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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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12회 - 농락당한뻔한 화자를 구한 상민
제12회
농락당한뻔한 화자를 구한 상민
1980.05.17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열두번째

- 아, 야야야야. 빨리 빨리 타라. 꾸물거리지들 말고.
- 화자야, 어서 가자.
- 어.


그 날 새벽, 예정대로 그들은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 너, 뭘 찾니?
- 아 아니야.
- 정철 씨 나타날까봐 그러는거지? 이미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어. 정철 씨는 다행히 안 나타났고.
- 그래. 다행히 안 나타났어.
- 그런데도 기다렸지.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지? 내가 알지. 그 마음 내가 왜 모르겠니.
- 으흐흑...
- 그래. 울어라.


울고, 또 울고 또 울었지요. 어쩌면 그리도 서럽고 허전하든지. 칼로 살을 베어내는것 처럼 그렇게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핑 도는구만요. 내일 모레가 칠십인데 말입니다.


- 얘, 화자야. 저기 그 보초 놈 온다. 어? 이리로 곧장 오는데? 화자야, 얘 눈물 그쳐. 그 놈이 온다구.
- 오면 어때. 나 아무것도 겁나는거 없어. 아무것도 눈에 안 보여.
- 하지만. 널 쳐다본다 오면서.


그러나 보초는 그냥 그녀들을 지나갔다. 화자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는 않았지만 그냥 지나쳐 갔다.


- 도데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네. 왜 가만 내버려 두지? 섬나라 놈들 성질이 파르르해 꾹 참고 있진 않을텐데 말이야.
- 죽일테면 죽이고 살고 싶지 않아. 정말 이젠 살고 싶지 않아.
- 그렇게 생각하지마. 사노라면 또 만나는 날이 있겠지. 인연있으면 또 만나게 될거야.
- 어디가서 만나? 어떻게 만나요?
- 우리같은 떠돌이 인생. 떠돌다 보면 또 만나는 수도 있지 않겠어?
- 다신 못 볼 거에요. 다시 만날 사람들이 이렇게 허망하게 헤어져요? 이별이 이렇게 한 순간에 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이별이나 제대로 하고 헤어졌어도 이렇게 서럽진 않을거에요. 흑흑.
- 하긴.


- 어서 막 올려라 어서!

대륙약탈의 첫 시도로 일으킨 만주사변에 승리한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고 음흉한 침략의 청사진을 미리 펼쳐보면승전의 쾌감에 젖어 있었고. 성능좋은 그들의 전쟁하는 기계 일본군의 기세는 온통 만주바닥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는데. 그 성능좋은 기계들의 충전을 위해 급히 차출된 이른바 위문연예단.

- 야. 야. 빨리 빨리 준비해라.
- 준비 다 됐습니다. 단장님.
- 응. 준비완료됐으면은 다시 한 번 점검해라. 이건 돈 벌자고 하는 공연이 아니지만은 우리의 위대한 대 일본제국의 영웅들을 위해 배푸는 잔치니 만치 손톱만치도 허술한 구석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알아들어? 알아듣겠어? 응?
- 네. 알고 있습니다. 단장님.
- 그래서 준비 철처히 했습니다.
- 그럼. 막을 올려라.

(환호성)
- 첫 출연자가 누구냐?
- 네. 상민입니다.
- 상민이?
- 첫무대에 불춤을 추는 것도 영웅들의 패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장님.
- 좋아. 제법이란말이야. 하하하하.
- 야. 준비됐지?
- 네.
- 실수 없도록 해. 실수를 하면은 어떻게 되는지 알지? 첫무대에 실수하면 그 공연은 보나마나야. 알겠어?
- 네
- 어서 나가 봐.

- 화자야. 상민이 좀 봐. 상민이 불춤 추는 것 좀 봐. 정철씨만은 못 해도 상민이 솜씨도 보통은 넘지?
- 정철 아저씨한테 배웠으니까.
- 또.
- 나 들어갈래. 언니. 상민이 불춤추는 것 보기 싫어.
- 허긴. 보기 좋을리가 있나.

