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스물 세번째
- 아니 박 경장님 아니세요? - 아 예. 아주머니. - 아이구 아이구 아침부터 왠일이시래요? - 저 업고 계신 애가 뒤에 들어 온 아입니까? - 야. - 그저께 들어왔담서요. - 야. - 근데 그 뉘집 아이인지 아직도 모릅니까? - 아 그건 알아서 뭣 허게요. 자식 버린 부몬 찾아서 뭘 하냐구요. 알고 싶지도 않구먼요. - 그렇기는 하지만은. 아니 아주머니가 갓난쟁이 둘을 데리고 뭘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 막막하긴 혀요. - 작정을 하세요. 애 맡길만한 데는 지가 알아 볼 테니께유. - 아 그 얘기 할려고 이렇게 일찍 오셨소? - 아 정들기 전에 보내야지요. - 아이고 그만 두시쇼.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는 포대기에 싸서 망태기에 담아놓고 보리 파종을 하고 있는 그녀. 그 표정은 조용했다. 박 경장은 더 말해야 소용없지 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입을 다물고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지켜본다. 이미 오십고개에 접어든 그녀의 주름진 목덜미. 그 가느다란 목덜미를 적시며 흘러 내리는 땀. 그 땀방울의 의미가 안타깝고도 뿌듯해서 박 경장은 돌아설 줄도 모르고 거기 그렇게 서 있다.
- 내년엔 지발 보리농사 라도 좀 돼야 할 건디. - 그러게요. - 아이 그만 가 보시쇼. 바쁘실텐디. - 예. 뭐 가야지요. - 애 키우는 재미가 어떤건지 박 경장은 자식이 있으니께 알지라우? - 아 그야 뭐 내 자식이니께요. - 자식 없는 나는 내 품에 들어 온 자식이 내 자식이여라우. - 글쎄요. - 넘들은 날 보고 사서 고생을 한다고들 하는데 난 이게 고생 같지가 않어라우. 아 나가 좋아서 하는 것인게요. 나가 막막하다고 하는것은 수중에 돈 한푼이 없어 애 굶겨 죽일까봐 막막하다는 거이지. 고생이 무서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여라우. - 아주머니 마음을 훤히 아는것 같다가도 모르겄고, 모르다가도 알것 같고 그래요. 저는. - 박 경장님은 나가 살아 온 내력을 낱낱이 다 몰라서 그려요. 진짜 고생은 왜놈들 밑에서 종 살이 할 때지. 지금 고생은 고생도 아니라구요. - 아 그런께 하는 소리지요. - 30년을 왜놈들 밑에서 눈물로 지내셨으니께 인제 좀 편케 사셔야지요. 안 그런가요. 예? - 글씨요. 나가 눈물로 한 세상을 살아서 그란지 더러운 인생을 보면 내 창자라도 떼주고 싶은걸 워쩌겄소. 나도 모르게 정이 쏠리는 걸 워쩌겄소. 아이 와요. 그래도 내 마음을 모르겠는 가라우? - 부처가 따로 없구만요. 그래요. 참말 부처가 따로 없다구요.
