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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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14회 - 일본군에 끌려간 여자 셋
제14회
일본군에 끌려간 여자 셋
1980.05.20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열네번째.

- 어휴. 어휴 떨려. 담요나 뒤집어 쓰고 자면 몰라도 못 견디겠는데. 점점 더 추워져.
- 지금 몇 시나 됐을까.
- 깊었을거야. 다들 자빠져 자겠지 이제.
- 알 수가 있나.
- 잠도 못자고 이 추운데 그 계집을 잡으러 다니다니 참 드러운 인간들이야. 아, 추워.
- 우리 교대로 자는게 어때? 침대 서너개 펴가지고.
- 그러든지 해야지. 추워서 더 못 견디겠네. 아 진작 그럴걸 잘못했어.
- 가만 이게 무슨 소리야.
- 놈들 발자국 소린데?
- 이리로 오는거지? 그렇지?
- 맞어. 이리로 와. 창남이 담뱃불 꺼.
- 어.

- 제말 좀 들어주십시오. 일등병 님.
- 아니, 무슨 말을 들으라고 자꾸 이렇게 보채는거지. 응?

- 어. 야마모도 목소리 아니야?
- 맞어. 야마모도야.
- 저 저자식이 왜.

- 자꾸 왜 귀찮게 구느냔 말이야. 어?
-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고충이 이만저만 해야죠.
- 도대체 자네 그 고충이란게 뭐야.
- 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조센진 계집들은 원채 독한 년들이라서 건드리기만 하면은 혓바닥을 깨물고 죽거나 강에 빠져 죽어버린다니까요. 저 그러면 우리는 장사는 커녕 위문공연 다니는데도 지장이 많아요. 인원이 모자라거든요. 두 패로 갈랐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 제발 뭐야. 계속 해 봐.
- 제발 조센진 계집은 손대지 말라는 부탁 입니다. 네.
- 으하하하하하.

- 아니. 야마모도 저 놈이 그래도.
- 다 지 잇속 때문에 저러는건데 뭐.
- 아 어쨌거나 우리 한테는 좋은 일은 아니겠어?
- 어?

- 하하하하. 계집이란 말이야 그렇게 독한게 더 감칠맛이 나는 법이야.
- 아 저 하지만.
- 저리 비켜! 자꾸 엉겨 붙으면 재미 없는 줄 알어. 어이! 가서 쓸만한 것 몇 년 끌어 내.

- 아 어쩌지? 안 열린다고 그냥 물러날 놈들 같지가 않아.
- 쉿! 죽은 듯 엎드려 있자구.

- 아니, 이게 꿈쩍을 안하네. 뭘로 막어놨는데.
- 막어놔?
- 역시 그렇다면. 좋아. 니뽄도로 천막을 찢어버려!

- 아이고 이를 어째.

- 으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 상민아, 상민아.
- 왜.
- 누구누구 잡혀갔니. 응?
- 나 말하고 싶지 않아.
- 아휴.
- 잠이나 자. 그 모양 해갖고 남의 걱정 말고.
- 그게 왜 남의 일이니.
- 그래. 남의 일이 아니지. 아휴 이 갈아마셔도 분이 안 풀릴 놈들. 난 그래도 그렇게 무작정 끌어갈 줄은 몰랐다. 문을 막아 놓으면 그냥 물러갈 줄 알았어. 우리들 몰래 끌고갈 줄 알았다구.
- 그것들이 눈에 보이는게 있니?
- 아휴 씨 나쁜 놈들.


- 하늘하고 땅하고 딱 붙어버렸으면 좋겠다. 딱 붙어버렸음 좋겠어.


모두들 뜬 눈으로 밤을 밝혔지요. 허구헌날 왜놈들한테 당하고 살았지만서도 그날처럼 억울하고 살이 떨리는 날이 또 있었을까요. 참말로 한 세상 사는일이 어찌 그리도 험악하던지요.

