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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목 편 - 배우에 응모를 했다가 조감독으로 발탁
유현목 편
배우에 응모를 했다가 조감독으로 발탁
1967.03.24 방송
‘나의 데뷰’는 가수,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에서 시인, 화가에 이르기까지 각계 각층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해서 데뷰시절의 숨은 얘기를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다.
《 천리길도 한걸음 부터. 예로부터 이런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만 누구나 화려하고 대성한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가슴 설레이며 등장하던 첫 무대가 있습니다.
예술, 문화, 연예, 스포츠 등 각계 각층의 저명 인사들을 초빙해서 그 분들의 데뷰 시절의 얘기들의 국내외의 가요들과 함께 들어보는 이시간.오늘은 과연 어떤 분을 모셨을까요.》

- 안녕하십니까. 나의 데뷰 오늘은 열여섯번재 시간입니다.
영화감독 한 분을 모셨는데요.

- 네. 유현목 입니다. 안녕들 하십니까.

- 네. 화제의 영화 감독을 한 분 모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걸 그랬나요.
안녕하셨어요?

- 네. 수고하십니다.

- 바쁘시죠? 요즘.

- 네. 준비하고 있습니다.

- 네. 인제 아까 그 소개 타이틀에서도 나갔지만 가슴 설레이던 데뷰시절의 얘기를 듣기 위해서 모셨는데 이렇게 오랜 인제 감독 생활을 하시고 나면은 가끔가다 자 어떡하다가 내가 이런 감독이라는 직업을 갖게 됐나.

- 이런 팔자가 됐는지.

- 아니요. 그 시작을 했을 그 당시를 가끔 생각해 보시기도 하실것 같애요.

- 네. 그건 여러번 있습니다.

- 네.

- 왜 영화 감독이 됐느냐. 영화에 대한 매력 때문에 됐겠지만은 영화의 매력은 무엇인가. 이렇게 따져보면은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종합예술 하게되면 문학, 음악, 그림 이라던가 조각 이라던가 무용 이라던가 연극, 이러한 모든 예술이 종합해서 형성되는 작품이다 또 예술이다. 여기에 커다란 매력이 있었어요.
근데 이걸 좀 거슬러 올라가자면 제가 중학교 2학년때 그 땐 전 발명가가 될라고 그랬어요. 길거리에 있는 쇠 부스러기를 얻어다가 뭘 만든다거나 뭐 탑보드를 만든다거나 비행기를 만든다거나 그래 과학자가 될려고 그랬는데 몸이 약해지면서 차츰 감상적으로 돼면서 이 어느날 그 일제시대 남한 조태권씨가 무용 발표를 할 적에 거기에 퍽 그 감명을 받고 그래서 나도 이제 무용가가 돼야겠다 해서 만드는것을 포기하고 무용을 공부한다고 결연을 했어요.

그러다가 또 어느때는 그 때 계정식씨라고 기억되는데요. 바이올리니스트. 그 독주회를 듣고 또 거기에 상당히 매혹되가지고, 아 내가 음악가가 돼야겠다 또는 작곡가가 돼야겠다 이래서 금방 돌아가서 바이올린을 하나사서 켜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또 방학때면 시골에 내려가서 수채화 물감을 들고서 산속에 들어가가지곤 산수화를 그린다거나 이런 그 그림에 또 열중한 적이 있어요.

또 저런 전람회 같은데 가서 매혹되고 그래서 이젠 화가가 돼야겠다 그래서 이제 그림에 대한 생각을 하고 그려보기도 하고 또 한때는 또 흙을 파다가서는 조각을 해보기도 하고 이래서 이제는 조각가가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니냐 어린시절에 그런 생각들을 해보고 이제 이렇게 여러 예술을 깊이 들어가진 못했습니다만 어린시절에 사춘기에 그 많은 예술들을 하고 싶었다는 그 욕심이 오늘날 종합 예술인 다시말해서 그러한 예술들을 총 종합체로서의 영화 예술작품 여기에 이제 매력을 느낀 셈이죠.

게다가 또 영화는 기계과학과의 그 열화처럼 기계과학을 통한 그 예술이기 때문에 먼저 그 과학자가 돼겠다는 그것과 많은 예술을 해보고 싶다는 총 그 정착지 정착역이 영화라는거 여기서 이 시나리오를 생각을 했어요.

