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뷰’는 가수,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에서 시인, 화가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안녕하세요.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이 시간. 오늘은 즐거운 주말의 한 때를 위해서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시는 인기 가수 한 분을 모셨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최희준입니다.
최희준이가 뭐하는 사람인가 이렇게 물을 분은 아마 한 분도 안 계실것 같애요. 누구든지 유명해 지고 싶어하고 그러는데 유명해 지신 분의 입장으로는 또 변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떠십니까? 유명하신 최희준씨는요.
- 글쎄요. 어떤 사람들은요. 그 소위 저희들 세계에서 그것을 가지고 인기세라고 그러는데요 그걸 가지고 상당히 불편하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근데 제 경우에는 불편하다기보다는 편리한 점이 참 많습니다. 여러가지로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면 됐지 해는 되지 않습니다.
편리한 점 한가지만 들어볼까요?
- 네. 우선 호주머니에 돈이 없다. 배는 몹시 고프다. 어디가서 뭘 먹어야 될텐데. 어떻하느냐 이럴 경우에 들어가서 먹고 아 이거 미안합니다. 마침 돈이 없습니다. 상대방에서 저 사람이 돈이 없어서 그러는게 아니고 어디다 놓고 왔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얼른 외상을 주거든요. 그러니까 뭐라 그럴까요. 돈 없이도 다닐수 있다 이런 굉장히 편리한 점이 있죠.
네. 한 가지만 해도 유명해져야 되겠습니다. 누구든지. 학교다니실때는 어땠어요? 유명하신 축이었나요? 뭘로 유명하셨...
- 학교다닐때 유명한거는 그저 뭐 키 적고 똥똥허고 얼굴 못생기고 그걸로 유명했죠. 그런데 학교다닐때도 과히 그렇게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었어요. 왜 그런고 허니 그 어디 야유회를 간다는가 말이죠. 그럴 경우에 아무래도 즐겁게 즐기기 위해서는 노래같은게 꼭 따르게 마련아닙니까? 그럴경우에 절 찾게되죠 이제. 노래를 좀 하라구요.
그 시절부터 보이시길 시작했군요. 근데 허스키란 얘기가 그 때만해도 없었을것 아니에요?
- 그렇죠. 허스키랑 얘기가 물론 있기야 있는 거지만 우리들 주변에서 그렇게 붐을 타고 얘기가 되진 않았었죠. 허스키가요. 근데 제 목소리가 이제 아마 허스킨가 봐요. 그리고 이제 제가 그 때 데뷰할 당시만 해도 하녕숙씨 또 현미씨 이렇게 허스키의 삼총사가 한꺼번에 나왔어요. 그래서 좀 더 강하게 여러분들에게 어필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됩니다.
정말 붐이었죠. 그 당시에는 그럼 허스키아니고 어던 목소리라고 표현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친구분들이랑.
- 뭐. 쉰듯한 목소리다. 그리고 제가 또 냇킹 콜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흉내도 내고. 모창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절 보고 우리나라의 냇킹 콜이다. 뭐 이렇게 별명을 붙여주고 그랬었어요.
노래 가수가 되실... 노래는 좋아하셨지만은 노래하고는 먼 전공을 가지셨다는것도 또 최희준씨... 계시는 분들은 다 아실텐데요. 왜 가수가 되셨는가 이 얘기는 좀 이상할꺼고. 어떻게 어떤 점이 그렇게 됐는지.
- 참 사람이 아주 그 자기도 모르는 그 뭐라그럴까요 아주 우스운 순간에 운명이 갈려진다 뭐 이런 얘기들 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경우의 하나인것 같애요. 어렸을때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때 그때는 제가 이제 수학을 조금 좋아했어요. 난 틀림없이 이제 이공계통으로 나가서 그 집안 살림의 안정된 뭘 이루어야 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엔지니어계통?
- 엔지니어가 아니라 처음에 의사를 지망했었어요. 그랬다가 또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까 또 변하더군요. 마음이요. 아 요번엔 내 어떻게 사업을 하는 그런 방향으로 해야겠다. 그래서 이제 그때 어떤 대학이라고 밝히진 않겠습니다만 시험을 안 보고 무시험으로 들어가는 제도가 있었어요. 석차가 100분의 5가 되면은요. 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입학시험이라는 뭐라 그럴까요 어려운 경쟁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 대학을 지망을 했었어요. 제가. 상과를요. 근데 아버님께서 말씀이 왜 사립학교를 가느냐구요. 기왕이면은 지 아버님은 지금 별세하고 안 계십니다만 상당히 그 완고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이왕이면 경성제국대학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뭐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래 가지구선 아버지가 자꾸 우기셨어요. 법률공부를 하라고. 그때만 해도 법률을 공부하고 싶은 그 뭐라그럴까 마음에 준비라 그럴까 하나도 돼 있지 않았었습니다. 하두 아버지가 우기시고 학교는 또 뭐 나중에 옮길수도 있고 또 해 보노라면 자기 취미에 이렇게 동화될수도 있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을 해가지고 아버님한테 이제 마지막 효도를 해야겠다 뭐 이런 생각으로 법대를 지망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이제 시험을 쳐서 요행 운이 좋아서 입학을 했어요.
