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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17회 - 일본이 망한다구요?
제17회
일본이 망한다구요?
1980.05.23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열일곱번째.


- 죽었나봐. 꼼짝을 안 해.
- 총알을 세 방이나 맞았는데 안 죽어? 자네도 들었지? 우리말 하는거.
- 나도 들었어요. 분명히 우리말이었어요. 생긴것도 우리나라 사람이구요.
- 저쪽에 모여선 여자들도 다 우리나라 사람인가봐.
- 아, 도대체 부두에 저 여자들은 왜 와있는 거지? 또 총은 왜 쏘구.
- 달아나니까 쐈지.
- 왜 달아나.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 아, 죽었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하하하 이 어리석은것들. 야, 얘 끌어다 버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우리는 뭐가 뭔지 몰랐습니다. 그저 가슴이 벌렁거리기만 했지요. 허지만 남쪽으로 갈수록 우리나라 여자들이 더 자주 눈에 띄었고, 우리는 그 여자들이 어째 거기에 오게 됐는지를 알았지요. 어느날인가 중국을 벗어나서 불같이 더운 지방으로 들어서는디.


- 응. 오늘을 저 부대에서 하룻밤 지낼 모양이군. 그런데 왠 군인들이 저렇게 끝도 한도 없이 줄을 지어서 서있다지?
- 어 글쎄. 행렬이 5리도 넘겠지?
- 5리가 뭐야. 십리는 되겠어요.
- 어디 가까이 가게 되면은 한번 물어보자고. 뭘 기다리고 있는것 같애.
- 배급이라도 기다리는 가봐.
- 여자들은 고개 내밀지 말어. 내가 한번 물어볼테니까.
- 여보시오. 군인양반.
- 왜그래. 넌 뭐야.
- 우리는 위문 연회단 인데요. 지금 거기서 뭘 기다리고 있는 거에요? 배급이라도 나옵니까?
- 배급? 아하하하. 그래. 배급은 배급이다. 배급은 배급이지.
- 무슨 배급인데요? 네?
- 여자 배급이다. 여자 배급.
- 여자 배급?
- 그래. 여자 배급이야. 근데 이거 배급품이 모자라서 우리가 이렇게 줄을 서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다. 제기랄. 열명 밖에 없거든.
- 여자가 열명 뿐이라구요?
- 그래. 우리는 일개 중대 병력인데 열명 뿐이야. 제기랄. 조선삐 구경하기도 힘들어. 보낼라면 좀 넉넉히 보내던지. 기다리다 목 빠져 죽겠다.
- 어휴. 아이고 맙소사.
- 일개 중대?


모두들 멍한 얼굴들이다. 분한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멍멍할 뿐. 조센삐, 중일 전쟁 직후부터 2차대전이 끝날 때 까지 수 많은 한국 처녀들을 강제 연행하여 위안부로 만든 일본 궁극주의의 그 범죄적 죄악도 모자라 민족적 멸시까지 곁들여져 불리던 조센삐. 군대 세탁부, 여자 애국 봉사대란 명목아래 기만적 방법으로 증발 돼 전선에 투입 된 우리 여성들의 그 참상. 그러나 그 치욕의 역사도 끝이 나고 있었으니.


- 하는 꼴들이 심상치가 않아.
- 아마 상당히 몰리는 모양이야.
- 아이구 몰리다 마다. 거기다가 군수 물자도 모자라서 아우성 이라잖아. 봐, 남방으로 내려올수록 우리한테 나오는 음식이 다르잖아.
- 그게 어디 밥이야?
- 어머, 저기 봐. 야마모도 놈이 맥이 쭉 빠져서 도로 나오는데?
- 어, 왜 저렇게 기가 팍 죽었지?
- 야마모도 감독님, 왜 그러세요.
- 모두들 도로 중국으로 되돌아간다.
- 중국으로요? 왜요!
- 왜는 왜야. 가라니까 가는거지. 자, 차 도로 돌려.


- 왠일이지? 짐도 못 풀고 도로 돌아가다니.
- 서커스도 구경할 경황이 아닌가보지?
- 그렇게 다급해진건가?
- 아무리 다급해도 서커스 구경에 위안부 여자들은 악착같이 끌고 다니는 놈들인데.