시나리오 속에서는 이제 연극을 또 했습니다. 학교에서 그 연극을 대학시대 입니다만 연극을 한다고 참 인제 해가지고 내가 인제 앞으로 희곡, 문학 작품을 써야겠다. 제가 문과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희곡 공부를 하다가 그 때 마침 시나리오 연구회 라는게 또 생겼어요.

그래서 그 강의를 들으러 가서 영화가 갖는 새로운 매력을 찾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시나리오 작가가 돼야겠다 이래서 열심히 또 시나리오를 쓴다 본다 이렇게 됐어요. 또 시나리오를 공부하려면 영화를 알아야겠다. 그래서 어느날 배우 이 모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배우 모집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 때는 극히 드물었어요.
그래서 배우 응모에 응모를 한 셈이죠.

- 네.

- 그래서 그 때 그 심사하는 감독이 당신은 얼굴이 좀 잘 못생겼으니까 배우돼긴 다 틀렸고, 필답 시험을 보니까 100점인데 우선 연출 분야에서 조감독으로서 일할 의사가 없느냐. 그래서 저는 기다렸다는듯이 제 목적은 사실 그겁니다. 배우가 목적이 아니고. 그래서 그 조감독으로 선택된 말하자면 입사돼서 그런것이 이제 오늘의 첫 오늘날을 만들었던 첫 스타트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 네. 어쨌든 맨 처음에 S자형으로 여러분들을 돌아보실 때 이 문학적인 것으로 체질이 많이 흐르신것만은 아주 제일 뚜렷한 사실인것 같아요. 그렇죠?
그럼 우선 노래 맨 처음에 준비 했는데요. 윤복희씨 노랩니다.

♬ Cansas city - 윤복희

- 그렇게 해서 이제 조감독으로 일을 하시게 되셨을 때가 꾀 오래전이죠?

- 네. 시나리오를 공부를 하려니까 감독 공부를 해도 좋겠다 해서 감독 공부를 한동안 아까 얘기한데로 많은 예술을 감독이 총 책임지고 창작을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감독으로서 결연한거죠.

- 오래전이시죠. 얼마쯤 전이 돼나요? 그때가.

- 네. 그게 벌써 해방직후 쯤 돼니까.

- 네. 그렇게 해서 만드신 작품이 어떤 것이었나요.

- 다음에 만든건 또 나중에 얘기 드리겠습니다만. 네. 제가 그 당시에 동국대학을 다녔어요. 그래서 영화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학교에서 무슨 영화를 하나 만들자 그래가지고 16mm긴 하지만 `해풍`이라는 영환데요. 40분짜리 극영화 입니다.

좀 놀긴했죠. 학생들이 만드는것은. 그러나 그 때 해방 직후의 그 정념들을 가라앉힐 길이 없어서 학교 당국에도 얘기했고 그리고 우리들 포캣에서 돈을 모은다거나 책을 판다거나 시계를 판다거나 이래가면서 그 40분이면 상당히 돈이 됍니다. 이러한 것을 모아가지고 결국 그래서 돈이 더 많이 들었죠. 그래서 만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그 인상깊은 학창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지금 학생들 영화분야 뿐만아니라 연극분야도 그렇고 또 기타 과의 활동에 있어서 그러한 청년들이 과연 오늘날의 학생에도 있느냐. 이건 참 요즘 학생들에게 미안한 얘기지만은 이러한 기력이 우리 그 때 보단 못한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그 참 유감스러운 생각을 가끔 제 학생시대와 견주어서 생각할 때가 있어요.

- 네. 그 때 만드신건 물론 그 상업적인거하고는 관련이 없는거죠.

- 아뇨. 학생들끼리 습작 형식으로 만든것인데. 물론 대중들에게 공개되진 않았습니다만 교내에서 공개했고 퍽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니까 선생님이 인제 처음 만드신것은 그 학생시절에 부터 벌써 만드셨군요. 같이.

- 네. 그러니까 그 때 정열이 퍽 좋은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네. 음악 하나가 또 준비 됍니다. `장밋빛 인생` 김상국씨가 불러 주시겠습니다.

