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스타앨범 / 나의 데뷰
유쾌한 응접실 / 정계야화
노변야화 / 주간 종합뉴스
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10회 - 여자로서의 한이 시작되는 만주
제10회
여자로서의 한이 시작되는 만주
1980.05.15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열번째.


- 화자야. 화자야.
- 왜그래.
- 거기서 뭐하니? 이리 올라 와봐. 여기 꽃이 무더기로 피었어.
- 꽃이?
- 그래 꽃이야. 무더기로 피었어. 자, 봐라.
- 어머나. 아휴 곱기도 해라. 온갖 꽃이 다 있네.
- 내가 말이야. 네게 꽃 목걸이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꽃을 찾아다녔거든?
- 꽃 목걸이?
- 응. 꽃 목걸이를 걸면 화자 니 얼굴이 얼마나 더 곱겠니?
- 아하하하하하.
- 그런데 여기 이렇게 꽃이 무더기로 있겠지?
- 나, 이렇게 고운 꽃이 이렇게 많이 핀건 처음 봐.
- 나도 그래. 꼭 누가 두고두고 볼려고 일부러 심어논거 같지?
- 정말이야. 꼭 그런거 같애.
- 우리, 이 꽃 꺾지 말까? 아까운 생각이 들지?
- 그래. 꺾지 마. 꺾지 말고 그냥 보기만 하지 뭐.
- 그러는게 좋겠어. 너무 아까워.
- 어. 어머. 어머머.
- 아니 이럴수가. 금새 꽃이 싹 없어져 버리네.
- 없어. 하나도 없어. 다 없어 졌어. 다. 다...


- 화자야.
- 어...
- 화자야.
- 응?
- 화자, 꿈꿨니?
- 응. 꿈.
- 무슨 꿈?
- 꽃이. 아 아니.
- 왜.
- 아저씨.
- 왜그래.
- 살았어. 살았어. 살았어. 죽지않고 살았어.
- 아, 윽.
- 움직이지 말아요.
- 아니 얘가 또 왜이러냐.
- 왜이러긴요. 맞아서 나 죽는줄 알았어요. 꼭 죽느줄만 알고.
- 내가 또 죽었었니?
- 이번엔 정말 죽는 줄 알았다구요. 오늘이 나흘째.
- 나흘째?
- 아저씨.


- 눈을 뜨니까 네가 내곁에 누워 있길래 왠일인가 했지. 그런줄도 모르고. 그런데도 조금도 이상하지가 않았어.
- 정말 죽고 싶었어요. 정말 죽을것 같았구요 아까는.
- 정말?
- 정말 이에요. 숨 한번만 안 쉬면 죽을 것 같았다구요. 숨 쉬기도 싫었구요. 숨 쉴 기운도 없었구요. 그런데 이상해요.
- 뭐가.
- 꼭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자고 꿈까지 꿨을까요?
- 깜빡 정신을 일었던게지. 잠들기 전에.
- 그런데 꿈이 또 이상해요. 왜 꽃이 별안간 온데간데 없어졌을 까요?
- 글쎄.
- 좋은 꿈인것도 같고, 나쁜 꿈인것도 같고. 하지만 너무도 신기해요. 어쩌면 모두들 죽을거라고 했는데.
- 아마 죽을수가 없었던 모양이지.
- 아마 아저씨 죽었으면 나도 죽었을 거에요.
- 그래서 내가 못 죽고 살았는지 몰라.
- 아저씨.
- 화자야.


나는 정철 아저씨 가슴팍에 엎드려 한 없이 울었습니다. 정철 아저씨도 나도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지요. 정말이지 아무도 정철 아저씨가 살아날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니께요. 그러고보면 사람의 목숨은 한없이 여린것 같으면서도 또 한없이 끈질긴 건가봐요.

그러나 정철은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는 만신창이였다. 죽을고비 두 번을 넘긴 그의 갈갈이 찢긴 육신. 가진거라곤 몸둥이 하나뿐인 그에게 있어 병든 육신이란 무엇을 의미 하는가.


