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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편 - 우연한 등단, 청록파 이야기
박목월 편
우연한 등단, 청록파 이야기
1967.04.19 방송
‘나의 데뷰’는 가수,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에서 시인, 화가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누구나 화려하고 대성한 오늘이 있기에는 가슴 설레이며 등장하던 데뷰시절이 있습니다.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대해서 정다운 음악과 함께 데뷰시절의 얘기를 들어보는 이 시간. 자 오늘은 어떤분을 모셨을까요?》

나의 데뷰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문단의 중진이신 시인 한 분을 모셨습니다.

박목월입니다.

-안녕하세요? 나무 목자 달 월자 죠? 본명이 아니실 것 같아요.

이젠 본명 행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뭐 사령장도 박목월로서 나오게 되고 세금도 박목월로서 물게 되고 그렇습니다.

-오늘 음악을 두어곡 준비해봤는데 음악 첫번째 듣기 전에요 선생님이 나무 목자 달 월자 함자를 가지시기전에 얘기 좀 들었으면 하는데요. 그전에는 어떤? 학교 다닐실때는 다른 이름이셨겠죠?

학교 다닐때는 박영종이었습니다. 박영종이었는데 나는 문학청년시절랄까요 상당히 가진 셈이죠. 중학교 1학년 들어갔을때 문학을 하겠다는 것이 내 소망이었고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의 하나의 지표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내 소망이나 해본일이 없이 꾸준히 가져왔으며, 약 7-8년 문학청년 시절을 가졌습니다.

-영향 같은 것은 어디서 받게 될까요?

문학청년시절에 있어서의 영향이라는것은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여러 다방면에서 받게 되는 거에요. 어느 한 작가에 대한 영향이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참 우스운 생각이 납니다만, 마치 한 작가에 있어서의 한 편의 작품이라는 것은 피의 한방울과 같은 겁니다. 피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그야말로 온갖 것이 섞여 가지고 하나의 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문학청년시절에 있어 가지고는 여러 다방면에 책을 읽어서 거기서 자기가 필요한 요소들을 전부 다 뽑아 내 와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고 애독하던 외국도 좋고 국내도 좋고 글쓰는 분은 그 당시에는 어떤분이셨습니까?

제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 많은 문인 가운데서요. 우선 내 머리에 떠오른 게 라이나 마리아 릴케입니다. 그 사람이 젊은 시인에게 주는 편지라는 얄팍한 책이 있습니다. 몇페이지 되지 않죠? 그러나 어느 한 사람에게 주는 결정적인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 양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거 읽고 나니까 좀 건방진 얘깁니다만 이제 더 인생에 대해서 배울것이 없다 싶은 이런 하나의 개안적이 계시랄까요, 눈을 뜨게 하는 계시 뭐 이런것을 한번 깊은 감격으로서 느껴 본적이 있습니다.

-문학을 한다고 하면 시, 소설 , 산문 뭐 여러가지가 있겠는데요. 릴케의 작품을 읽으신 것이 시를 쓰시게 되는 직접적인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는 소설도 쓰고 싶었습니다만 써지지 않더군요. 그 사람이 타고난 재능이 다를게고 성격이 다를게고, 나는 지금와서 생각하면 죽기전에 한번쯤은 내 자서전 비슷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나는 원래 시인으로서 좀 남다른 이런 것을 받아왔는 거지 소설가적인 재능은 별로 받은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쓰고 싶어도 써지지 않죠.

-시만 쓰셨고...
들장미 첫곡으로 준비했는데 들어볼까요? 소프라노 황영금씨 독창입니다.

♪ 들장미 ♪

-아까 7-8년 동안의 문학 청년 시절을 가지셨다구요? 본격적으로 남에게 인정을 받고 그렇게 시인이 되시는 길은 어떻게 마련이 되셨는지

1939년에 [문장]이라는 잡지가 있었습니다. 그 잡지에 우연한 기회에 투고를 해서, 이것이 추천이 되어서.. 인생의 모든 면에 있어서 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그 때 투고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내 친구가 와서 어떻게 한 번 보내보라고 이러더군요. 그래서 투고해 놓고 까맣게 잊어버렸죠. 그 당시에 동아일보 입니다. 한 번은 가을날이었는데 동아일보를 보니까 박목월이라는 이름이 있고 내 작품이 나와 있는데, 그 당시에 박목월이라는 이름을 내가 처음 썻거든요. 아주 생소한 이름이래서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게 나 아닙니까. 그래서 문단 나오게 됐습니다.

-그럼 박영종씨의 시가 아니고 박목월씨의 시 지금 뭐 기억하시고 계실것 같애요.

네, 첫작품이래서요.

-한번 청취자 여러분과 들어 봤으면 싶은데요.

너무 쑥스러워서요. 한번 내가 외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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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산 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 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 나가다
산울림 혼자 돌아 나가다
…… 어쩐지 어쩐지 슬픔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문장>(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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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에요?

