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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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16회 - 가는 곳 마다 기다리는 더러운 손들…
제16회
가는 곳 마다 기다리는 더러운 손들…
1980.05.22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열여섯번째.

- 언니.
- 왜.
- 상민이는 중국쪽으로 갔을까?
- 중국쪽에 있는지 어디로 갔는지 안 보니 알수가 있니.
- 이 놈의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는데.
- 언제 끝나든 끝이야 안나겠니.
- 목숨만 붙어 있으면 언제 만나도 만날거야. 서러워 말어.
- 어쩐지 다신 못 만날거 같애. 어쩐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 못 만나긴 왜 못 만나니. 잠시 떨어져 있는것 뿐인데.
- 그래도. 자꾸만 이게 마지막 인것만 같애. 다신 못 볼것 같애.
- 하긴, 이 어지러운 세상.


- 세워 차! 빨리 빨리 지켜라. 중국 놈들이 또 발사를 시작했다.
- 자, 어서들 내려. 총맞아 죽기전에. 자, 어서.
- 언니.
- 이러다 개죽음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 젠장. 중국 사람들 얼씬도 못한다더니 총만 잘쏘네 그려.
- 일본놈 한테 밀린다잖아.


아닌게 아니라 장계석이 이끄는 국민당은 서방측에 원조를 받아 제2차 대전이 종결돼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버텨 왔는데 중국정복의 전성기에도 일본은 중국을 일본군 주둔지로 삼거나 상해, 북경등 대도시를 지배하는데 끝났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게릴라의 공격을 받기 쉬운 철로를 장악했으나 도로망을 벗어나면 고립 상태에 빠져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러한 상황에 있는 그 중국땅에 위문 공연차 들어간 화자의 일행.


- 어휴. 아휴, 난 죽는 줄 알았어.
- 우리 영웅들이 있는데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호들갑이야 호들갑이.
- 어이고. 총소리 나니까 죽어라고 내 옆구리 파고든건 누군데 저런소릴 해?
- 자자, 어서 차에들 올라가.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해야 공연을 한다고.
- 공연은 어디가서 하는겁니까.
- 네 놈들은 알거 없어. 어서 타기나 해.


인도 차이나 쪽으로 간다던 일행은 그러나 트럭을 타고 중국 바닥을 누비고 있었다. 모르긴해도 가는길이 따로 없고, 가다가 군대 주둔한 곳에서 공연을 하고 또 가다가 군대가 있으면 천막을 치고, 그렇게 해서 인도차이나 쪽으로 가는 그런 여행이었다. 헌데 첫 공연이 있는 날.


- 야, 하나꼬.
- 네. 감독님.
- 야, 하나꼬. 너 무대 한번 더 나가겠다. 군인들이 너 나오라고 아우성이다.
- 날요?
- 하나꼬, 니가 최고로 인기야. 어서 나가거라. 안나가면 다들 그냥 있을것 같지가 않아. 어서 그냥 나가. 응?
- 나가서 뭘해요.
- 뭐든 해. 춤을 추든지 노래를 부르든지. 응? 자, 어서.


참말이지 일본군들은 죽것다고 난리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에 찌들대로 찌들었는디 난데없이 서커스가 들어와서 아 여자들이 묘기를 부리는데 안그러것어요. 하지만 난 조금치도 즐겁지가 않았지요. 그저 겁만 났구만요. 그런디 그날 밤이었지요.


