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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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18회 - 삼십년만에 돌아 온 고향
제18회
삼십년만에 돌아 온 고향
1980.05.25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열여덟번째.

- 무슨 생각 하고 있니? 고향에 가는데 왜 그렇게 시무룩하니? 상민이 때문에 그러니?
- 가슴이 떨려.
- 떨려?
- 부모님 만날 생각을 하니까. 두살 때 헤어져서 지금 내 나이 서른 하고도 둘이야.
- 아이 아니 지금 니가 서른 하고도 둘이라고?
- 내가 몇 살 인지도 몰랐수?
- 아이 내 나이도 못 챙기고 살았는데 니가 몇 인지 알도리가 있니.
- 하긴, 그 전쟁터에 끌려다닌게 7년 아니우. 그 판국에 나이 헤아릴 겨를이 있었수? 나도 지금 생각하니까 내 나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 세상에. 청춘이 다 지나갔구나. 그 난리통에.
- 내가 서른 둘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요.
- 참,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나.
- 그래도 살았으니까 고향에도 가잖우? 죽은 사람은 얼마나 수도 없이 죽었어요.
- 그래. 이래 죽고 저래 죽고. 그나저나 상민이가 살아 있어야 할텐데. 그래야 지금이라도 시집장가 가서 살아 볼 텐데.
- 상민이도 서른이 훨씬 넘었겠네. 스물 다섯에 헤어져서 7년을 못 봤으니. 날 잊진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날 까맣게 잊었는데 나만 애가 타는지도 몰라.
- 상민이가 널 잊어? 죽어서도 못 잊을거다. 니가 잊었으면 잊었지.


- 여기가 틀림 없는것 같은데. 그런데 왜 인기척이 없지? 꼭 빈집 같네. 내가 잘못 찾았나? 분명히 여기라고 했는데.
- 뉘세요?
- 네.
- 뉘신데 거기서 기웃거리셔?
- 저, 말씀 좀 여쭤 보겠어요.
- 물어 보구랴.
- 이 집이 저...
- 아니 혹시 화자 아니여?
- 네. 맞아요. 제가 화자에요.
- 그래, 화자. 화자 맞구나.
- 아주머닌 뉘신데 절 아세요?
- 엄마를 고대로 쏙 뺐네. 쏙 뺐어. 어쩌면 그렇게 청승스럽게도 닮았제? 응?
- 내가 엄마를 닮았다구요?
- 그려. 어디갔다 이제와. 일본서 오는 길인감? 어?
- 중국서 오는 길이에요. 저 그보다 우리 어머니 아버진 어디 계세요. 이 집이 우리집 아니에요?
- 찾긴 제대로 찾아 왔는데, 좀 진작 좀 오지 왜 이제서 왔어. 아무튼 들어가자고. 왔으니 들어가야제. 들어가서 얘기 하자고.


- 뭐 뭐 뭐라구요? 다 돌아가셨다구요?
- 그려. 죽었어. 아버지는 술병 들어서 죽고, 니 엄니는 홧병으로 죽고, 글씨 니 오래비 셋이 다 잡혀가지 않았나벼.
- 자 잡혀가다니요.
- 큰 오래비는 일본 탄광에 돈 벌러 간다고 가서 소식이 없고, 둘째 셋째는 징용 가더니 니 삼촌마냥 백골이 되어서 돌아오고, 니 엄니는 사망통지서 연거퍼 받고 펄펄 뛰더니 그만 홧병이 들어서... 니 한테까정 7년째 소식이 없응께 너 마저 죽은 줄 알고. 아이고 세상에. 아이고 조금만 빨리 오제. 니만 왔어도 니 엄닌 안 죽고 살았을건디. 세상에. 니 얼굴 한번 봤으면은 원이 없겠다고 하더니. 아이고, 지질이도 복 없는 여편네. 딸이 살아왔는데. 시상에 두 달만 빨리 왔어도. 니 엄니 산소에 아직 테도 안 입혔느니라. 화자야, 우짜면 좋냐. 응? 삼십년만에 집에 왔는데 이렇게 빈 집이니.
- 흑흑...
- 화자야.
- 엄니, 엄니!
- 아이고, 불쌍한 것. 이게 다 그 썩어죽을 왜놈들 때문이다 왜놈들 때문이여.