- 아니. 깜짝 놀랬네. 난 누구라구. 울구 있었구나? 내가 갈께. 내가 갈께.
- 아니야. 앉아 있어. 들어갈거야.
- 화자야? 잠깐만 앉아 봐.
- 왜?
- 왜는.
- 나 입도 뻥긋하기 싫어.
- 알아.
- 알면 말 시키지 마.
- 너 나 불춤추는것 보기 싫어서 여기 나와 있었구나? 그렇지? 나두. 정철이형 생각나서 혼났다. 무대에 나가니까 그 형 생각부터 나겠지? 같이 있을 땐 무대에 나가도 아무렇지 않더니만. 그런데 왜 정철이 형이 널 두고 혼자 가버렸지?
- 혼자간 게 아냐.
- 아니야?
- 같이 가려다가 나만 붙잡혔어.
- 그거 금시초문인데? 다들 그러더라. 정철이형이 맘 변해서 혼자 가버린 거라고. 가는거 보고도 붙잡지 않았다고 말이야.
- 누가 그래?
- 다들 그러더라니까. 놈들도 그러고.
- 그럼 너 내가 도망가려다 붙잡혔다는 소리 못 들었니?
- 아 글쎄. 금시초문이라구.
- 그래?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 그 소문이 안 난 것일까. 도망치다가 붙잡히면 온통 발칵 뒤집히게 마련인데. 어젯밤일이 하루가 지나도록 뒤집히지 않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화자 넌 오늘 무대 안 나가니? 천만다행이다. 그 모양을 하고 나갔다간 실수는 해 놓은 것 같고. 실수해 봐 오늘 같은 날. 어휴. 화자야? 화자 너 너 말야.
- 나 간다.
- 화자야!

- 왜 안자요?
- 괜히 심난스러워. 군가소리도 그렇고 군복입고 소리소리지르는 군인들을 봤더니 괜히 겁도 나고. 여자들만 보면 곧 죽겠다고 날뛰드라. 여자 구경도 못해 본 것처럼.
- 그래요?
- 앞으론 위문공연 다니는 날이 더 많을 거라는데. 괜히 불안해. 꼭 무슨일이 터질 것 처럼 말이야. 넌 안 불안하니?
- 나 겁나는거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 언니?
- 참. 그것보다 왠일이니 끽소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여태까지 군말이 없잖아. 응?
-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죠.
- 아니. 누구지?
- 하나꼬
- 누구야?
- 그 보초놈이야.
- 엉?
- 드디어 왔구나.
- 누구세요?
- 나야 나. 좀 나와 봐.
- 화자야.
- 걱정 마. 언니.
- 너 어쩔셈이니? 어쩔려고 그렇게 태연하니?
- 죽기 아니면 살기지 뭐.
- 너 그런 맘 먹으면 안 돼. 그러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 하나꼬!
- 네. 나가요.

- 어디로 가는 거에요?
- 잔말말고 따라와.

- 들어가.
- 여긴 창고 아니에요?
- 잔말말고 들어가기나 해. 왜 말이 그렇게 많아.