-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어디 있어요. 네?
- 나 여깄어.
- 어머 거기 있었군요?
- 연습 안하니?
- 연습 다했어요. 오늘은 끝이에요.
- 화자 내년쯤이면 아야꼬 밀어졌히고 코끼리 위에 올라가겠구나.
- 내가요?
- 아야꼬는 나이 먹었거든. 이젠 인기가 없단 말이야.
- 아이 그래도 내가 어떻게 아야꼬를 제쳐요? 일본 애들이 수두룩 한데요.
- 일본 애들 많아도 화자가 제일 예쁘게 생겼거든.
- 하지만.
- 두고봐. 내년엔 화자 니가 아야꼬 대신이 될 테니까.
- 그보다 아저씨, 여기서 뭐해요?
- 응. 그냥 햇볕 쏘이고 있었지.
- 햇볕? 이렇게 따뜻한 날에요?
- 그래도 난 추워.
- 아저씨.
- 왜.
- 보약이라도 먹으면 보약을 먹으면 괜찮아 질텐데.
- 아무래도 난 틀린것 같아. 약도 없지만은 약 가지고 될 일도 아닌것 같애. 골병이 들어서.
- 그래도 약이라도 좀 먹어봤으면. 약만 좀 먹으면 금방 괜찮진 않더라고 지금보단 좀 나을텐데. 돈이 있어야지.
- 매맞아서 든 골병은 보약으로도 안되는 법이야. 아마 나 다시는 불춤도 못 출거야.
- 불춤도 못 출거라구요?
- 혼자 햇볕에 늙은이처럼 나 앉아 있으니까. 문득 그 전처럼 불춤이나 한바탕 춰 보고 싶겠지?
- 좀 있으면 추게 될거에요. 설마 내두르 이러겠어요?
- 내 몸은 내가 알아. 난 틀린거야 이미. 내 나일 이제 스물 여덟이야. 근데 이 모양 이라니.
- 이게 다 나 때문이에요. 나만 아니었으면 아저씨 이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나 아니었으면 매맞을 이유도 없었잖아요. 이게 다 나 때문이에요.
- 바보야. 왜 그런 생각을 하니. 이게 왜 너 때문이야. 다 왜놈들 때문이지. 다 그 악독한 놈들 때문이잖아. 알면서 왜그래.
- 아무리 악독한 놈들이래도 안건드리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다구요.
- 화자야, 우리 그런 얘긴 하지 말자. 더는 그런 바보같은 생각 하지도 말고.
- 아저씨.
- 화자야.
- 어떡하든 여길 빠져 나가요. 여길 빠져 나가야 아저씨가 성한 사람이 될거에요.
- 빠져 나가야지. 여기 더 있다가는 난 결국 죽고 말거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
- 아마 곧 이동이 있을 모양이에요. 중국 온지 반년이 돼가잖아요?
- 도로 일본으로 돌아가겠지.
- 일본 가기 전에 빠져나가야 해요.
- 그래야지.
- 설마 이번에도 엉뚱한 사고가 생기진 않겠죠?
- 하늘이 도와야 되는 일이야.
- 이번엔 될거에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 화자야, 자니?
- 아니.
- 뭐 생각하고 있니?
- 왜.
- 너 곧 이동하는거 알고 있니?
- 소문은 들었어.
-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있어?
- 그걸 어떻게 알아.
- 난 안다.
- 알아? 어디로 간데. 일본으로 가겠지?
- 이번엔 우리나라 안 지나고 배로만 간다더라.
- 배로만?
- 그러니까 배 타기전에 일 끝내야 돼.
- 일이라니?
- 이번엔 어떡하든 도망가.
- 어머.
- 그렇게 놀래지 마. 나 다 알고 있어.
- 어떻게.
- 내가 그만한 눈치 모를것 같니? 너랑 한 방에서 지내면서.
- 하지만.
- 나도 도와 줄게. 도울 일이 있으면 말이야.
- 언니.
- 여기 더 있으면 안 된다. 정철씨 때문에 안 돼. 처음에 너 때문에 빠져 나가야 했지만 이젠 정철씨 때문에 가야 돼. 여기 더 있음 그 사람 죽는다.
- 알아. 나도.
- 좋은 사람이야. 이번엔 선수 뺏기지 말고 서둘러라.
- 그럴 참이야. 근데 언니, 언닌 왜 빠져나갈 생각을 안해요?
- 나야 빠져나가야 할 까닭이 있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도망을 가겠니. 가면 반길 부모 형제가 있어서 가겠니. 나는 여기 나가면 굶어 죽을 일 밖에 없다.
- 그래.
- 난 니가 부럽다.
- 아이 언니도.
- 그만 자. 내가 또 부지런히 싸 댕기면서 어디서 배 타는지 알아봐 줄게.
- 고마워요 정말.
- 고맙긴. 자자 그만.