그 날 새벽 끌려갔던 여자 셋은 비틀거리며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돌아온 그녀들이나 그녀들을 맞는 동포들이나 한결같이 벙어리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굳게 감고 천막을 치는 만주의 바람소리만 듣고 있었다. 입이 있은들 입이 열려지며 말이 있은들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 하루 더 있을거라더니 왜 갑자기 떠나는거지?
- 몰라서 그러냐? 하루 더 있다가 오늘밤 또 어떤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야마모도가 손을 쓴거야.
- 손을 쓰면 뭐하니? 지금 가는데가 또 일본 군대 일텐데 거기나 여기나 매 일반 아니겠어?
-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전쟁을 할려면 저희들이나 하지 왜 우리까지 끌어드려갖고.
- 무슨 수가 없을까?
- 우리한테 무슨 수가 있겠니?
- 하지만 가는데마다 당할 순 없잖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 군대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야해. 일본 군인들하고 같이 붙어 있지는 말아야 한다고.
- 좋아. 야마모도 놈하고 얘길 좀 해보자. 제 놈도 제 꿍꿍이 속이 있으니까 통할지 모르지.
- 하지만 언제 얘기하지? 이러다 부두에 도착해버리면 그만 아니야.
- 아니, 순례 왜그러니?
- 어 어지러워요.
- 아니.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구나.
- 아저씨, 자리 좀 바꿔 앉아요. 여긴 답답해요.
- 아 그냥 거기있어. 여기는 바람이 많이 불어요. 차 꽁무니라서.
- 그러니까 바꿔 앉자는 거에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아저씨가.
- 여긴 추워.
- 알아요.
- 아니, 순례야.
- 말시키지 마세요. 어지러워요. 답답하구요.
- 잊어버려라. 그래야 산다.
- 흑흑...
- 잘 참는것 같더니 왜그래. 눈 딱 감고 잊어. 한 세상 살자면 별의 별 일이 많은거야. 그래도 살고 봐야지.
- 살고 보면 뭘해요. 이러고도 살면 뭘해요.
- 순례야 왜 이러니.
- 놔요. 놔요.
- 아니, 순례야!


- 어떻겠어요. 살 수 있어요?
- 못 살겠어요? 예?
- 살려주세요. 이 불쌍한 아이를 살려달라구요.
- 대답 좀 해주세요. 살 수 있나요?
-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왔어도. 이 참.
- 가망 없나요?
- 숨 넘어가고 있어 해.
- 뭐라구요? 순례야.
- 죽었어.
- 으흐흐흑.... 순례야.


꽃다운 나이 열 아홉. 하얀 눈 위에 뿌린 선홍의 피. 그 맑고 뜨거운 우리의 피. 순례의 피.

피가 그렇게 붉은 줄은 난 그 때 처음 알았어요. 온 세상이 온통 하얀 눈에 덮여 있어서 그런지 몰랐습니다. 하얀 눈 위에 새빨간 피를 쏟으며 죽은 순례의 모습, 시방도 눈에 선하구만요. 세상에 부모 형제 다 어디두고 만주 땅 그 추운 산 속에.


- 순례야.
- 순례야.
- 세상에. 호강하다 죽어도 원통한 나인데 눈물에 밥을 말아먹고 자라서 이렇게 죽다니 순례야.
- 이 바보야. 죽긴 왜 죽어. 죽기는 왜 죽어. 왜놈 망하는 꼴이나 보고 죽던가. 왜 죽긴 왜 죽어.
- 언니야, 우리도 그만 죽어버리자. 우리 다 그만 여기서 죽어버리자고. 죽어.


부모 형제가 죽어도 그토록 서러웠을까. 부모 형제와 떨어져 살아 온 그들은 동포끼리 추운 손을 맞 비비며 살아왔기에 동료가 곧 부모요 형제였다. 어디 부모 형제가 따로 있던가. 얼어붙은 땅을 파헤쳐 갈갈이 찢긴 순례의 영혼을 묻고 돌아서는 그들의 가슴이 피멍이 들었다.


