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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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13회 - 공연도중 실수로 부상을 당하는데…
제13회
공연도중 실수로 부상을 당하는데…
1980.05.19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열 세번째

(바람소리)
- 이거 얼어들 죽겠다.
- 입이 얼어서 말도 잘 안나오네. 이것들이 어디로 가는데 이렇게 끝도 한도없이 가는 것이래.
- 글쎄. 산골로 산골로 한도없어 가기만 하지 이 놈의 만주 날씨 왜 이렇게 끔찍하게 춥지?
- 이대로 한시간만 더 가면 다들 얼어 죽고 말겠어. 야마모토 그 놈을 어디있어 도대체?
- 그 놈들이야 뚜껑있는 차에 앉아서 타고 가는데 추운 줄이야 알겠어?
- 짜식들. 끌고 가려거든 담요나 좀 넉넉하게 주지. 아휴....

- 아휴. 아휴. 이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구나. 세상에 눈알이 아물아물 하더니만.
- 살다 살다 나 오늘처럼 떨긴 처음이다 처음.
- 한 시간만 더 가면은 영락없이 죽겠더구만.
- 아니 근데 여기가 대체 어디래요?
- 내가 아나 자네가 아나.

살을 에이는 것 같은 북극의 겨울 밤. 겹겹이 둘러싸인 산기슭에 엎드린 몇개의 군용 캠프. 하루해를 꼬박 모진 추위에 시달리며 트럭에 실려 온 그들은 거기가 어딘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보이는 것은 온통 산이요. 눈이요. 군인들 뿐인데. 동서를 분간 못하는 한 쪽 산기시슭에 만주인들의 마을인지 조그만 마을이 하나 있어 불빛이 반짝거리고 그리고는 또 온통 어둠이었다.

- 언니. 자요?
- 자긴.
- 하늘 아래 우리만 뎅그라니 있는 것 같애.
- 누가 아니라니. 저 놈의 바람소리 때문에 더 미치겠다.
- 군인들 소리도 안 들리고 쥐 죽은것 같은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 이럴땐 차라리 공연이나 하는게 좋은데.
- 밤에 도착했는데 무대도 안 만들고 어떻게 공연을 해.
- 아무튼. 기분 나쁜 밤이야. 이런 산골 이렇게 추운 밤도 처음이고...


1931년 5월에 시작된 만주사변. 중국의 북방 외곽에 위치한 만주는 일본에게는 특히나 유혹적인 침략대상이었다. 만주에는 다량의 석탄과 철의 자원이 있을 뿐더러 이미 식민지가 된 우리 한국과도 인접하고 있는 데다가 중국의 정치 구조 속에 완전히 흡수된 일도 없었던 탓으로 조금만 움직이면 자기네 손아귀에 굴러 들어올 것이여서 침략의 손을 뻗쳤고 이듬해인 1932년에는 드디어 만주를 일본의 괴뢰국가로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1931년의 만주사변은 세계 제2차대전의 시작을 예보하는 불씨중의 하나가 됐다. 그리고 만주사변에서 부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우리의 주인공 이화자여사는 1945년 2차대전이 종결될때 까지 처절한 전쟁의 밑바닥을 가장 처절하게 치룬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헌데 두번째 위문공연지인 그 만주 어느 산 속에서의 첫 날밤.


- 이게 무슨 소리니?
- 글쎄.
-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 아니 당신 누구요?
- 중국여자 아니야?
-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사색이 된 얼굴에 갈갈이 찢긴 옷을 입고 우리 단원들의 천막속으로 구르듯 뛰어든 중국 소녀.

- 아니. 무슨일이요.
- 숨겨주세요. 일본군이 잡으러 와요. 놈들이 와요. 살려주세요.
- 어서 이쪽으로 와요. 이쪽 짐들뒤에 숨어요. 어서.
- 자. 우리는 얼른 자는 척 하자고. 자 어서들 누워.
- 네.