- 거기 앉아.
-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데요?
- 조금있으면 보이게 되.
- 그냥 서 있을게요.
- 좋을데로 해 그럼.
- 근데 창고에는 왜?
- 하나꼬.
- 네?
- 똑똑이 들어 내 말. 똑똑이 듣고 대답해. 알았어?
- 네.
- 너 말이야. 내가 어제 새벽에 너 도망치는것 잡았다고 야마모토 감독이나 단장님한테 일러 바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알아 몰라?
- 알아요.
- 안다니 다행이군. 니 년이 죽고 살고는 내 손에 달렸다. 내 손에. 알았지?
- 네.
- 내 말만 잘 들으면 넌 정자처럼 되지는 않아. 그럼 니가 결정해라. 내 말을 듣겠어? 아니면 단장한테나 야마모토 감독한테로 끌려가겠어? 왜 대답이 없지?
-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 네?
- 그럼 이리 와.
- 어머 왜 이러세요.
- 왜 이래. 이리오라니까?
- 이거 놔요.
- 아니 너 정말 죽고싶으냐?
- 네. 죽고 싶어요.
- 뭐야?
- 끌고 가세요. 단장한테로든 야마모토감독한테로든 끌고가라구요. 하지만 나 정자처럼되진 않을거에요. 정자처럼 되기 전에 혀라도 깨물고 죽을거니까요.
- 뭐라구?
- 끌고 가세요.
- 야 이 바보야. 내가 지금 널 봐주려고 이러는데. 너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 듣니?
- 안 봐줘도 좋다고 하잖아요.
- 뭐라고?
- 그렇게 봐 주는 거 소용 없어요.
- 이 년이. 간뎅이가 부어도 보통으로 부은게 아니로구나. 응? 너 정말 죽고 싶냐?
- 그래요. 죽고 싶어요.
- 이걸 그냥.
- 왜 못 끌고 가죠? 내가 도망가려다 잡힌걸 알면 보초서다가 졸았던게 탄로날까봐 지금 끌고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거죠? 흥. 그래놓고 봐주는 척은.
- 이 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주둥아리를 잘도 나불거리는 구나. 어디 맛 좀 봐라. 좋은 말로 할때 들을것이지 이게.
- 엄마. 아.

- 불! 불!

- 불! 불이라고?
- 어서 도망가 그 놈 돌아오기 전에. 어서.

- 고마웠어 정말.
- 고맙긴. 마침 거기 있었으니까. 그 보다 그 놈이 계속 추근거릴텐데 말이야.
- 몰랐으니까 거기까지 끌려들어갔지 알고야 또 끌려 가겠니?
- 그래도 조심해.
- 나두 저 놈 약점을 잡고 있으니까.
- 근데 넌 창고 속에서 뭘 하고 있었니?
- 혼자있고 싶을 땐 가끔씩 창고속에 가 있거든? 근데 거기 있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던 모양이야.
- 그랬었구나. 덕분에 난 살았구.


그 때 상민이가 거기 없었다면 어찌 됐을 까요? 나가 무슨 힘이 있어 그 놈을 당해 냈겠어요. 하긴 죽기로 작정했으니께 그깟놈 하나 못 당해 낼것도 없었것지요. 어찌 됐든 그런면에서 나는 참말로 운이 좋은 편이었구만요. 그런 위기를 어찌 어찌 해서 용캐도 넘겼으니께요. 그란디 만주에 온 뒤 사흘째 되는 날이었구만유.


- 아유.아니 또 어딜 끌고 가려고 짐을 꾸리라고 하지?
- 어딜가건 그건 상관이 없는데. 일본아이들 몇하고 우리나라 사람들만 떠난다니 알 수가 없다구. 왜 우리만 가는지 말이야.
- 두패로 갈르는 모양인데? 여기 그대로 있는 한 패는 힘 깨나 있는 것들이고 힘 없는 우리만 모아갔구 어딜 데리구 갈려는지 말이야.
- 글쎄 말이야.

- 야야야야. 조용 조용 조용들 해. 잘 들어. 지금부터 우리는 길을 떠난다.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영웅들이 안내하는대로 어디든 가야해. 우리의 영웅들이 있는데는 어디든 가야 한다.

- 미친 놈. 지놈들 한테나 영웅이지 우리한테도 영웅이야.
- 누가 아니래.

- 자 지금부터 길을 떠난다. 모두들. 차례로 군대트럭에 올라가. 군악도 울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이끄는 대로 트럭에 올라탓다. 우리의 주인공 이화자여사도 물론 그 트럭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 여행이 얼마나 험악한 여행길이며 얼마나 잔인한 여행길인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장미자, 이동주, 양성진, 유민석, 이기전, 김한진, 안경진, 정경애, 신성호, 서지원, 유해무,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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