- 하지만 우리는 살아야 된다. 악착같이 살아야 돼. 악착같이 살아서 우리 두 눈으로 왜놈들 망하는 꼴을 꼭 봐야 돼. 그 꼴 보기 전에는 절대로 죽지 못한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정자, 순례 몫까지 다 받아야지. 하늘이 있다면 정말로 하늘이 있다면 왜놈들을 그냥 두지는 않을거다. 그러니까 우리 악착같이 살자고.
- 그래. 악착같이 살자. 죽지말고 살자고. 순례보다 더한 수모를 받아도 절대로 죽지 말자고. 죽으면 끝이야. 살아야 원수를 갚지.
- 그러니까 화자도 그렇게 자꾸 울지마. 자꾸 울면 다친데 덧나서 고생만 더한다.
- 허긴 화자는 다친덕에 그 더러운 꼴은 면했지. 안 다쳤어봐라 그 인물에 그놈들 눈에 안 띄었을라고.


아닌게 아니라 다친 덕분에 나는 순례 꼴이 안 돼었는지 모릅니다. 머리를 온통 붕대로 감고 있으니 손 댈 생각을 못한 거지요. 그러고보면 나는 아직 죽으라는 팔자가 아니었던가 봅니다. 머리 상처는 만주를 떠날 때 까진 낫질 않아서 나는 위험한 고비 하나를 또 간신히 넘겼지요.


- 드디어 일본 이구나.
- 일본에 돌아오는게 좋니 넌?
- 일본에 오는게 좋은게 아니라 만주에서 벗어나는게 좋은거야. 넌 만주 진저리도 안나니?
- 왜 아니야.
- 참 진저리 나는 몇 달 이었다.


만주사변이 한창일 때 차출되서 사변이 끝나고 일본에 괴래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끌려다닌 위문 공연, 길고도 험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더 기막힌 전쟁의 소용돌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줄은 꿈에도 모르는 그들, 그들은 그저 그 험한 여행에서 벗어난 것만 다행으로 알고 있었다.


- 상민아.
- 왜.
- 내 이마에 이 상처 아주 보기 흉하니?
- 흉하긴. 머리로 가리고 있는데 보이기나 해? 왜그래? 상처 같은거 신경도 쓰지 않더니만 갑자기 왜그러지? 이제서야 조금 살고싶어지는 모양이구나?
- 넌 어쩜 내 맘을 그렇게 잘 아니.
- 난 니가 찡그리기만 해도 뭣땜에 그러는지 다 알아.
- 뭐?
- 왜, 거짓말 같으니? 내가 널 쳐다보기 시작한게 벌써 4년이야. 4년이 짧은 세월은 아니잖아? 정철이 형이 있을 때 부터 난 널 쳐다봤어.
- 정철 아저씨 얘긴 하지마. 잊고 싶어서 그래.
- 화자야. 화자야.
- 손이 왜 이렇게 뜨겁지.
- 화자야, 화자야!
- 어, 어.
- 거기서 뭐하니? 내릴 준비 해야지.
- 알았어요.
- 그만 내려가. 안 내려 갈거야?
- 그냥 한 없이 배만 탔으면 좋겠다 화자야.
- 그래. 배타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니까.
- 내려가자. 안 내릴 도리 있니?
- 언제나 우린 우리 발로 우리 마음 가는데로 훨훨 날아다닐수가 있을까.
-꿈에서나 날아다니는거지 뭐.


- 언니, 이 상채기 안 보이지?
- 화장 했는데 보이니? 게다가 가까이서 보는것도 아닌데 걱정마. 그 상처땜에 손해보는 일은 없으니까. 요새 너 최고로 인기 아니니.
- 하나꼬, 준비 됐지?
- 네. 됐어요.
- 니가 인기가 좋으니까 놈들은 말할것도 없이 일본년들도 널 함부로 하지 못하는거 같애. 저길 봐. 힐끔거리며 널 바라보는 누초리들 질투가 나서 죽겠는가봐.
- 야, 지금 너희들 우리보고 뭐라고 지껄이고들 있어. 어?
- 다리가 아주 쭉 빠져서 부럽다고 했다 왜!
- 그래?
- 화자야, 어서 나가라. 저것들은 내가 상대할 테니까.
- 하나꼬.
- 네. 나가요.


장미자, 양성진, 장건일, 유민석, 오세홍, 설영범, 김환진, 이기전, 유명숙, 안경진, 정경애, 장광, 신성호, 서지원, 유해무, 전기병, 이효숙,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제2회 동아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열네번째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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