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열한번째.
- 아직 안 잤니? - 어디 갔다 와요? - 어. 바람 좀 쏘이고 오느라구. - 내일 새벽에 떠난 다구요? - 그렇데. 왜? 심란하니? - 우리가 무슨 일을 좀 꾸미면은 꼭 생각지고 않았던 일이 터진단 말이에요. 상해로 배타러 간다더니 또 만주로 간다니 진짜로 좋지 않아졌어. - 화자야? - 왜? - 너, 정철 아저씨랑 여기 빠져 나가면 살아갈 방도는 있니? - 살아갈 방도? - 밥 안먹고 살 수는 없잖아. - 그야... - 너, 뒷일은 한번도 생각 안해 봤구나. - 뒷일까지 어떻게 생각해요. 빠져나가는 일도 어려운데. - 하지만. - 여기서도 살았는데 설마 바깥세상에 뭐하던 굶어 죽겠어요? - 그렇지만 정철 씨 그 몸으로 뭘 할 수 있겠니. - 정철 아저씨 몸 때문에라도 빠져 나가야 해요. 여기 더 있으면 어떻게 될 지 몰라요. 놈들이 한없이 공밥 먹게 내버려 둘 것 같아요? 좀 있으면 무대로 끌어 낼거 라구요. 지금 군말 없이 밥 주는 것도 불춤 솜씨가 뛰어나서 주는거지 딴 사람 같아봐요. 벌써 온갖 잡일 다 부려먹지. - 그건 그래. 정철 씨 만큼 불춤 잘 추는 사람도 없지. 꼭 신들린 사람처럼 추거든. - 하지만 이제 다시는 예전처럼 그런 춤을 추지는 못 할 거에요. 그 몸으로 어떻게 해요. - 해. 펄펄 날으던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 조만간에 무슨 짓을 하던지 돈 벌어서 아저씨 보약부터 먹게 할 거에요. - 니가 무슨 수로 돈을 벌겠니. 두 살 때 여기 들어와서 이날 이때까지 서커스 밖에 보고 들은게 없는 니가 바깥 세상에 나가서 무슨 수로 돈을 벌어? 응? - 어떻게 살게 되겠지요. - 내가 여기 눌러 있는것도 나가서 살 자신이 없어서야. 내 몸 하나 내가 무슨짓 하면 못 살겠냐만은 가진거라곤 몸둥아리 하나 밖에 없는 여자가 해 먹고 살거란게 뻔하잖아. - 그건 그래요. - 세상이 무섭기도 하고. - 아무려면 세상이 여기보다 험악할까요. - 바깥 세상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몰라서 더 무섭다는 게야. - 하긴. - 어. 정철 씨 아직 안 자는 구나. - 일찍 자야 하는데. 자둬야 깨워도 깰텐데. - 아니, 정철 씨 한테 갔니? - 응.
- 잠이 안와. - 안 자도 되겠어요? - 그 전엔 며칠씩 안자고도 끄떡 없었는데. - 아저씨. - 왜. - 아저씨 왜 그러세요. 아깐 눈물을 보이더니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은거 같고 왜 그러세요. - 아 아니야. 왜 그러긴. 내가 울긴 언제 울었다 그래. 조금 착잡해서 그래. 신경 쓰지 마. - 글쎄 왜 착잡하냐니까요. 붙잡히지만 않으면 되는데 왜 그러세요? - 이것 저것 생각 하니까. - 이것 저것? - 내 몸 하나만 성하면 겁날게 없는데. - 몸은 보신만 잘하면 괜찮아 질텐데요 뭐. - 아니. 틀린거 같애. - 왜 그렇게 생각 하세요? - 내 몸은 내가 알아. - 아저씨. - 화자야. - 왜 그렇게 서러워 하세요. 내가 있잖아요. 내가. - 울지마. - 아저씨. - 가서 자. 가서 자라니까. - 안 갈래요. - 안 가? - 아니. 못 가요. - 왜. - 가도 못 자요. 아저씨 이러는데 잠이 올 거 같아요? 차라리 여기 앉아서 밤을 밝힐래요. - 왜 말 안 듣고 그래. 응? - 아저씨야 말로 왜 그러세요. 아저씨 이러시면 난 어떡해요. - 화자야. - 아저씨. - 화자야.