정말이지 일제가 남기고 간 상처는 너무도 깊었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 온 고향. 삼십년만에 돌아 온 고향. 그러나 그녀를 반기는 것은 일제가 할퀴고 간 모진 상채기 뿐. 부모 형제 뜨거운 손이 그리워 달려온 피멍 든 가슴. 어찌하여 그 가슴에 또 칼날같은 아픔을 보태는 것인가.

- 화자야. 화자 자냐? 화자야, 미음 좀 쒀 왔다. 일어나서 좀 마셔봐. 먹어야 살제. 자. 아니, 화자야. 에그머니나. 이 몸덩이가 불덩이네 불덩이야. 화자야, 정신 차려라. 화자야. 아이고, 아이고 이거 큰일났네. 큰일났어.


- 화자야, 화자야 정신이 좀 드냐?
- 물.
- 어. 그래. 그래. 자, 마셔라.
- 여기가 어디에요.
- 집이지 어디야.
- 집?
- 아직도 정신이 안드냐?
- 아주머닌 누구세요.
- 아이고, 아이고 야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구먼. 아 생각 안나?
- 무슨...
- 아이고, 아이고 이거 또 초상 나겄네. 초상나. 사흘만에 눈 뜨길래 살아났는가 혔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아이고 세상에...


나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열에 들떠 있었지요. 세상에 바라 볼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지니께 맥이 있는데로 다 떨어져 버렸던가 봐요. 7년을 그 험한 전쟁터로 끌려 다니면서도 용케 버티던 몸인데. 나가 어째 그토록 이를 악 물고 살아왔나 싶은게 살아서 돌아온 내 자신이 우스워 지더라구요. 세상에 반길 사람 하나 없는 고향에 나가 어째서 살아서 돌아가겠어요 어째.


- 화자야.
- 네.
- 니 마음 그래 먹으면 안돼 야. 내가 니 맘을 왜 모르겄냐. 응? 다 알어. 알고 말고. 허지만 이러면 안 되는겨. 자, 날 봐서라도 미음 이거 한 모금 마셔라. 응?
- 생각 없어요 아주머니.
- 그라지 말고 한 모금 마셔. 이 젊은 나이에 어째 그만 살려고 그러냐. 응? 나 인자 더는 이 집 초상은 안 칠란다. 좋아도 이웃사촌 궂어도 이웃사촌이라 내 이 집 초상 여러번 쳤다. 허지만 이자 더는 이 집 초상 안 칠란다. 그랑께 일어나서 미음 한 모금 마셔라. 응? 화자야. 화자야.


- 아이고. 아이고 이게 누구여. 화자 아니여?
- 안녕 하세요. 아주머니.
- 아이고 그래. 이자 살만 한가? 아직도 병색이 안 가셨네.
- 고추가 참 빨갛네요.
- 아 고추야 전라도 고추 아닌가베? 빛갈 좋고 맵고. 그래 어떻게 나왔어?
-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나왔어요.
- 그려. 잘혔어. 이것저것 다 잊어버려. 그래야 살어. 에고,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지.
- 군산 댁 아주머니가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어요.
- 고향 좋다는게 뭐여. 그래서 고향이 좋다는거지. 안 그려?
- 아닌게 아니라 고향 어른들 정 때문에 그 정을 져버리지 못해서 살아났어요.
- 알어. 응. 알고 말고.
- 하지만 막막해요.
- 허기는 빈 손으로 왔다지?
- 네. 빈손으로 와서 이날 이때까지 여러 어른들 신세로 살아가잖아요?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 아닌게 아니라 땅 한 때기가 있나 그 손으로 농사일을 하겠나. 시집이나 가면 모를까. 살아가기가 막막 하겄어. 근디 왜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안 갔제?
- 시집 갈 세가 있었어야죠. 그리고 서커스단에서는 결혼 못해요. 결혼 하려면 서커스단에서 나와야죠.
- 옳아. 그래서 여태 못 갔구만. 그라믄 내가 어디 중신하나 설까나?
- 아니에요. 전 시집은 안 가요.
- 시집을 안 가? 왜?
- 왜는요. 가기 싫으니까 그러죠.
-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는갑다. 내 눈은 못 속여.
- 무슨 말씀을.
- 아니 왜 일어나?