- 아니 날은 어두워지는디 아직도 저걸 겨우 끝내다니 어쩐거야. 이? - 아 어쩌긴. 내일 하든지 혀야지. 눈에 불 키고 할 순 없자녀. - 아이고. 영일이 어멈이 있었으면 오늘 해 안에 끝났을 거인디. - 아이 누가 아니래요. 그 사람만 있었으면 끝났제이. 끝이 나도 벌써 끝났을거이라고. 자네들 맹기로 고 사람이 일하는디 가 몸사리는 사람 아닌께. - 아이고 아이고 저 양반 말하는것 좀 보게. 아이고 해 떨어질 때 까정 쌔가 빠지게 일하니께 뭣이라고라우? - 아이고 진정들 햐. 나가 말이 헛나간 모양인께 고만들 진정 하라고. - 그랴. 어른이 참아야제. 어른이 참어. - 뭣이라고? 어른이 뭐가 우째야? - 아이고 곧 죽어도 어른 대접은 받고 싶어서. 씨알도 없는 소리 그만 혀고 탁곡기나 끄라고. 배가 고파서도 더는 못하겄응께. - 하핫 그려. 나도 배가 고파서 못하겄다. - 아니, 저게 누구여. 영일이 어멈 아니여? - 음매. 아니 근데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저 허둥걸음으로 오냐? - 아이고, 아니 자네 왜 그런가? - 아이고, 워쩌면 좋소. 아줌씨들. - 아니 아니 와 그랴. 잉? - 아그가. 아그가. - 아니 갸가 와? - 아이구 몸이 불댕이여. 불댕이. - 오매. 오매 이게 왠 일이여. 잉? 아 펄펄 끓네 끓어. - 아이고 눈도 못 뜨고 이라는데 우짜면 좋소. - 아이고 우짜긴. 의원한테 보여야제. - 아이고 의원이 어디있소. 읍내꺼정 가야 하는데 가다가 죽을 것 같아서 걸음이 안 걸리오. - 가만 가만 내 소달구지 내 올텐게 여기들 있으라고. 그거 타고 가면 걸아가는 것 보다 백배 나을텐게. - 아이고 저 그래 주시겄소? - 어. 퍼뜩 몰고 나올게. - 아이구 저 몰고 나오시쇼. 내 한 발이라도 앞서 가고 있을 테니껴. - 그 그려. 그렇게 혀. - 아이고 이 날이나 더웁지 말던지. 아이고. - 아이고 저 여편네. 저 헛발질 혀고 있는거 보라고. 마음이 급한께 그냥 제대로 걷지도 못하네. - 아이고 시상에. 사색이 돼가지고. 아 누가 저걸 지 자슥 아니라고 하겄소. - 지 자슥인들 다 저럴까. - 누가 아니래요. - 아이고. 그나저나 아그가 무사혀야 할 거인디. 저 여편네를 봐서라도 말이시. - 금매.
- 참 희안허네. 주사 한 방에 금방 열이 내려뿐게 말이여. - 그려도 안즉 알지 못헌다고 하지 않던게비요. 아침이 돼 봐야 알겄다니께. 아이고 이 미련한것 감기가 폐렴이 됐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 아이 감기 든중 알았는고? - 감기 든중은 알았지만 워디 약 한첩 줄 형편이 되던가요? - 아이고. 없는 사람은 말이시 눈 뻔히 뜨고도 자슥 죽인다고. - 아저씨. 이 자식 잘못되면 어쩌지요? 예? 아그 키울 힘도 없는거이 키워 보겄다고 품어안고 있다가 공연히 아그만 죽이는게 아닌가 모르겄어라. 응? - 아이고. 어째 고런 소릴 하는고. 그런 소리 하지 말라우 거. 갸는 괜찮을 거이여. 가진거 없어 다 버린걸 키우긴 했지만도 자네는 자네 할 도리 다 하지 않았는가. 공연히 자기 맘 들복지 말라고. 그래봐야 아 한티나 자네 한티나 좋을거 없드라고. - 나도 시방 별의별 생각이 다 드요. 아저씨. - 아이고 괜찮겄지. 자네 정성을 봐서라도 하늘이 도울 것이구만. - 아가. 지발. 지발.
