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스무번 째
- 아이고, 아이고 놈들이 코 앞에 까정 왔는가보다. - 엄마아. - 아이고, 영일아 영일아? - 엄마야. - 영일아 울지마라. 울지마. 괜찮아. 괜찮아. - 무서워. - 괜찮아. 아줌마가 있잖아? 자, 우리 이렇게 이불 뒤집어 쓰고 자자. 자, 이렇게. 눈 감아. 눈.
전쟁을 그렇게 겪고도 또 대포 소리를 들으니께 겉잡을 수 없이 무섭더군요. 무서워서 그 어린 영일이 녀석을 꼭 끌어 안았죠. 그려도 그게 인간이라고 그 녀석이라도 있응께 무서움증이 덜한 것 같더라구요. 시상에 동서남북을 돌아봐도 가까운데에 민가라곤 없는 외딴 토굴에서 나 혼자 있었더라면 얼마나 겁이 났겠어요. 헌디 다음 날 깨보니께 세상이 달라져 있더구만요.
- 아주머니. 아주머니. - 누구요? - 저에요. - 어. 저 가만있어. - 아니, 아니 아침부터 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요? - 아이고 무서워서 그라지. 빨갱이 놈들 들어온거 못봤어? - 먼 발치로 봤어요. 오는데 청아지 서쪽을 쳐다보니께 붉은기를 꽂아놓고 시끌시끌 하더라구요. - 아이고 그라니께. 그라니까 내댕기지 말어. 나댕기지 말고 토굴속에 죽은듯이 엎드려 있으라고. - 허지만 애 때문에. 쌀 한 되박만 빌려줘요. 애가 보리밥은 안 먹어요. - 아이고. 아이고 애를 업고 왔네. - 그럼 어떻게 혼자 놔두고 와요. - 아이고 난리통에 큰 업 만났구마잉. - 쌀이나 꿔 주세요. 어서. 애 배고파요. - 아이고 꼭 지 새끼 위하듯 하네. 아이고. 아이고 웃으니 속은 편다. - 어서 한술 해 먹여서 데리고 읍내로 나가봐야 겠어요. - 읍내엔 왜. - 어젯밤에 곰곰 생각해 보니께 얘 부모들이 울며 불며 찾아 헤메고 댕기는 거 같지 뭐에요. - 그려서. - 아이 그래서는요. 피난민 모이는데 데려다 앉혀놔 봐야죠. 토굴속에 데리고 있으면 찾고 싶어도 못 찾을거 아니에요? - 하지만 이 판국에 함부로 나댕기다 어쩔라 그랴. - 그래도 하는 수 없죠 뭐. 얘 부모들 읍내까지 왔다가 그새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요? - 어이고 오기는 뭘 와. 헤어진지가 사흘이 넘었다는디. - 그래도 가야해요.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 아이고. 아이고 난 모르겄어. 고집대로 혀 봐.
- 아저씨. - 아니 어쩐 일이여. - 혹시 애 찾는 사람 없었어요? - 아 찾긴 누가 찾어? 길거리에 사람도 안 댕기는데. - 정말. 어쩜 이렇게 쥐 죽은 듯 조용하죠? - 함부로 나 댕기다가 다칠려고? 저 근디 여긴 왜 왔어요. - 혹 애 찾는 사람 있거든 장산리로 오라고 해 주세요. - 걘 부모 만나기 틀린거야. - 그래두요. - 알았으니까 어서 가보라고. 조심해서 가우. - 네. - 우리 엄마 없데. 아줌마? - 그래. 아직 안 왔데. 하지만 곧 올거야. 우리 영일이 찾으러. - 흑흑... - 울지마. 울면 엄마 안 와요. - 울면 안 와? - 그럼. 아 아니. - 아줌마 왜그래? - 얘. 얘. 죽었나? 아이고 저 죽진 않았나 본데. 얘. 얘. - ...고파. - 뭐? 배고파? 아이구 원. 영일아 내려라. 아줌마 얘 업고 가야겠다.
그녀는 업었던 아이를 걸리고 쓰러진 아이를 들쳐 업었다. 그리곤 달렸다. 하나를 걸리고 하나를 등에 업고 달리면 얼마나 달렸겠냐만 그녀는 죽어라하고 토굴을 향해 내 달았다. 읍내에서 토굴까지는 근 십리나 되는 길인데. 그녀는 힘든 줄도 모르고 십리길을 내 달았다.