최희준씨 말씀이시고. 그럼 결국은 효도를 못하신 셈이 되죠?
- 아니 들어갔으니까 효도는 됐죠. 네. 아버님께서 뭐 고시를 꼭 보라고 이렇게 말씀을 안 하셨어요. 우선 대학을 들어가라 우선은 들어갔으니까 좌우간 아버님 뜻에 거역을 안했습니다.
고 다음에는 장기대회라는게 서울대학교에 있었고 이건 제가 근야 잡지라든가 들어서 안 얘깁니다만 오늘 구두로 좀 직접 말씀을 들어보았으면 하는데요.
- 네. 사실이에요. 그게요. 제 대학교 3학년땐가. 제1회 서울대학교 장기놀이대회에요. 이름을 그렇게 붙였었어요. 장기놀이대회다. 카니발 비슷한거죠. 이제 법대 대표로 제가 나가서 노래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당당히 입선을 했죠? 그게 이제...
그 때 부르신 노래가 뭐였어요?
- 그 당시에 팻 분이 굉장히 학생들간에 인기가 있었어요. I`ll be home 그걸 불렀습니다. 지금 현재 김광수씨가 와서 반주를 해주시구요. 그래 가지고 굉장히 아주 호평을 받았어요. 박자는 막 틀리고 그랬지만. 허허. 그래 이제 소문이 나서 친구들 간에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넌 뭐 노래를 해도 되겠다구요. 그 때 이제 제가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어요. 학생들을 여럿 모아가지고 가리키니까 시간 많이 뺏기구요 어떻게 이거이 거 노래부르는 거이 거 돈 버는거의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없을까 생각하던 끝에 타피라고 월남이 갔다 온 해병대 제대한 그 밴드마스터 있습니다. 김한영씨라구요. 그 양반을 소개로 알게 됐어요. 그래가지고 그 8군쇼에 첫 데뷔를 한 셈입니다. 그 당시에 제가 부른 노래가 `낙엽`하구요 제리 베일이 불러서 크게 히트한 `you don`t know me` 허허허.
장기대회가 먼저였나요?
- 장기대회가 먼저죠.
장기대회가 계기가 된 셈이 되겠군요.
- 그렇죠. 그걸 일반한테는 공개를 안 하고 이제. 우리나라에 와 있는 미군병사들만을 위해서 노래를 했습니다. 한 4년간.
네. 그것이 그런 얘기가 지금부터 한 몇년쯤 되나요?
- 그러니까 한 10년 넘는 것 같습니다.
10년전의 옛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그림자`라는 곡이 아마 데뷰시절의 곡일까요?
- 네. 이 노래가 제가 우리 노래를 처음 취입을 한 노랩니다.
10년 전 노래 한 번 들어...
- 아니죠. 이건 10년 전이 아니죠. 이건 그러니까 6년이군요.
6년 됐나요? 네.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 그림자 - 최희준
6년 전 노래라고 그러셨는데요. 지금 들으시면은 뭐 어떠세요? 만족하시는지 그렇지 않으면 부족하다고 느끼시는지요.
- 왜 저 그런 경험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어렸을때 사진 퇴색한 사진 있지 않습니까? 근데 사진이 잘 된게 아니고 잘 안된 사진을 볼 적에 자신이 볼 ㅈ거에 서먹서먹하지 않아요? 그런 똑같은 느낌이에요. 뭐라그럴까 요런데는 지금 내가 부르면 요렇게 안 할꺼다. 아이 이거 참 부끄럽구나. 뭐 이런 생각이 들고 말입니다.
이 그림자가 우리 노래로는 처음이라고 그러셨는데요. 8군에서 노래를 부르시다가 이쪽으로 또 나오시게 된 계기도 또 있을것 같습니다.
- 네. `그림자`를 그 때 부를적에도요 8군쇼는 계속해서 나가면서요 나가면서 취입만 한 거에요. `그림자`하고 기억하시는 분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저 `목동의 노래`라구 있어요. 그 둘을 동시에 녹음을 했는데요. 처음에 이거 지가 안한다고 그랬습니다. 안 하는게 아니라 못한다고 했어요. 지금은 파키스탄인가 어디 가 있는 데요. 김성옥씨라고 가수가 저하고 같은 쇼에 있었어요. 그 양반이 남의 노래를 갖다가 흉내내는 앵무새 같은 그런 노래만 할 일이 아니라
외국 노래 부르는 거요?