- 화자야. - 네? - 춥지 않니? - 춥긴. 아저씨 가슴이 이렇게 따뜻한데? - 내가 미쳤지.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겠다고.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기로 해야지.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 응? 아니야. 내가 잠깐 참 생각을 잘못 했다. 그보다 화자야,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 뭘요? - 새벽까지 기다릴게 아니라 지금 움직이자고. - 지금? - 움직일 때는 틈도 많지만은 그만큼 감시도 심해지잖아. - 그렇죠. - 그러니까 차라리 지금, 지금 빠져 나가자구. - 하지만 보초서는 놈이 있잖아요. - 지금 한창 졸릴 때 아니니. 새벽 1시야. - 그렇긴 하지만. - 보초 앞만 통과하면은 더 어려울게 없다고 안그래? - 그렇긴 해요. - 가만, 내 한번 가보고 올게. 어떡하고 있나. - 조심 하세요.
정철은 무릎으로 기어 천막 입구까지 갔다. 살그머니 휘장을 들춘다. 환하다. 가을 인데도 밤공기는 차고 그래서 피워 놓은 듯한 모닥불. 그 불빛에 비취는 보초 둘의 얼굴. 졸고 있다. 딴 때 같으면 술판을 벌이고 있었을텐데 새벽 만주로 군대 위문을 간다는 긴장과 흥분 때문에 틀림없이 그들은 늘 하던 짓을 안하는 것이다.
- 어떡하고들 있어요? - 기회가 좋아. - 그래서 어떡하지요? - 이렇게 하자. - 어떻게요. - 맨 발로 지나가면은 그 놈들 따돌리는건 문제 없을 것 같애. 그러니까 신발 벗어 들고 내가 먼저 빠져 나갈게. 내가 뛰는게 너보다 신통치 못할 거거든. - 하지만. - 걱정 마. 나 나가고 금방 뒤따라 오면 돼. - 그래도. - 그리고 입구가 비좁아서 둘이 한꺼번에 그 놈들 등 뒤로 빠져 나가긴 어려워. 응? 자, 가자구. - 정말 가는 거에요? - 그래. 정말 가는거다. 챙길 짐도 없구 가져갈 돈도 없구. 그냥 뛰기만 하면 되는거지. - 좋아요. 가요. - 떨지 마. 떨면 실수하게 돼. - 알았어요.
모두들 잠든 천막 안. 말이 천막이지 왠만한 강당 보다도 넓다. 화자와 정철은 터질 듯 긴장한 가슴으로 천막 안을 기어서 입구까지 갔다.
- 봐라. 졸고 있지? - 다 자는데요? - 하늘이 우리를 도우시는 가봐. - 그런가봐요. 정말. - 빠져 나가서 곧장 북쪽으로 뛰자. 나 나가고 금방 뒤따라 와야 돼. 알았지. - 아휴. - 또 떨어? - 안 떨게요. - 아휴, 참. -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 안 되겠다. 니가 먼저 나가라. 너 그러다 실수 하겠어. - 아니에요. 이제 괜찮아요. 아저씨 먼저 나가세요. 나가서 돌아보지도 말고 부지런히 뛰기나 하세요. 금방 아저씨 따라잡을 테니까요. - 괜찮겠어? - 네. 됐어요. 이제. - 자, 그럼 들어간다.
정철은 한번 더 돌아보고 휘장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보초의 등 뒤를 돌아 발소리를 죽이며 모닥불빛 밖으로 벗어났다. 그가 어둠속으로 사라지는걸 보고 화자는 떨리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휘장 밖으로 나왔다. 금방이라도 보초가 눈을 뜰 것 같아서 그녀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헌데, 화자가 막 보초의 등 뒤를 지나는 순간 이었다.
- 앗 뜨거! - 어머! - 아니, 이게 뭐야.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기가 막히다는 말로 밖에 표현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는가.
- 뭐야? - 아니, 너 하나꼬 아니냐. - 그래, 하나꼬 로구나. - 아니, 너. 너 도망치려고. 응... 이제 알았다. 이 년이 도망치려다가 내가 깨는 바람에. 이 년! - 잘못했어요. - 이게 신발까지 벗고. - 하나님.