- 어. 이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구나. - 여기가 어디에요? - 그보다 일어나 앉아. 미음부터 좀 먹어야 해. 자, 어서 마셔 봐. - 음. 음. - 어구 그만. 그만 마셔. 그만. - 배고파요. - 허지만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안 돼요. 자,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자, 눕자. 이름이 뭐지? - 정수요. - 몇 살? - 열 살이요. - 집이 어딘데. - 집 없어요. - 집이 없어? - 폭격 맞았단 말이에요. 엄마 아빠도 다 죽고. - 가여운것. - 나 배고파요. 아줌마. - 하지만 더 먹으면 안 돼. 안 돼.
- 아이 뭣이라고? 아 아를 둘 씩이나 줏어 왔다고? - 그러니 어떡해요. 보리라도 두어 되박 꿔 주세요. 내 품일 하게되면 갚을게요. 아저씨. - 아 보리가 있어야 나눠주제. 땅바닥에 묻어놓고 가마니로 덮어 놨는데 놈들이 어떻게 알고 왔는지 고걸 파갔단 말이지. 우리 먹을거 하나도 안 남겨놓고 말이여. - 어쩌면. - 왜놈들만 사람이 아닌 줄 알았더니 빨갱이 놈들은 한술 더 뜨는구만. 한술 더 떠. - 난 그런줄도 모르고. - 살 길이 막막하다. 식구나 작냐. 으이구 이 더런놈의 세상. 왜놈이 겨우 물러나고 나니께 아 요번에는 또 빨갱이 놈들이 길길이 날 뛰고. - 아 아효. - 갈라고 그랴? - 마님 댁에 가 봐야 겠어요. 일 시키실지도 모르니까요. 마님 댁에 일이 있으면 하루이틀 밥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 아 아이 거긴 저 들르지 말어. - 왜요? 아무리 제상이라도 허드렛일 할건 있을거에요. - 아이 고래서 가지 말라는거 아니여. 마님 댁 큰 서방님이 놈들한테 잽혀갔다니께. - 네? - 내일인가 언제 지서 앞에서 인민 재판인가를 한다는 것이여. - 세상에. 그 댁 서방님이 뭘 어쨌다고. - 지주는 다 총살을 시켜야 한데요. 그러니 그 댁에 간들 뭔 소용이 있겄어. - 그렇군요. 정말. - 아 그란디 자네는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가. 혼자 허는 고생도 사서 하더니 아 인자 남의 아들을 둘 씩이나 데려다 놓고 어쩌자는 것이여? - 제가 키우겠어요. - 뭐? 아 무신수로. - 수가 있어서 키우겠다는거 아니에요. 내 칠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도 외롭구요. 혼자 사는게 얼마나 끔찍한지 걔들 데려다 놓고야 알았어요. - 참. 아 그랑께 시집 가랬잖아. 다들. - 그 얘긴 하지 마세요. 제발. - 참 나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시집도 안 가본 여자가 넘의 아들을 키우겄다잉.
- 아줌마. 아줌마. - 어 왜. - 저 아줌마. 빨갱이들이 도망갔데요. - 뭐야? - 어젯밤에 쥐새끼들 마냥 달아났데요. 저기 지주앞에 봐요. 사람들 모인거 보이죠? - 어. 어. 보여. - 왠일인가 싶어 달려가 봤더니 사람들이 좋아가지고 새벽부터 모여든거래요. - 그래. 됐다 이제. 됐어. 정수야, 너 영일이 데리고 놀고 있거라. 아줌마 마을에 가서 먹을거 구해올게. - 영일이 녀석 막 울고 있어요. - 배고파서 그러지. - 자식이 조금만 참으면 될텐데. - 영일인 아직 애기 아니니. 내 얼른 다녀오마. 가서 영일이 달래라.
그런 어느 날, 그 날도 그녀는 왠 종일 마을을 돌며 온갖 허드렛 일을 다 해주고 곡식 약간을 얻어가지고 부지런히 토굴로 돌아왔다. 헌데.
- 영일아. 정수야. 정수 안에 있냐? - 야. 아줌마 왔다. - 어. 들어가자. 춥다. 춥지? - 그래도 토굴 안은 따뜻해요. - 그래. 땅 속이니께 따뜻하지. 하지만 해동 하거든 우리도 움막이라도 좋으니 구들장 놓고 방을 들이자. 어린 것들이 토굴에서 고생이 너무 많아. - 아줌마. - 아 그래 그래. 아구 추운데 들어가자. 우리 영일이 오늘은 안 울었지? - 응. - 아이구 착하기도 하지. - 근데 말이야. 저 안에 누가 있다. - 누가 있다니. 누구냐 정수야. - 지서에 놀러 갔다가 어떤 애랑 같이 왔어요. - 어떤 애? - 지서 앞 다리께에서 막 울고 있잖아요. 거지예요. - 거지? - 그래서 불쌍해서 데리고 왔어요. 아줌마 야단 치실 거에요? - 어디 들어가 보자. - 예. 얘, 일어나 우리 아줌마 오셨어.