- 네. 자기 노래를 하나 해서 두고 두고 길이 남기고 싶은 생각이 없냐 그러더군요. 난 뭐 그때만해도 뭐 지금도 시원치 않습니다만, 음악적인 실력도 그렇고 말이죠. 도저히 내 능력이 없어서 못하겠다 그랬더니, 처음부터 배워가지고 나온 사람이 어딨느냐고 한번 해보라고 자꾸 용기를 주더군요. 그래 이제 손석우 선생님을 만나 뵜어요. 선생님을 만나 뵙고 나서 제가 용기를 더 얻은 셈이죠. 그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아, 과연 이런 길이 있었구나. 또 이 길이 보람된 길이 될 수 있을것 같다 뭐 이런 생각을 해가지고 그 때까지만 해도 막연하게요 막연하게 그저 노래하고 돈을 받고 그걸로 학비를 조달을 한다 뭐 이런 생각뿐이었었는데 아 이렇게 아직 미개척의 분야도 있구나 내가 조금만 노력을 하면 거 뭐 조금 보람을 얻을수 있는 길이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가지고 `그림자`하고 `목동의 노래`를 용감하게 선생님한테 받아가지고 그러니까 연습을 음을 듣고 그 음을 따러해서 하는거죠. 그러헥 해가지고 취입을 했어요. 근데 그 때만해도 내가 꼭 가수가 되야겠다 이런 확연한 생각은 없었어요. 될 수 있는 한 어느 선까지 해가지고 언제가되면 내가 이제 물러서야겄다 이런 생각을... 그래서 이름도 그 최희준이란 이름을 갖다 짓게 된 원인이 있는데요.
본명이 아니시군요?
- 네. 본명이 아닙니다. 원래 제가 최성준이에요. 이룰 성자하고 준걸 준짜요. 방송에 나가면 틀림없이 아버님이 들으실꺼거든요? 그 때 이제 조금 몸이 불편하셔서 외출을 안하시고 매일 래디오만 들으셨어요. 그래 혹 들키면 어떻할까 싶어서 말이죠 이름 가운데자를 바꿔가지고 최희준이라고 허허허허
네. 그 때만해도 거의 아마 결정은 되셨지만은 확정은 안 됐었는데 아마 노래가 히트됨에 따라서 노래를 따라서 결정이 된 것 같애요.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라는 것이 아마 그 이후로 정말 히트가 됐던 노래로 기억이 되는데요.
- 네. 보름차이를 두고 취입을 했습니다.
네. 같은 시기군요.
- 네. 같은 시기죠.
들어 볼까요? 옛날의 사진 다시 한번...
♬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 최희준
아버님이 결국은 알으셨을텐데요. 그 얘기도 또 궁금합니다.
- 네. 그 지금 밖에서 연출을 하고 계신데, 임영씨라구요. 그 분이 예전에 신문사에 계실적에요. 신문에다 절 크게 취급을 해주셨어요. 그 때 제가 나갈까 말까 망설였었어요. 신문에 나게 되면 틀림없이 아버님이 아실텐데. 한참 망설였습니다.
래디오로는 아마 목소리를 모르셨던...
- 모르셨죠. 절대 절대로 모르셨어요 그거는. 근데 이제 굉장히 망설이다가요. 에이 내 기왕에 나선 길인데 뭐 해야겄다 하구서. 그 종로에 있는 무슨 다방에서 만나 뵙기로 했는데. 거기 나가서 이제 물어보시는 대로 다 대답을 해드렸어요. 그랬더니 이제 그 다음 다음날 신문에 크게 났어요. 집에 들어갔더니 아버지께서 신문을 내놓고 이거 너지 그러시잖아요. 허허. 거 뭐라고 얘기합니까. 그래서 아무소리 못하고 네. 굉장한 야단이 떨어질줄 알았어요. 아주 뭐 혼날줄 알았는데 아버님께서 말씀이 그래 기왕 니가 좋아서 이 길로 들어가고 싶고 이렇게 또 하고 싶으면은 그 계통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 그 계통에선 필요한 사람이 되라.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게 이제 저한테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유언이 되고 말았어요. 그 뒤에 바로 아버님께서 별세 하셨으니까요. 그래 지금도 얘기가 있을적마다 제가 그런 얘길 합니다. 허허허.
지금 아버님께 들려 드리고 싶은 얘기는 이 길에서 성공하셨다는...
- 글쎄 아직은 성공을 했다고 생각이 안 됩니다. 이제 인생을 다 저 총정리해가지고 이렇게 마지막으로 계산 뽑을 때 이제 얘기가 나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