- 어지러워서요. 들어가 눕겠어요.
상민이, 상민이는 정말 어떻게 됐을까. 살았으면은 날 찾아 올 텐데. 꼭 찾아 올 텐데.


고향에 온 지 석달이 되도록 안 나타나는 상민이를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은 아마 그리 애가타게 기다리지만은 안았을거구만요. 헤어진지 7년이라 생각나는 날 보다 잊고 지내는 날이 더 많았지요. 그란디 고향에 와서도 혼자되고 보니께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거머쥔다더니 나는 입이 바싹바싹 마르도록 그 사람을 기다렸지요. 거기다가 그 사람은 나한테는 첫정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나 그 사람은 가을이 가고 겨울이 지나도 오지 않았지요. 살아서 돌아오기만 했으면은 내 고향을 아니께 틀림없이 왔을 겁니다. 그란디도 그 사람은 안 나타났지요.


- 화자 있는가?
- 네. 아주머니. 어서오세요.
- 아이 그게 뭐여? 짐 보따리 아니여?
- 네.
- 어디 가게?
- 떠날까 하구요.
- 떠나다니 어디로?
- 아무데나요.
- 아무데나?
- 여기서 더 살 수는 없잖아요. 신세지는 것도 이젠 면목이 없어서 더 못 지겠구요.
- 그려서.
- 작정이 있어서 떠나는건 아니지만 아무튼 살 길을 찾아야죠.
- 살 길이야 찾아야 겄지만 어디가서 뭘 혀서 살겠다는거야. 작정도 없이. 여자 혼자 몸으로 길 떠나는거 위험혀.
- 하도 떠돌아 다니던 인생이라 겁나는 건 없어요.
- 그라지 말고 시집이나 가지 그려? 전주댁이 중신 선다는데 말이여.
- 시집은 안 가요 아주머니.
- 왜, 정주는데가 있는감?
- 죽었나봐요.
- 저런...
- 살았으면 찾아 올 텐데.
- 그래, 여태 그 사람을 기다렸구만. 그라믄 마음 잡고 이 참에 시집을 가.
- 생각 없어요.
- 그 사람 못 잊어서? 죽은 사람 생각하면 뭐혀. 밥이 생기나 옷이 생기나. 길 떠날 생각 말고 마음 잡어. 그려. 전주댁이 말하는 사람 밥술이나 먹고 인심도 좋은 사람이라니께.
- 말씀은 고맙지만.
- 내 말대로 혀. 눈 딱 감고.
- 아주머니.
- 왜.
-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지요. 어찌 내 입으로 그 말을 합니까. 나가 아이를 못 낳는 몸이라는 걸 말입니다. 나 뿐이 아니고 서커스에 있던 여자들은 아무도 아이를 못 낳았지요. 열여섯만 되면은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아이 못 낳게 수술을 해버리거든요. 하지만은 그게 무슨 수술인지 안 지는 스무살도 훨씬 넘어서야 알았지요. 아이를 밸 수 있으면은 서커스 하는데 지장이 많거든요. 아이를 낳을 수 없어야 시집을 못 가니께 오래오래 붙들고 부려먹을 수도 있고 말이지요. 그려서 그런 사정 아는 사람 아니고는 결혼 할 엄두도 못 냅니다. 상민이야 그런저런 사정을 다 알고도 내게 정을 주었으니께 결혼이란거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요.
나는 그 길로 고향을 등지고 기차를 탔습니다. 숙자 언니를 찾아 갈 참이었지요. 그려도 집을 나서니께 제일 먼저 생각 나는게 숙자 언니 더구만요. 하늘 아래 내가 기댈 데 라곤 예전 서커스단에 있을 때 같이 울고 웃던 사람들 밖에 더 있습니까.


- 여보세요.
- 왜 그러시오?
- 저 여기가 17번지 맞지요?
- 예. 맞아요. 왜 그러시오.
- 저 여기 숙자라는 분 계시죠?
- 숙자?
- 네. 작년에 왔을 텐데요.
- 아, 그여자? 그 여자 없어요 여기. 서울로 간다고 간지가 벌써 여러 달 이오.
- 그래요?


- 장미자, 유근옥, 권희덕, 안경진, 장광,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제 2회 동아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열여덟번째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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