- 아효. 박 경장님 아닌게라우? - 아니 그래 저 애긴 어때요. - 나았어라우. 다 나았어라우. - 아니 다 나았다구요? - 야. 하늘이 도와 준 게지요. 며칠 더 있어야 낫겄다고 하더니 이자 걱정 없응께 데불로 가라고 안혀요? - 아이고 정말 다행이구만요. 정말 다행이라구요. 아이고 어디어디어디. - 이자 아가 눈이 또롱또롱 하지요? 예? - 예. 이 눈을 보니께 정말 괜찮은거 같으네요. - 아이구 월매나 신통혀요. 아 그라다가 죽는 아그가 숱하다는디. 이 놈이 그래도 그 고비를 용케 넘겼응께. - 아주머니 정성이 지극 했으니께요. 아니 근데 저 꼬박 이틀을 뜬 눈으로 밝히고도 괜찮은가요? - 아 날아갈 것 같은디요. 시방. - 아이고 거 얼굴이 반쪽이 되셨구만 뭘. - 아이고 아니여라우. 암시랑도 안하라우 난. - 자 아무튼 타시요. 당산에 까정 내 모셔다 드릴 테니께요. 자 뒤에 타시요. - 아니, 일보러 가시는거 아닌가라우? - 병원으로 아주머니 보러가는 길이었지요. 아우 참 저 병원비는 어쨌지요? - 아 금매 시상에 저렇게 고마운 의사 선생님이 또 있겄소? 나가 시방 돈이 없응께 봄 되면 벌어서 갖다 드리겠다고 했더니 아 퍼뜩 그러라고 하시지 않겄소? - 아이구 그래요? - 세상 참 좋은 사람도 많제. 아 어쩌면 얼굴 하나 안 찡그리고 그라실 수가 있겄소. 잉? - 사람이 진정으로 대하면은 통하는 법이요. 그 의사 선생 아무한테나 그런 인심 쓰는 분이 아니오. - 그려요? - 아 가십시다. 가면서 얘기 하자구요. 근데 아주머니. - 아이구 참. - 아 왜그러시오? - 아이구. 나가 아픈 아그 한테 정신이 팔려갖고 집에 두고 온 놈 생각을 못 했네 그려. 아 영일이 한테 잘 보라고 꼼짝말고 지키고 있으라고는 혔는데 얼른 가 봐야 겄소. 아 그것들이 워짜고 있는지. 나 저 뒤꽁무니에 좀 태워 주시겄소? - 아 그러지요. 자 어서 타시오.
- 영일이 어멈 있는가? - 누가 왔나? - 아이구 저 뭐햐? - 아니 자네가 왠일인가. 이 밤중에. 이 외딴델 어떻게 왔어. - 어이. 작은집에 갔다 오는 길이여. - 아 덕산리? - 이이. 작은 엄니가 아프다고 그려서 저녁 먹고 갔다가 이제 가는 길이여. 길이 좀 먼가? - 이왕 늦은거 다리나 좀 쉬었다 가게 언능 와. - 아이구 뭐 올라가긴. 여기 그냥 걸터 앉지 뭐. 애들은 다 자는가벼? - 이이. 다 자. 아 지금 몇 신디. - 아이고 그란디 시방 뭐 하고 있는겨? - 이이. 쌀 한줌 갈고 있어. - 응. 저그 미음 쑬라고? - 이이. 저것들 내일 먹일거. 이자 미음 이라도 먹응께 다 키운거 같으제. - 그려. 다 키웠어. 아 젖만 안 찾아도 다 키운거 같다고. - 없는 젖 달라고 울 때 애하고 어른하고 같이 울더니 그새 울기도 많이 울었지. - 노상 울고 댕겼지 뭐. 아 그려도 자네 그 모자라는 젖이라도 한번씩 얻어 먹였응께 아그들이 젖 맛 이라도 보고 컸제. - 아이고 얻어 먹였나. 뺏어 먹였지. - 하하하하. 그랬던가? 하하하하. - 그랬던가가 뭐여. 순 어거지 였지. - 아들이 젖먹고 싶어 보채면 눈에 뵈는게 없더라고. - 그려도 그 정성을 알아갖고 애들이 큰 탈 없이 컸을껴. - 정성은 무슨 놈의 정성. - 참 그 아그 둘, 자네 호적에 올렸담서? - 호적에 올려놔야 사람 구실 할거 아니여. - 이이. 그렇지. - 사내 자슥은 이행복 이라고 이름을 짓고, 기집아는 이희옥 이라고 지어서 올렸어. - 이행복 이여? 아이고 이름 참 좋네잉. - 박 경장이 지었어. 나처럼 서럽게 살지 말고 행복하게 살라고 행복이라고 지었댜. - 암. 부디 행복하니 살아야 하고 말고. - 나 할 탓이제. 잘 키워서 공부도 시키고 장가도 보내고.
잠든 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는 스르르 꿈에 부풀어 본다. 그 순간에 그녀는 거침없이 행복해 진다. 아이들의 얼굴은 천사같고, 그 얼굴을 들여다 보는 그녀도 평화롭다. 허나 자식이 어디 그 둘 뿐인가. 이제 갓 국민학교를 졸업한 영일과 정식의 장래문제, 서울로 부산으로 흩어져 살 길을 찾아가고 있을 나머지 열 두명의 자식들, 손 길 닿지 않는 곳에 있어 더욱 더 안타까운 모정. 모정에 울고 모정에 웃는 세월이 흐르고 그리고 그녀는 늙어간다.