그건 정말 하늘의 뜻인가. 정신없이 졸던 보초가 왜 하필이면 바로 그 순간에 깨나는가 말이다. 신발에 모닥불이 옮겨 붙는 줄도 모르고 졸던 보초. 그는 신발이 타면서 발가락이 뜨거워지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났다. 화자가 막 그의 등 뒤를 지날 순간 이었다. 놈의 비명에 놀라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린 화자. 참으로 기가막힌 불운 이었다.
- 어서 말해. 너 혼자야? 응? - 네. 혼자에요. - 거짓말이면 넌 죽어. - 정말이에요. 혼자에요. - 가서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어. - 조사해 보세요. 정말 이에요.
화자는 놈들이 우리 동포들의 수를 헤아리고 다닐 동안의 시간을 정철을 위해 벌어 줄 참이었다. 그는 잡히면 끝이었다. 아니, 화자 자신도 이제 끝이었다. 그런데.
- 어떻게 됐어. - 정철이 놈이 없어요. - 정철이. - 그 놈은 이미 날른 거에요. 야가 그 놈이 도망갈 시간을 만들어 주려고 거짓말을 했다구요. - 에이! - 음음... - 어떡할까요. 애들 다 깨울까요? - 놔둬. - 놔둬요? - 그 놈은 가도 좋은 놈이야. 불춤 출 놈이 없어서 잡아 둔 놈인데 그 놈 꼴을 보니까 무대에 서기 어려운 놈 같더라고. 게다가 하나꼬 이 년 애인 아니냐. 야마모도 감독이 눈엣가시같이 미워하는 놈인데 그깟 놈 잡아서 뭘해. - 하긴, 그렇군요. - 도로 잡아와서 이 년 좋은 일 시킬 거 없잖아? - 하하하하. 역시 형님 머리는 못 당한단 말씀이야. 아, 그런데 이건 어떡할까요. 야마모도 감독 한테로 끌고 갈까요? - 응. 아냐 아냐. 너, 지금 당장 니 방으로 가. - 네? - 니 방에 가 있어. - 바 방으로요? - 그래. 니 방에 가서 찍소리 말고 쳐 자. 알아 들었어? - 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방으로 가라는 것일까. 그들의 속셈을 알 수 없어서 화자는 미적거리다가 따귀 한 대를 더 얻어 맞았다.
- 흑흑... -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한 순간만 넘겼으면 되는걸. 정철 씨 안 자고 있을... 그랬음 만사 잘 됐을걸. - 언니, 난 어떡하면 좋아. 난 어떡해. 언니, 아저씨도 없고 그냥 확 혀 깨물고 죽어버릴까봐. - 화자야.
정말 그 때 난 어쩔 줄을 모르겠더구만요. 미쳐서 죽은 정자의 얼굴이 눈 앞에 훤히 떠오르고 정철 아저씨 모습이 커졌다 작아졌다 눈 앞에 어른 거리고. 그런 중에도 정철 아저씨와 그만 떨어져 버렸다는 설움이 그저 컸습니다. 참말로, 그 자리에서 미쳐 죽을것 같았지요. 지척에 정철 아저씨를 두고도 영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참말로 눈 앞이 캄캄 합니다.
천막 하나를 사이에 둔 이별. 하나는 천막 밖에서 하나는 천막 안에서 안타까움에 목이 마르는 그들.
- 지금 막 천막 밖에서 정철 씨는 펄펄 뛰고 있을거야 도로 들어오면 목숨이 위태롭고, 안 오자니 지척에 니가 있는데 몸이 절로 이쪽으로 쏠릴거고. 아니야. 어쩜 정철 씨는 도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혼자 갔으면 모를까 둘이 가다간 니가 잡히는데 니가 어떻게 될 지 뻔히 알면서 안 돌아 오겠니? 정자 꼴을 봤잖아. - 그건, 안돼. 돌아오면 안돼. 오면 죽어. - 죽기로 작정하고 오겠지. 그 작정 없이 오겠니? - 언니, 어떡하면 좋아. 정철 아저씨 오면 안돼. - 안 돼는 지는 알지만. 이러다, 이러다 두 목숨 한꺼번에 죽는거 아니니? 어?
헌데.
장미자, 윤병훈, 안병진, 전경애, 신성호, 서지원,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제2회 동아햇님 어린잉 보호상 대상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열한번째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