네, 끝인데. 끝절에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이것이 그 당시에 있어서 그 당시라는게 일제 말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가지고는 무슨 다른 외적인 길이라는 것은 전부 막혀있었습니다.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에 있어서 나는 젊음을 맞이했거든요. 흔히 젊음의 꿈이나 정열이거나 전부 다 안으로 모을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서글픈 환경속에서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이 실낱같은 먼 산길에 나 있는 이 길의 이미지, 이것이 내게 있어서의 바로 청춘적인 감정이 떠올리는 절실한 감정이었겠죠. 그리고 또 하나 생각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나는 그 당시에 생각이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왜냐면 이 생각이라는 말이 이게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거기서 한 두 푼쯤 자기 자신을 안으로 모아오게 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이렇게 안 되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나 자신의 여성적인 내성적인 이런 하나의 애정감정 속에서 나대로의 조그마한 테두리를 가지고 내 청춘을 살아온 셈이죠

-구런 시를 가지고 문단에 데뷰하신 후에 문인들도 많이 알게 되시고 그러셨을텐데요. 시인들 글쓰는 분들은 그룹들도 나름대로 가지고 계신데요. 그 뜻이라는 것은 우정관계가 될까요? 또 글에서 통하는 그럴걸로.. 그 때 청록파라고 있었다구요?

청록파는 1939년에 내가 문단에 시단에 나오게 되고 1945년에 해방을 맞이 했지 않습니까? 그 중간은 우리나라의 역사상에 있어가지고 하나의 암흑기였습니다. 암흑기에 우리는 전연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같은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런대로 꾸준하게 우리의 노작을 계속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을 해방 후에 조지훈 선생하고 박두진 선생하고 셋이 어울려서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물론 이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내게 된 것은 양면을 다 가집니다. 하나는 우정관계하고 하나는 우리 세사람의 시에 있어서의 자연을 소재로 했다는 이런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게 된것입니다. 또 세사람이 전부다 <문장>을 통해서 추천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얽혀가지고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냈죠.

-그때는 젊으셨을 시절이셨는데 지금 오래 같이 지내시고. 지금은 어떻게들 지내세요? 여전히 우정관계 뿐 이겠죠?

지금은 어떻게 지내느냐.. 그야 말할 필요 없겠죠? 지금도 아주 친하게 지냅니다만, 다만 그때 청록집의 이름이 청록이라는 것이 푸른 사슴을 의미하는데, 뭐랄까요... 그 당시에 있어서의 우리들 생각은 새로 나온 신인으로서의 참신한 꿈을 가졌다 이래서 푸른 사슴을 했거든요. 얼마 있으면 백록집을 하나 낼 예정이에요. 허옇게 늙은 사슴들의 삼인 시집이 하나 나왔으면 기념이 될거 아니겠어요?

-흥난파씨 작곡으로 되어있는 `옛동산에 올라` 우리 가곡인데요. 바리톤 변성엽씨의 독창입니다.

♪ 옛동산에 올라 ♪

-오늘은 아시다싶히 4·19 7돌이죠? 젊은 학생들이 불의에 항거 선혈을 뿌리면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킨 날인데. 4·19 몇일 후가 되던가요? 선생님의 시를 제가 조선일보에서 읽은 생각이 나는데요. 언제쯤이었죠?

그게 이대통령이 하야 한다는 중대방송이 있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게 4월 26일 이었습니까?

-그러면 그 시보다도 선생님은 문인들의 사회 참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인도 사회인 아니겠습니까? 사회란 자기의 주어진 현실이라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참 은둔적인 시인처럼 그야말로 사회를 완전히 등지고서 산골에 들어가서 풍월이나 노래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나 자신에 있어가지고는 비교적 사회적인 비평이나 혹은 사회적인 문제보다는 나 자신의 내면 생활에 보다 더 집착해서 살고 있는 편에 하납니다. 그렇지만 4·19같이 이렇게 민족적인 하나의 정의를 위해서 일어나는 경우는 나도 나의 주변에 있는 내 이웃과 같이 내 가슴에 불이 타오르는 것은 당연한일 아니겠습니다.

-그날 쓰셨던 그 작품을 한 번 들어봤으면 하는데요.

네, 가져오기는 했습니다만, 내가 잘 안보여서 아나운서가 대신 한번 읽어봐 주시겠어요?

-굉장히 긴데요. 동이 트는 순간을 이렇게 제가 되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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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민주주의의 기수여 정의의 불기둥이여
바로 엊그제까지 눈이 팔팔하게 살았던 젏은이여

이제는 무덤아래 누웠는 그대들 귀에도 들리는가
거리에 울리는 이 중대방송의 귀절귀절이
비로서 앗아 온 민의의 승리가

우리 다시 민주 대한의 터를 마련하게 되면은
그때는 아이여
속이지 말고 속지 말고
억누르지 말고 눌리지 말고
업수이 여기지 말고 업수이 여김을 당하지 말고
남을 힐난 말고 허물을 뜯지 말고
이웃은 이웃끼리 서로 사랑하고 돕고
남의 말을 소중히 여기고
권력을 탐내지 말고 휘두르지 말고
어리석은 시인의 꿈처럼 황홀한 그 나라를 마련하자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뉘우침으로
양심을 밝히고 눈물로 참회하고
이제 두번 다시 뉘우치지 않을
자유롭고 아름답고 참된 백성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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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때 쓴거지만 지금도 내 가슴에 있는 하나의 국민으로서의 소원은 그 노래한 지금 읽었던 그대롭니다. 무언지 모르게 참되게 밝게 아름답게 정의를 위해서 양심을 가지고 살자 그래서 참된 백성이 되자 이런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가지 말씀 고맙습니다.
그리고 시 고맙게 듣고 읽어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입력일 : 2007.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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