♬ 장밋빛 인생 - 김상국

- 네. 좀전에 말씀하신데로 그 학생시절에 정열을 퍼부어서 만들었던 작품에도 물론 애착이 많으시겠지만은 그 후에 본격적으로 감독을 하셔서 또 남들이 보고 반응을 볼 수 있고.

- 네. 그 후에 약 8년간을 조감독 생활을 했어요. 마지막 작품에 이제 12~13년전에 춘향전이라고 있었죠.? 그게 이제 마지막 조감독이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처녀작으로 독립한것은 `교차로`라는 작품이 있었어요.

- 네. 네.

- 12년전쯤 됍니다만. 이 작품을 제가 다 맡으면서 이것이 처음일이라 여러가지 미숙한 점도 많고 지금 생각하면 좀 고소하는 그러한 장면도 많이 있었을것 같아요. 미비한 점 때문에.

- 고소라는거는 그러니깐 지금 돌아다보면 미비하다 그런건가요?

- 네. 그런것 뿐이죠. 네. `교차로`라는 작품은 쌍둥이 딸의 얘깁니다. 네. 하나는 부잣집 딸로서 가있고, 하나는 가난한 집에 식모로 가있고 이렇게 어렸을 때 헤어진 쌍둥이들이 마지막에 어떤 계기로 해서 만나게 됀다.
이제 이런 얘긴데요.

- 네. 1인 2역 이었었는데요.

- 네. 1인 2역 이죠. 우리나라로선 이제 1인2역으로선 처음 시도한 것이고, 지금 줄거리가 너무 오래되서 기억이 잘 안납니다만 어쨌든 그 때 제가 결의 한것은 뭐냐면 그동안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영화 작품이 그 당시 까지요. 영화의 기교성, 테크닉이 부족된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우선 우리 영화의 기교를 영화적 기교를 수립해야겠다.

이것을 골몰했어요. 그래서 그 `교차로`라는 작품은 그 주제의식이나 이런면 보다도 영화적인 기교 형식상의 그 요함이 이런데에 너무 중점을 둔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우습습니다만 어쨌든 너무 이 테크니시한 기교적인 파처럼 손재주를 너무 부린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 하면서 그러나 자부할 수 있는것은 지금까지의 평탄적인 스토리 중심의 스토리를 설명하는데 그쳤던 영화 수법보다 보다 또 카메라 라던가 화면구성에 있어서 능동적인 영화적 표현 이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것을 많이 시도했다고 그렇게 생각 되어집니다.

- 그 때도 1인 2역이 처음이라면은 선생님 언제나 화제작에 대한 야심이 많으신것 같은데 여러가지 난처함도 많았을것 같아요. 촬영같은거 하는데.

- 네. 그 1인 2역 이라는게 지금 오늘날도 그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기계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시설이 없어서 그래서 아주 그 수공업적인 원시적인 방법으로 했죠.

- 네. 저도 그 영화 봤는데 아주 그 재미있게 봤는데요. 그 당시에도 요즘도 그 영화 촬영하면 밤새우고 뭐 그런다는데 그 때도 그렇게 많이들...

- 네. 그 때는 별로 한국영화가 많이 나올 때가 아닙니다. 일년에 한 이삼십회면 많이 나올텐데, 그 때 뭐 재밌는 얘기를 들자면은 오늘날처럼 이제 한국영화는 기술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오늘날을 그렇지만은 그 당시는 기술장면 같은게 잘 허락되지 않고 그랬는데 거기서 그리고 또 기술 장면이 여배우들이 잘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제 입술에다가 파라핀 있죠. 투명한 그걸 입술에다가 가위로 잘라서 붙여가지곤 남배우하고 키스하고 이랬던것이 퍽 그 때가 재밌었던 추억이 아닌가 이런 소박한 생각이 납니다.

- 네. 십이년 지나서 십년이라 강산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 네.

- 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말씀 무궁무진 하실것 같으신데요.

- 네. 시간이 짧아서.

- 네. 네. 오늘 여러가지 말씀 고맙습니다.

- 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오늘은 그 열여섯번째 시간 영화감독 유현목씨를 모시고 얘기와 음악을 들어봤습니다.

(입력일 : 2007.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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