬는데 인제 옷을 그 때 아주 화려한 그린컬러로 해줬어요 나를.

-누가요?
그러니까 그 쇼에서.

-네.
그 때 뭐 물론 좀 기지도 좀 싸고 그렇지만 색깔이 조금 무뎠으면 참 좋아보였어요. 그런데 그 때는 학교에서 금방 졸업했고 그러니깐 뭐 그냥 아주 살도 통통하고 그랬어요. 미군들이 막 휘파람 불어요 나가니까. 그래가지구 얼어서요 전주를 자꾸 하는데 나가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이 발하나 띠는것이 한 일분에 한번씩 띠다시피 해가시구 막 사람들이 웃고 그런일이 있는데. 참 그 때.. 그 때 내가 맨 처음에 노래 할때는요 무대에 서서 이 두 팔이 없었으면 하는것이 제일 소원이었어요.

-무대에서는 그게 어렵다구요.
네. 이 팔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요. 이거 뭐 한번 올리면 내리지를 못해요 내가. 이걸 어떻게 내리나 노래하면서 그 생각 뿐이고, 한번 또 내렸으면 올려야 되는거 어떻게 올려야 되나 하고 말이죠. 그래서 이 팔좀 없었으면 내가 가만히 서서 노래하기 제일 좋겠다 그랬어요.

-옛날에 패티 김의 얘기죠. 8년 전에.
그렇죠. 네.

-태양이 뜨거울 때. 한 곡 또 들어보겠습니다.

♪ 태양이 뜨거울 때 - 패티 김 ♪

-미국으로 가시기전에 그러니까 8군 그 쇼에만 출연하시고 일반 스테이지는 서시지 않고 가셨어요?
아니... 일반 그러니까 미국 가기 전에 섰죠 여러번. 그랬는데 제가 제일 먼저 일반 무대에 선 것이 60년에 제가 일본엘 갔어요. 그래서 61년 5월인가 그 때 돌아와가지고 그 때 처음으로 인제 한국 무대에 섰어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내가 일본에서 교포인줄 알구요 무대 뒤에 오면 한국말 할 줄 아느냐고 그런 일도 있고 그랬어요. 그 때가 그니까 61년이죠.

-네. 스테이지도 인제 그 외국사람 8군 군인들 앞에 서보셨고 또 우리나라 일반 스테이지에 서보셨고 또 인제 미국에 가서 또 첫 번째 스테이지가 있었을거 아니예요? 미국가서는 금방 서시지 않으셨겠죠?
금방했죠. 이제 가서 뭐 2주일 여유 있었어요. 그래가지구 맨 처음에 간 곳이 물론 라스베가스 였구요. 거기서 참 오래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처음으로 저는 가수되고 된 후에는 리코딩 가수가 되는 것이 참 그러니까 드림이라고나 할까요? 그 다음에 이제 뮤지컬 브로드웨이 쇼의 스타가 되는것이 내 제일 큰 꿈이고 아직까지도 그래요.

-네. 그럼 살짝이 옵서예 그것이 제 1단계가 아닐까요?
그렇죠.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물론 했구요 미국에서 한 6개월 반동안 했어요. 뮤지컬 쇼.

-아, 미국에서두요?
네. ‘플라워 드럼 송’이라고 영화 에도 했고.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그것이 한 4년인가 했죠 그 쇼가.

-네. 첫 번째 무대에는 뮤지컬이 아니셨겠죠?
첫 번에는 그냥 스테이지 였구요. 거기서 한 6개월 하다가 픽업 되가지고 뮤지컬 쇼에 이제 출연했죠.

-네. 첫번째 그 미국에서 불렀던 그 곡을 기억하세요 지금?
맨 처음에 부른 곡이 내가 우리 한국에서 61년에 처음으로 한국 무대에 설 때 ‘썸머타임, 바드레틸, 스타..’ 이런거 불렀거든요. 그거 가지고 갔죠.

-네.
네. 그러고 그 외에 이제 조금 째즈 째지 한거요 ‘베이신스 스트릿 블루스’ 같은거 뭐 그런것도 불렀고.

-네. 미국에서 뮤지컬 여러곳에 출연하시고 우리나라에 와서 처음에 살짝 ..가 되겠죠?
그렇죠.

-앞으로도 또 욕심나는거 많으시겠네요.
앞으로 욕심 이라는 것은 뭐 좀 더 노력해서 공부해야 겠구요. 또 자꾸 해외 나와서 좀 듣고 봐야 겠구요. 또 언젠가는 브로드웨이에 한번 서는 것이 제일 큰 꿈이예요.

-네. 자꾸만 나가시지만 말고 오셔서 우리에게 좋은 노래도 좀 많이 들려주십시오.
그야 물론이죠. 이번에 우리가 귀국해가지고는요 아 앞으로 한국에서도 좀 잔잔하게 집도 마련해가지고 살고 싶어요.

-네. 행복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입력일 : 2007.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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