- 희옥아, 우리 엄마한테 갈래? - 밭에 말이야? - 응. 우리 가보자. - 엄마가 오지 말랬는데. - 엄마가 안 오니까 그렇지. - 엄마 금방 온댔어. 고구마 케 가지고 온댔어. - 어머니. 어머니. - 어, 아저씨 누구야? - 아저씨? 아니 닌 누구냐? - 행복이야. - 난 희옥이고. - 이야. 느그들이구나. 느그들이 이렇게들 컸구나잉. - 아저씨 누군데? - 야 임마, 난 말이여 아저씨가 아니고 성이야 성. 니 성이란 말이라고. - 아. 엄마가 그랬어. 성 많다고. 열 명도 더 된댔어. 그지? - 아니야. 오빠랬어. 오빠. - 난 말이여. 행복이 성아도 되고, 희옥이 오빠도 되고 그러는겨. 아니 근디 어머니 어디 계신감? - 밭에 갔다. 고구마 케러. - 밭에? - 누구여. 거그? - 엄니. 지여라우. 경수 여라우. - 경수? - 엄니. - 아이고. 아이고 내 자슥. 이게 몇 년 만이여.잉? - 꼭 4년 만이여라우. 만 4년. - 아이고. 대장부가 돼서 왔구나. 대장부가 돼아서. - 아 대장부가 됐응께 군대 오라고 영장이 나왔지라. - 영장 나왔다는 편지 받고 오는 길이제? - 예. - 오늘 내일 올 중 알고 기다렸제. 아 그래 기호는 어쩌고 있냐. 같이 올 중 알았는디. - 기호도 조금있음 영장 나올거라우. 그려서 그동안 한푼이라도 더 벌겄다고 오고 싶은걸 꼭 참고 안왔지라. - 기특한 것들. - 저 이거 받으시오. 엄니. - 아 아니 이게 뭬여? 아이고 돈 아니여? - 그동안 모은 것이라우. 기술 배우느라 월급은 몇푼 못 받았어라. 그려서 그것밖에 안 되지라. 엄니 옷이라도 한벌 해 입으시쇼. - 오옷? - 엄니 여태 그 다 헤진 바지 입고 계시네요. 아이 참말로. 하도 기워서 본 바탕이 뭔 색인지도 모르겠어라우. - 아무려면 어떠냐? - 어머니, 참 그새 많이 늙으셨고라우. - 그람. 나이가 있는디. - 조금만 참으시쇼. 군대 갔다 옴사 우리들이 편히 모실게라우. - 내 걱정은 조금치도 허들 마라. 나는 지금도 폈다고. 아 이자 밭에서 곡식도 제법 나제 아 저것들 다 컸제. 그저 너그들 군대나 어서들 갔다 와서 자리잡고 장가가서 아그 낳고 사는거 그거 보는게 소원이여. 근디 아직 자리들이 안 잡혀서 배운거 없어어 느그들이 산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가지고 고생들이지. - 아이 젊은 놈이 그 고생도 안하고 뭣을 하겄어요? 고생도 아니여라우. 엄니 하신 고생에 대함사. 아 참, 상준이는 한번 댕겨갔담서요? - 이이. 지난 설에 왔드라. 오고 싶어서 환장하겠더라나. 근디도 하룻밤 밖에 못 자고 갔어야. - 장사가 된다요? - 안직 고생이지. - 영길이 데리고 갔담서요? - 이이. 정혼 자리가 생겼다믄서. 아이구 참, 너 시장하제? 내 퍼뜩 고구마 삶아줄게. 아 들어가서 옷 벗고 좀 누워야. 차 타고 와서 고단할틴디. 으이고. - 아 왜요. 엄니. - 세월 참 빠르제. 니가 벌써 대장부가 돼서 군대에 간다니. - 뭐 군복입고 옴사 더 듬직 허겠지라우 엄니. - 그려. 그려. 언능 니 군복 입은것 좀 봤으면 좋겄다. 가거든 착실하게 하거라. 잉? - 예. 엄니. - 이구 기특한 것.
- 장미자, 장건일, 김태연, 유근옥, 이기전, 유명숙, 장춘순, 전기병, 홍경화,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제 2회 동아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스물 세번째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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