- 아니, 도데체 어떻게 된거야? 짐 꾸려 놓은지 몇 시간인데 여태 떠나질 않지?
- 금방 떠난다더니 대체 왜 이런데?
- 내가 아나, 자네가 아나. 가자면 가고 있으라면 있고 우리야 그런거 상관할거 없잖아.
- 아으. 그래도 이게 뭐야 짐 꾸려놓고 엉거주춤 앉아갖고 벌써 몇 시간 째냔 말이야. 가면 가고 말면 말 일이지. 아휴 또 무슨 꿍꿍이 속이 있어서 그러나?
- 아휴, 그래도 이런일은 한번도 없었다고.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뭉기적 거릴까?
- 아저씨, 괜찮아요? 앉았지 말고 거기 짐 사이에 좀 누우세요.
- 괜찮아.
- 그래도 기운을 좀 아껴야죠.
- 그보다 또 왜 이런다지?
- 글쎄요.
- 우리가 뭘 시작하려면 꼭 이러더라.
- 어머, 숙자언니 온다. 언니.
- 이상해.
- 뭐가?
- 아마 오늘 안 떠날 것 같애.
- 아니, 왜요?
- 뭔진 몰라도 무슨 일이 생긴건 틀림없어요. 단장이랑 야마모도랑 우와좌왕 하는게 이상해요.
- 무슨 일이지?
- 그렇다고 초조하겐 생각지 말아요. 언제 떠나도 떠나긴 떠날 테니까요.
- 허긴.


한데 그날 밤 까지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짐을 도로 풀라는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 열두시가 다 돼서야 야마모도가 나타났다.


- 조용히. 조용. 조용.
- 어머. 아니 이 밤중에 왠일일까.
- 놈 기색이 별로 좋지 않은데.
-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라. 에... 우리는 지금부터 우리의 위대한 일본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만주로 떠난다.
- 만주?
- 조용히. 조용. 에...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의 위대한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군의 만주 점령. 한반도를 약탈하여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량으로 삼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본은 1931년 드디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대륙침략의 서장을 열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전쟁의 소용돌이는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중국대륙은 물론이요 동남아시아까지 온통 아비규환으로 몰아 넣었다. 1931년 전쟁이 시작되던 그 해 화자나이 열일곱.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서커스 밖에 아는게 없던 열일곱의 화자, 그러나 전쟁의 시작부터 그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 내 말 다 알아뒀지? 우리가 가는곳은 일본이 아니라 만주다.


만주. 거기에서부터 화자의 일생은 더욱 가시밭길이 돼간다. 만주, 여자로서의 한이 시작되는 만주, 아니 전쟁.


- 아저씨, 만주에는 왜 간다는 거에요? 일본군이 뭘 어쨌다구요.
- 일이 재미없게 돼간다. 일본놈이 이젠 만주를 먹은 모양이야.
- 근데 우리가 왜 만주에 가냐구요.
- 들었지? 일본군 위문하려고 간다고. 군인들 앞에서 서커스를 한다는거야.
- 군인들? 아저씨, 아저씨 뭐 생각해요?
- 화자야.
- 네?
- 니 앞날이 어찌될지 모르겠구나.
- 내 앞날?
- 어찌될지 짐작이 안가는구나.
- 내 앞날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앞날이 아저씨 앞날이고, 아저씨 앞날이 내 앞날인데 지금 무슨말을 하고있는 거에요?
- 하지만.
- 하지만?
- 모든건 하늘에 맡기는 수 밖엔.
- 아 저 그보다 아저씨, 우리 어떡해요. 배 타는줄 알고 상해 지리만 익혀 놨는데 느닷없이 만주라니 또 어떡하죠.
- 또 미루는 수 밖에.
- 이러다 아주 늙어 죽겠구나. 왜 그래요. 왜 그렇게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봐요. 네?
- 응. 아무것도 아니야.
- 아저씨, 참 이상하다 오늘.
- 이상하긴.
- 아저씨 울어요?
- 울긴.
- 울면서. 왜 울어요 아저씨. 왜 갑자기 그래요. 왜요.
- 우는거 아니라니까.
- 아이 참.


그 날은 참말로 이상한 날이었지요. 느닷없이 만주로 간다는것도 이상혔지만은 정작 이상한건 정철 아저씨 였구만요. 헌디도 난 이상하다는 생각만 혔지 어째 아저씨가 그러는지 난 알 수가 없었지요. 헌디 다음 날, 다음 날 아침에 난 세상이 두쪽이 나는 것 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고만요. 그라고 정철 아저씨가 어째 그랬는지도 알게 됐지요. 참말로 기가 막혀도 그렇게 기가 막히는 일은 난생 처음이었고만요.


장미자, 양성진, 윤병훈, 김한진, 이기전, 안경진, 정경애, 양미학, 유해무, 장춘순, 홍경화,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제2회 동아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열번째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7.02)
프로그램 리스트보기

(주)동아닷컴의 모든 콘텐츠를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등에서 무단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저촉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by donga.com. email : newsro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