- 이렇게 끝도 한도 없이 차만 타고 다니다가 대포나 맞아서 개죽음 하는거 아닌지 모르겠어.
- 아니 근데 왜 이렇게들 안 돌아 오지. 밥 얻으러 가서 어떻게 된거 아니야?
- 그러게 말이야. 한 시간도 넘었어.
- 밥을 안 주는지도 모르잖아. 일본 옷을 입고 있는데 중국 사람들이 밥을 주겠어?
- 그래 맞어. 줄리가 없어.
- 개새끼들. 저희들은 어떻게 조금씩이라도 배는 채우는 모양이더라.
- 굶긴 마찬가지야. 군대에서 양식을 안 주는데 저희들이 무슨 수로 배를 채워?
- 저희들은 돈이 있잖아.
- 돈 있음 뭘해. 중국 사람들이 일본 놈만 보면 이를 악 무는데.
- 아휴, 그러나 저러나 이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와야 할텐데. 아휴, 말 할 기운도 없어. 발은 부르트고.
- 하, 그러고 보니 트럭이라도 타고 댕길 땐 호강이었어. 그 땐 밥은 제대로 거르지 않고 얻어 먹었잖아.
- 그지가 따로 없어. 우리가 그지때지. 이 난장판에 할 줄 아는 거라곤 서커스 뿐인데. 누가 서커스를 봐줘야 밥을 얻어 먹지.
- 아휴, 아휴 언제쯤이나 상해에 도착할는지.
- 상해에 가면 그래도 밥은 안 굶을거야.
- 상해 가기전에 굶어 죽든지 총 맞아 죽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하겠어.
- 그래. 우리 죽을 날도 코 앞에 왔어.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왜놈 망하는거나 보고 죽어야지. 응? 우리가 누구땜에 죽는데.
- 누가 아니래.
- 또 시작이다. 오늘밤 여기서도 못 자게 됐나봐.
- 아니 근데 이 사람들 정말 어떻게 된거 아니야?


- 바른대로 말 하라고 바른대로.
- 정말 입니다. 우리는 조선사람 입니다.
- 예. 믿어 주십시오.
- 그런데 어디서 중국말을 배웠지.
- 서커스단에 중국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할 줄 압니다.
- 조선 말도 할 수 있어?
- 물론이지요. 조선 사람 인데요.
- 조선 사람이 왜 일본 옷을 입고 있어 그런데.
-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일본 서커스단에 있어서 할 수 없이 입었다고.
- 만약에 너희들 조선 사람이 아니란 증거가 나오면은 당장 때려 죽일 테니까 그렇게 알아 해.
- 예. 예. 죽고 말구요. 죽어도 좋아요. 우리는 절대로 일본 놈이 아니니까요.
- 너희, 모시고 왔어?
- 네.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십쇼.
- 당신 고향이 어디요.
- 아, 아니. 당신 조선사람 아니오.
-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소.
- 아, 예. 충청도 강경이 고향 입니다. 저는 강원도 인제구요.
- 하하하. 반갑소. 이 사람들 풀어주시오. 내 동포요.
- 알았어 해. 알았어.
- 먹을 걸 얻으러 내려왔다구요?
- 예. 선생님 아니었으면 우린 꼼짝없이 죽을 뻔 했습니다.
- 날 따라오시오.


- 뭐라구요? 일본이 망한다구요? 믿어지지가 않아요. 일본이 망한다니.
- 당신들도 전선을 돌아다니면서 보지 않았소.
- 하지만 믿기지가 않아요. 그것도 며칠만 있으면 항복 한다니.
- 내 말 믿으시오. 난 독립군이오.
- 독립군?
- 그렇소. 며칠이오. 며칠.


- 다들 한 가지씩 가졌지?
- 저 이걸 기모노 속에 껴 입으라구요?
- 그래. 그랬다가 여차하면 일본 놈의 옷은 벗어던져. 그래야 살아서 고향에 돌아간다.
- 아무래도 우리가 살아날 팔잔가봐. 거기서 독립군을 만나다니.
- 그 사람 안 만났음 고향에도 못 가보고 맞아 죽을지도 모를걸?
- 항복 할 날이 가까워 온 것도 모르고 말이야.
- 그래.
- 며칠이면 된다고 했죠? 며칠이면.
- 꿈인것만 같애. 며칠이면 해방이래.
- 아이 누가 아니라네?
- 자, 아무튼 정신들 바짝 차리고 어떡하든 상해 까지만 가자. 밤낮없이 걸으면은 갈 수 있을거야 며칠새로.
- 상해로 가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만 들으면 우린 고향으로 가는거야. 난 기차로 압록강을 건널거다. 하루빈으로 가면 고향가는 기차가 있잖아.
- 나도 나도 압록강 건너서.