- 아효, 저 놈의 대포소리.
- 대포소린 그만두고 모기라도 좀 없었으면 좋겠다. 아 어떻게 물어대는지 잘 수가 없어.
- 일본 애들하고 섞여서 댕기니까 한가지 걱정은 덜었는데 정말이지 이렇게 덥고 모기가 많다니.
- 아효, 참.
- 하나꼬. 하나꼬. 하나꼬 자냐?
- 아니, 이게 누구니?
- 야마모도 놈 아니야?
- 그래.
- 하나꼬, 하나꼬.
- 언니, 나 배가 아파서 못 일어난다고 그래. 아무래도 수상해.
-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어서 앓는 소리나 해라.
- 하나꼬. 하나꼬 자?
- 아이고 배야. 아효.
- 누 누구세요?
- 하나꼬 좀 나오라고 해라.
- 하나꼬 지금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하는데요. 글쎄 자다가 감독님 소리에 놀라서 깨보니까 하나꼬가.
- 휘장 좀 들춰봐.
- 아, 예.
- 아효 아효 배야.
- 아니, 갑자기 어디가 아파서 그러지?
- 아마 위장이 탈이 났나봐요. 가슴이 아프데요.
- 이거 큰일 났구나. 중대장님이 하나꼬 한테 선물을 주고 싶다고 데리고 오라고 하는데 이거 큰일났는데.
- 선물이고 뭐고 약이나 좀 얻어다 달라구요. 하나꼬 죽겠어요.
- 어디가 아프다고 했지?
- 위장이요. 위장이 아프다구요.
- 아 저 알았어.
- 아휴... 하지만 아직 안심 못해 밤이 길어서. 다 골아 떨어질때까지 아퍼야 되겠다 얘.
- 아휴, 지겨워. 지겨워 정말.


참말로 지겨웠지요. 가는 곳 마다 뭔 그리도 많은 더러운 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지. 허긴 그게 다 젊고 반반한 얼굴 때문이었지만서두요.


- 아휴, 첫 고비는 그럭저럭 넘겼는데 말이야.
- 야마모도 저 놈 정말 날 그 중대장 놈 한테 넘길 생각이었나보지?
- 그지. 지가 무슨 힘이 있겠어. 우리 한테나 큰소리 치지 중대장들 한테 꼼짝이나 하겠니?
- 하긴.
- 아휴, 잘난것도 죄다 죄야.
- 여자로 태어난게 죄지 뭐.
- 이제 어쩔거니? 가는데 마다 이 난리 안 친단 보장이 없잖아.
- 아이고, 모르겠어. 지쳤어. 밤에 한 숨도 못자고.
- 나도 그래. 이 뜨거운 날 눈만 뜨면 트럭에 실려 댕기면서 아이고 이게 무슨 팔잔지.


날만 새면 덜컹거리는 트럭에 실려 길을 떠나고 밤이면 또 분 바르고 무대에 서는 고달픈 여행길. 그러나 그건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면 갈 수록 날씨는 불에 덴것 처럼 뜨거워지고 전쟁은 더 치열했다.


- 어, 아니 왜 갑자기 차가 서지?
- 아니 또 싸움하나?
- 다들 내려라. 전투가 시작됐단다.
- 내리자구.
- 다 흩어져요. 흩어져서 숨으라고. 나무 밑이건 어디건 흩어져서 숨어요 어서.
- 이리로 와요. 이리로. 자, 이리로. 엎드려. 고개들지 말고 엎드리라고. 언제 어디서 날아들어올지 모른다고.
- 어 엄니.
- 지금 엄니 찾을 때 아니에요. 정신 바짝 차려야 개죽음 안해.


- 아휴, 이제 끝나나 보다.
- 아휴, 죽는 줄 알았네. 아휴, 내 머리위로 총알이 핑핑 날더라고.
- 화자야, 괜찮니?
- 네.
- 아니, 어? 왜?
- 어...
- 저길 봐. 일본군이야. 총 맞았나봐. 아직 안죽었나본데. 가볼까?
- 놔 둬.
- 여보시오. 여보시오.
- 아니, 우리나라 사람 아니야?
- 분명히 우리 말이었지? 가보자.
- 그래.
- 여보시오. 여보세요. 정신 차려요.
- 물... 물 좀...
- 어? 물?
- 물. 물.
- 물은 안 돼. 총을 맞았어. 지혈부터 시켜야 돼. 뭐 묶을거 없어?
- 어. 내 셔스. 자 어서 묶어.
- 물 좀... 물...
- 물은 안돼요. 물 먹으면 죽어요.
- 졸지 말고 눈을 떠요. 눈을 떠.
- 당신들은 왠 사람들이요.
- 우리는 서커스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보다 일본군에 우리 조선 사람들이 많소?
- 끄 끌려왔지요. 수도 없이.
- 수도 없이?
- 난 틀렸소. 물이나 한모금 먹고 죽게 해주시오.