- 야. 여기 중국계집에 하나 안 들어왔어? 틀림없이 이쪽으로 뛰었어. 여기로 들어왔을거야. 야. 다들 일어나. 다들 일어나라 이 조센진들아. 너희들은 어서 침대 밑이랑 샅샅이 뒤져 봐. 너희들 중국 계집에 못 봤어?
- 어휴. 못 봤는데요. 피곤해새 전부들 녹아 떨어졌는데 어떻게 알아요?
- 침대 밑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 짐짝들 다 뒤져봐. 틀림없이 여기있어.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단 말이야. 지가 뛰면 어디로 뛸거야.
- 이야.
- 잡았어?
- 살려주세요.
- 이리 나와!
- 이리 끌고 나와!
- 음. 니가 뛰면 어디로 갈거라고 뛰냐 뛰길. 이게 아직 뜨거운 맛을 못 봐서 이래.
- 아흑.
- 이래도 앙탈을 부릴꺼냐
- 아아흑
- 어떠냐. 너희들.
- 하하하. 경치 한 번 좋습니다. 좋아요. 아주 제대로 잡아왔는데요.
- 오늘 잔치는 제법 푸짐하겠지? 다 벗겨 놓으니까 오동통한게 쓸만하지? 응?
- 어서 가시죠. 헤헤헤헤. 역시 ...님 눈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 계집보는 눈은 날 못 따른다구. 아무도. 자 가자. 자 가. 오늘밤 호강시켜 준다는데 왠 앙탈이냐. 앙탈이. 자 와.
- 엄마~
- 뭘 구경하고 있어 잠이나 쳐 자 이것들아.
- 세상에. 저런 개같은 놈들이.
- 마을에서 끌고 온 여잔가 보지?
- 개는 어딜가도 개야.
- 세상에 이 많으 사람들 앞에서 옷을 홀랑 다 벗기다니. 중국놈들은 대체 뭘하고 자빠졌길래 저 여자가 저지경이 되는 것도 모르고.
- 알면 어쩌게요. 땅 뺏기고 무슨 힘이 있어서 저놈들을 대적해요.
- 아무래도 우리가 호랑이 굴에 들어온것 같애.
- 그런 또 무슨 소리야.
- 마을까지 뭐하러 가겠어요. 바로 여기 우리 여자들이 이렇게 있는데.
- 어. 그걸 미쳐 몰랐구나.
- 듣고 보니 그렇구먼. 이 일을 어쩌지 응? 이 일을 어째.

그러나 우리한테 무슨 묘안이 있었겄어요. 우리는 그저 서로의 얼굴들만 멀건히 바라봤죠. 참말로 암담했구만요.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건 무슨일을 하건 뭐하나 제대로 간직할 수도 없고 뭐하나 제대로 이룰수가 없더구만요. 우리는 그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지새웠지요. 그랬는디...

- 야. 상민이 준비됐지?
- 네 됐습니다
- 그럼 막을 올려라.
- 네
(휘파람소리)

- 상민이 나가.
- 화자야.
- 다음이 내 차례지?
- 안색이 그래 가지고 되겠니?
- 걱정마 해낼수 있어.
- 사람이 우리들뿐이니 빠질수도 없고. 도대체 정철씨하고 헤어지고 나서 이 날 이 때까지 먹기를 했나 자기를 했나.
- 그래도 정신은 말짱해. 줄사다리 타고 그네뛰는 것 쯤 눈감고도 할 수 있어 이제.
- 그야 그렇지만.
- 언니. 상민이 춤 추는것 좀 봐. 잘 추지? 정철아저씨보다는 못 추지만 어점 저렇게 몸이 가벼운지 몰라?
- 펄펄 뛸 나이 아니니. 이제 열 아홉인데 오죽 하겠니?
- 정철아저씨도 예전에 저랬었는데. 불춤 출 땐 사람이 아닌 것 같앴는데. 흑.
- 또.
- 지금쯤 어디서 어떻하고 있을까?
- 그런거 생각하지 말고 신발끈이나 바짝 조여. 아 저 상민이 끝나는가 보다.
- 흑
- 화자야.

- 하나꼬. 대기해라.
- 네. 대기해요.
- 어서나가.
- 알았어.
- 눈물 딱고.

(휘파람소리)

군인들은 죽것다고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눈에 안 보였지요. 눈물을 닦고 무대에 나갔는데도 사다리를 기어오르니께 다시 눈물이 나기 시작했지요. 게다가 자꾸만 정철아저씨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천장에 메달은 그네를 타면서도 나가 시방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더랬지요.

- 이야. 볼 만 하구나. 아하하.

군인들의 야유소리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힘껏 타고 있던 그네를 발로 밀어내면서 무대 끝쪽에 매달린 다른 그네를 향해 몸을 날렸죠.