눈 앞에 고향 산청이 어른거리고 거름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는것 같았지요.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니고 대포소리가 땅을 뒤흔드는데도 왠지 무섭지가 않았어요. 대포소리 총소리가 꼭 일본 망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이 가슴이 후련해 지더구만요. 먹지 못해도 배고픈줄을 모르고 우리는 죽자고 걸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개전초기 약 6개월 동안은 남방 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42년 중반기 부터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점차 퇴폐의 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의 세례를 받고서야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던 것이다.
드디어 다가온 해방의 그 날. 8월 15일 그 날은 우리나라의 해방의 날이기도 했지만 온 아시아 대륙의 해방의 날이기도 했다. 온통 환희의 도가니가 된 그 날의 상해, 우리의 주인공 이화자 여사는 상해에서 그 감격의 해방을 맞이했다.


- 화자야. 화자야. 살다가 이런 날도 다 있니. 응? 이런 날도 다 있어?
- 이게 꿈은 아니겠지? 꿈은 아니야.


참말 꿈이 아닌가 싶었죠. 세상에 살다 살다 그 날 처럼 좋은 날이 또 있겠어요. 그런디도 어찌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던지. 울다가 웃고 웃다가 또 울고, 한 많은 그 기모노 자락을 벗어던져 버리고 우리는 중국 사람들 틈에 휩쓸려서 온 상해 바닥을 헤매고 다녔지요. 내 칠십 평생에 그 날 처럼 좋은 날은 또 없었지요. 그 때 내 나이 서른 이었어요.


- 내 생각 같아선 우리가 다 함께 모여서 하루빈으로 가는게 좋겠어요. 하루빈에서 기차를 탑시다. 그 길이 제일 빠를거라구요.
- 그래요. 하루빈으로 가요. 빨리 떠나요.
- 이제 이 중국땅에 더 있을 까닭도 없고 당장 떠납시다.
- 아니 근데 화자는 왜 그래. 왜 그렇게 기운이 없지?
- 먼저들 떠나세요. 난 뒤에 가겠어요.
- 왜, 다 같이 떠나야지 그게 무슨 소리야.
- 난 찾아 볼 사람이 있어요.
- 어. 상민이 때문에 그러는거지?
- 근데 상민이네 걔들은 어디로 갔는데 이렇게 소식들이 없지?
- 상민이는 필리핀 쪽으로 갔을거야.
- 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야마모도 놈이라도 있어야 알아 볼 텐데. 쥐 새끼 처럼 간데 온데 없이 빠져 달아났으니 어딜가서 누굴 잡고 물어봐.
- 정말이지 언제 빠져 달아났는지 기가 찰 노릇이야.
- 여기서 얼쩡거리다가는 맞아 죽을 것 같거든.
- 어디 가다가 중국 사람들 한테 맞아 죽었는지도 모르지. 맞아 죽어도 싼 놈들이야. 그나저나 갈라진 사람들 소식을 모르니 말이야.
- 좀 기다려 보자구요. 고향으로 가려면 하루빈 아니면 상해로들 모일텐데.
- 아니에요. 어서들 떠나세요. 내 걱정 말고.
- 아니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기로 한 우리들인데 같이 기다려 보자구. 고향이야 며칠 더 있다 가도 늦지 않아요.


그러나 근 열흘을 기다려도 상민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상민이만 안나타나는게 아니라 갈라졌던 사람들 모습은 볼 수가 없었지요. 하긴, 그 넓은 상해 바닥에 어디서 상민이를 찾을 수가 있겠어요. 상해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말이지요. 허지만 나는 갈 만한 데를 다 뒤지고 댕겼지요. 항구에도 가서 기웃거려 보고 기차 정거장, 우리가 공연하던 거리에도 가 보고, 한국 사람이 모이는 데는 빠짐없이 다녀 봤지요. 하지만 허사였습니다.


- 하는 수 없어. 여기서 상민이 찾을 생각은 단념해. 단념하고 그냥 우리랑 같이 고향으로 가자구. 상민이가 니 고향을 아니까 살았으면 그리로 널 찾으러 갈거야.
- 아니야. 나 하루빈에서 며칠 더 기다려 볼래. 내게 신경쓰지 말고 먼저들 가요.
- 어떻게 널 두고 우리만 가니?
- 그래도 난 상민이 찾아야 돼요. 못 찾으면 소식이라도 들어야 해.


하지만은 하루빈에서 보름을 기다려도 나는 상민이 소식조차 못 들었지요. 아무도 만나지 못 한 거에요.


-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만 알고 떠나도 좋을걸.
- 누가 아니래니. 제발 죽지나 말았으면.
- 생사도 모르고 고향가는 기차를 타다니.


- 압록강이래 압록강. 드디어 왔구나. 왔어.



장미자, 양선진, 오세홍, 설영범, 김한진, 이기전, 유명숙, 안경진, 장광, 서지원, 유해무, 전기병,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제 2회 동아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열일곱번째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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