땀과 피에 젖은 초라한 군복에 쌓인 그의 깡마른 몸둥이 그는 대체 누구를 위해 싸웠으며 누구를 위해 죽어가는 것인가.


- 물... 물 좀...
- 물을 줍시다. 원이나 없게 물을 주자구요. 네?
- 그래. 물이나 줍시다.
- 여기 여기 물 있어요. 신발에다가 퍼 왔어요. 자요, 물.
- 고맙소.
- 끌려오긴 언제 끌려왔소.
- 작년에. 당신들은 여기 왜 왔소.
- 우리도 끌려온 몸들이오.
- 도망들 가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다 죽는다고. 가...
- 여보세요. 여보세요. 죽었어.
- 야, 니네 거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아니.
- 고향이 어딘지나 물어볼걸.
- 이 새끼들이. 지금 죽은 군인을 둘러싸고 대체 뭣들하고 있는거지. 응?
- 좀 잠자코 있어 이 놈아!
- 아니, 뭐 뭐?
- 고향에 있는 내 동생들도 이렇게 끌려와서 다 죽는거 아닌지 모르겠다. 다 죽는거 아닌지...
- 아 나도 고향에 오빠가 셋이나 있는데. 아휴...
- 아니, 새끼들이 후퇴한줄 알았더니 또 몰려오네.
- 어, 붙어!


- 이제 여기서 진을 친 모양이지?
- 아휴, 그런가 보다. 여기도 우리나라 사람 있을까?
- 여기라고 없겠어? 험한데로 갈수록 더 많겠지.
- 아니, 어서 내리지 않고 뭣들하고 있는거야. 어? 이것들이 오늘 눈에 뵈는게 없는 모양이군.
- 닥쳐라! 이 놈아. 여차하면은 네 놈 목 비틀어 버리고 나도 죽을거다. 죽으면 그만이지 새끼야.
- 야, 너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어. 어디서 조선말을 함부로 지껄이는거야. 맛 좀 볼래?
- 이...
- 왜이래. 잘 참다가. 건드리면 손해야. 잠자코 내려.


아닌게 아니라 이판사판 끝장을 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더구만요. 고달픈 몸에 우리나라 사람이 짚불 잦아지들 죽어가는거를우리 두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께 야마모도 같은 놈은 눈에 보이질 않더라구요.


- 야야야야 서둘러. 해가 지고있다. 해가 지기 전에 문이 다 돼야 돼.
- 우리가 뭐 쇠뭉친줄 알아? 아니 숨 돌릴 틈도 안 주네. 어? 아니 저게 뭐지?
- 뭐.
- 저기 봐.
- 아니, 여자들 아니야? 어?
- 그래. 여자들이야. 그것도 수십명이야.
- 아니, 군대에 무슨 여자들이지?
- 위안부들이지 뭐.
- 위안부?
- 위안부까지 있는 부대라서 그런지 크다 크긴.
- 아니.
- 왜.
- 아니, 저 여자들 자세히 봐.
- 왜?
- 중국 여자들 같지가 않어. 일본 여잔 더더욱 아니고.
- 글쎄.
- 혹시 우리나라 여자들 아닐까?
- 우리나라 여자?
- 봐. 자세히. 맞어. 우리나라 여자들 같다.
- 틀림없지? 아니 하지만 여기가 어딘데.


바로 그 때였다. 느닷없이 모여섰던 여자들중의 하나가 화자네 천막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훈련이 계속되고 있을 뿐, 넓은 무대 안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 이리로 오잖아. 어?
- 글쎄. 꼭 도망 오는거 같은데?
- 얘는. 대낮에 군인들이 저기 저렇게 있는데 어떻게 도망을 가니 바보 아닌 다음에야.
- 하지만 군인들 아직 아무도 못보고 있잖아.
- 우리한테로 온다.


헌데.


- 야, 서라 서!
- 어머나. 보초가 봤어. 저 꼭대기에 선 보초가.
- 서라! 서! 서라! 안 서냐! 안 서면 쏜다!
- 아니!


장미자, 양성진, 유민석, 오세홍, 설영범, 유명숙, 안경진, 정경애, 장광, 서지원, 이효숙,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제2회 동아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열여섯번째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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