그녀는 입이 딱 벌어졌다. 갈갈이 찢긴 옷에 새까맣다 못해 윤이 나는 검은 손과 발.
- 우리 아줌마야. 왜 그러고 있어. 야단 안 쳐. 우리 아줌마. - 그래. 겁 내지 마라. 겁 낼것 없어. - 것 봐. 내가 뭐랬니? 우리 아줌마 얼마나 마음 좋다구. - 배고프니? - 예. - 이름은 뭐지? - 기호요. - 기호.
나는 물 부터 데워서 기호를 말끔히 씻겼습니다. 세상에 씻겨놓고 보니께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어요. 그 어린 나이에 워쩌다 그 지경이 되어서 나한테 까지 왔는지. 그래도 나는 어릴 때 일본 놈들 한테 갖은 수모를 다 받기는 혔어도 배는 안 곯았었지요. 세상 뭐니뭐니 혀도 배고픈 설움보다 더 큰 설움이 있겠어요? 그래서 결심을 했지요. 나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너희들 배는 안 곯리마 하구요. 딴 건 못해도 배 하나만은 채워주고 싶더구만요. 그 조그마한 배, 그걸 못 채워서 우는 애들, 차마 눈 뜨고는 못 보겠더라구요.
그렇게 시작 된 그녀의 고아 사업. 아니, 고아 사업이라고 하면은 그녀는 펄쩍 뛸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들을 무슨 봉사하는 마음으로 보살핀 것이 아니라 혈육의 정으로 끌어 안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호가 오고부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 아니 여보게. - 네? 왜 그러세요. - 아 무슨 일을 그리 숨 넘어가는 사람처럼 급하게 하나? 나 반고랑 멜 사이에 자네는 한 고랑 열짝 다 멨자나잉. - 정말 저 사람 일하는거 보믄. 좀 쉬엄쉬엄 하자고. 목에 단 내가 난다고. 자네 따라 갈려다가. - 천천히들 하세요. 난 이거 끝내놓고 마님 댁 부엌 일 좀 해드리려고 그러니께요. - 에이고. 타고 났어. 타고 나. 아 안 타고 나고야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 어? 지 몸 바스라지는 줄도 모르고. - 어이고. 진작에 고롷게 악착같이 품을 팔았으면 땅을 사다 작게 샀을까. - 아이 누가 아니라요. 나 말이 바로 그 말이라우. - 엄마. 엄마. - 어? 아 영일이 쟤가. - 아이고. 아니 지금 자가 뭐라고 혔제? - 엄마라고 했지안해? - 엄마. - 왜그래. 영일아. - 저 봐. 엄마라고 허잖어? -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엄마 엄마 해요. 글쎄. - 아이고. 고롷게 정성을 바치니께 어린 맘에도 감복이 됐든갑제. - 그런게 말이여. - 엄마. - 왜그래. 천천히 오지 않구. 넘어질라 그래? - 엄마, 또 왔어. 또. - 또 오다니? - 거지가 또 왔단 말이야. - 아이 뭐? 아 거지가 또 와야. - 기호 형이 나가서 두 명이나 데리고 왔다구요. 두 명이나. - 그래? - 어이고. 저러다 김제 떼거지가 다 모여들것네. 다 모여들것어. - 정말이제 보통일이 아니랑께. - 아이구 아주머니들도 참. - 아 뭐하고 있어. 어서가서 내 몰아 부려. 그것들 다 모아다가 어쩔라고 그랴. 잉? - 아 내 몰긴 어디다 내 몰아요? 갈데 올데 없는 애들을. - 아이고 저 말하는 것 좀 보소. - 내 손끝 조금 더 놀리면 돼요. 작으면 작은데로 나눠먹고 지내도록 하죠. 뭐. - 아이고 기가차서 말도 안 나오네잉. 말도 안 나와.
- 자, 이제 그만들 자거라. 어이고 영일이 졸고 있네. - 그래. 그만 자고 내일 놀자. - 여럿이 있으니까 재미있니들? - 네. 엄마. - 그래. -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자전거 소리다. - 어? - 지서에 박 경장이 타고 왔어. 박 경장이. - 박 경장이? 이 밤중에. - 아주머니. 저 좀 봅시다. - 네.
장미자, 장건일, 김태연, 유근옥, 안경진, 양미학, 유해무, 장춘순, 홍경화,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제 2회 동아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스무번재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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