- 아악.
- 하나꼬!

- 화자야.
- 어.
- 화자야.
- 음.
-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안 된데.
- 언니. 왜 눈이 안 보이지?
- 아프니?
- 나. 어딜 다친거야?
- 이 바보야. 그래 내가 뭐랬니? 정신 바짝 차리랬잖아.
- 내가 어딜 다쳤냐니까.
- 이것아 하필이면 얼굴을 다칠게 뭐야.
- 얼굴? 아니 내 머리에 붕대가. 어. 눈에도 붕대.
- 눈 옆 이마위로 한 뼘이나 찢어졌단 말이야. 스무바늘도 넘게 꿰맸다고.
- 눈은 괜찮고?
- 눈은 괜찮아. 이마 상처때문에 눈을 싸맸을 뿐이야.
- 하. 죽진 않겠구나.
- 상처가 남아도 크게 남을 거다. 어떻게 떨여졌길해 그물 밖으로 떨어지니 그래.
- 글쎄말이야.
-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니. 그 높은데 올라가서 겁도 없이. 하유. 난 죽는줄 알았지 뭐니. 거기서 바닥이 어디니. 아휴. 속상해서.
- 나 물 좀. 어.
- 움직이지 말랬잖아.
- 온 몸이 쑤셔. 내 몸 같지가 않어.
- 골병이 들거다. 골병이. 거기가 어딘데. 자 물.

화자는 눈을 감았다. 붕대로 싸맨 눈에서 눈물이 번져 붕대를 적신다. 온통 서러움 투성이다. 앉아도 서럽고 서도 서럽고 어디 하나 마음 붙일데가 없는데 몸까지 다쳐 놓으니 다쳐서 상한 몸뚱이 만큼이나 가슴이 또 아파온다.

- 울지마. 그래두 다행이 군대 의사가 있어서 꿰매긴 재대로 꿰맸나보더라.
- 하나꼬 깨어났어?
- 네. 감독님.
- 도대체 정신들이 썩어 빠졌어. 여기가 어딘데 그 따위 난장판을 벌리는 거야. 응?
- 죄송합니다. 하나꼬가 아파서 그만.
- 듣기 싫어. 네 년들은 조금만 매질을 안 하면 이 모양들이야. 대체 하나꼬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우리 영웅들한테 챙피를 당했는지 알아? 응? 네 년은 하나꼬 뒷바라지를 어떻게 하길래 그 난장판을 벌이게 하지? 도대체 밥 쳐먹고 네 년이 하는게 뭐야?
- 죄송합니다.
- 듣기 싫엇! 죄송하다면 다야? 다?
- 아!
- 어디 오늘 한 번 죽어봐라. 에잇!

- 흑흑.
- 그만 울어.
- 숙자언니 어딨어? 응?
- 저쪽에 누워있어.
- 어떡하고 있어?
- 어떡하고 있긴.
- 내 대신 언니가. 내가 맞을 매를.
- 그 보다 니 얼굴의 그 상처때문에 큰 일 아니니. 흉터가 남아도 크게 남을거라는데 그 얼굴로 무대로 못 서면 어떻게 돼지? 왜 그렇게 마음을 못 잡고. 숙자누나를 봐서라도 그래서 되겠니?
- 불쌍한 숙자언니.
- 아휴.

- 자자. 여자들은 어서들 자요. 여자들은.
- 그런다고 그 놈들이 못 들어 올까?
- 들어오는 문이 있어야 들어오지.
- 글쎄. 걱정들 말고 잠이나 자라구요.

- 왜들 저러지?
- 왜놈 군인들 쳐들어 올까봐 남자들이 침대를 모아치고 있어. 천막문맡에.
- 그럼 잠은 어디서 자고? 이 찬 바닥에서 어떻게 자?
- 자긴? 못 자는 거지. 안자고 지킬꺼야. 어제 중국여자 당하는 거 봤잖아. 그 꼴을 보고 잠이 오겠니?
- 허긴.
- 문맊아 놓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거야. 그러면 설마 제 놈들도 도리가 없겠지. 자라. 딴 생각 말고.
- 아휴. 괜찮을까 정말.

헌데...


장미자, 양성진, 유민석, 오세홍, 설형범, 이기전, 유명숙, 안경진, 정경애, 신성호, 서지원, 홍경화.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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