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아홉번째.
- 야, 바른데로 말해. 정자 어떡했어. 죽였지. 네 놈들이 달리는 기차에서 떠밀어 버렸지? - 아, 아니야. 죽인게 아니야. 정말이야. 믿어줘. - 뭐? 믿어? 니 놈들 말을 믿어? - 야, 니 놈들을 믿느니 차라리 개를 믿겠다. - 긴 말 할거 없어. 당장 정자를 찾아서 우리 앞에 데려 오던지 아니면 니 놈이 대신 죽어줘야 겠어. 이제 더 못 참아. 못 참아 이 새끼야. 바른대로 말해. 죽였지. - 아니야. 주주 죽이지 않았어. - 너 정말. - 죽여. 죽여. - 사람 살려. - 뭐야. 아니 이것들이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 정자 내 놔. 정자. - 정자. - 그래 정자. - 정자는 죽었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 내렸어. - 니 놈들이 떠 밀어 버렸잖아. - 증인이 있어. - 증인? - 야, 가서 인도 녀석 데려와. - 네. - 이 여자가 봤어. 우리도 정자가 기차에서 뛰어 내린지 몰랐지만 말이야. 그런데 인도 여자가 죽는 소리를 하길래 달려가봤더니 이미 정자는 보이지 않았어. 압록강에 뛰어 내린거야. 기차가 압록강을 지날 때 부터 정자가 승강구에 매달려 있었다는거야. - 뭐야? - 그래도 못 믿겠으면은 믿지 말아. 이것들이 미친년이 미쳐서 죽는지도 모르고 뛰어 내린걸 우리더러 어쩌라고 행패들이야 행패들이. 어? - 이 자식아. 정자가 왜 미쳤냐. 왜 미쳤어. 네 놈들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욕을 보였기 때문에 걔가 하룻밤 사이에 미쳐버렸다고. 하룻밤 사이에. 그러고도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지금 주둥아리를 나불거리는거야. 응? - 이 개만도 못한 자식. - 이 놈들이. 이 조센진 놈들이 감히 누굴. 거기 누구 없나. - 저 놈 잡아라.
처음이자 마지막인 반항 이었다. 온갖 멸시와 학대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국 사람의 분노는 정자의 죽음으로 해서 무섭게 퍼져 나왔다. 정자의 죽음은 그들의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잔혹한 학대의 표본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분노도 그들이 휘두르는 칼 앞에서는 어쩔수가 없었다.
- 아무래도 니 놈들이 이 칼 맛을 못 본것 같다. 이 니뽄도 맛이 어떤건지 알고 싶은 놈 있으면은 앞으로 나서봐라. 음. 나서라는데 왜 아무도 나서는 놈이 없지. 응? 아까는 잘도 뛰더니 왜 이렇게 잠잠해. 왜! 좋아. 그렇다면 내가 골라주지. 아니, 야마모도 감독이 골라내라. 어떤놈이 제일 이 니뽄도 맛을 보고싶어 하는 놈이냐. 어떤 놈이 감독 몸에 손을 댔는지 감독이 직접 골라내라. - 예. 단장님. - 가슴이 결리는지 야마마도는 오만상을 찌뿌리고 그러나 살기 등등한 눈으로 모여선 우리 동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둘러 보았다. 숨막히는 순간. - 너, 이리 나와. 그리고 너. 또 이 새끼 너. 그리고 너. - 놈의 손가락은 어김없이 앞장섰던 동포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헌데 손가락을 거두고 돌아서려던 놈은 별안간 휙 몸을 돌리더니 김정철의 무릎팍을 걷어찼다. - 그리고 정철이 니 놈. - 아니. - 네 놈이야 말로 악질중의 악질이야. 어서 나와.
화자는 하얗게 질렸다. 야마모도에게 맞아 다행히 병신은 면했지만 아직도 성한 몸이 아닌 정철. 그런데도 놈은 정철을 지목했다. 놈의 정철에 대한 보복이 끝나지 않은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보복 해올줄은 화자도 정철 자신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허나 정철은 성큼 앞으로 나섰다.
- 일렬로 서. - 오. 이놈들이냐. - 네. 단장님. - 바로 니 놈들이 니뽄도 맛을 보고싶어 환장한 놈들 이구나. 하지만, 하지만 니 놈들 다스리는데는 니뽄도 까지는 필요 없지. 몽둥이면 족해. 얘들아. - 네. - 이 놈들을 그 몽둥이가 부러질 때 까지만 쳐라. - 네. - 니 놈들은 감독한테 손지검을 한 놈들이야. 감독의 명령을 어겨도 죄가 되는 마당에 감히 감독한테 손지검을 해? 그것도 조센진이. 이건 단장인 나한테 대한 도전이요 우리 위대한 대 일본제국에 대한 도전이다. 절대로 용서할수 없는 일이야. 절대로. 얘들아, 어서 쳐라. - 네. - 다시는 날뛰지 못하게 본떼를 보여줘라.
피 투성이가 돼버린 다섯명의 동료. 신음 소리도 없는 그들을 뉘여놓고 동포들은 울었다. 피처럼 붉은 눈물. 다섯명의 동료가 피투성이가 될 동안 매맞는 그들을 지켜보며 매맞는 그들 만큼이나 아팠던 동포들.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 서커스 인생에 나라 없는 설움까지 골수에 사무치도록 겪어야 하는 그들의 낮과 밤. 그것은 지옥이었다.
그려요. 지옥이었지요. 어디 지옥이 따로 있더라구요. 바로 그것이 지옥이었지요. 인생 살기가 그 때 처럼 그렇게 지옥 같기만 하면 이 세상을 누가 목숨 다 할때꺼정 살려고 할까요. 그란디도 나는 그런 인생을 삼십이 넘도록 살았지. 참말로 몸서리 치는 일이어요. 그란디 성치않은 몸에 또 죽도록 맞은 정철 아저씨는 사흘이 지나도록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지요.
- 아저씨, 정철 아저씨. 눈 좀 떠봐요 아저씨. 눈 한번 떠봐요 아저씨. - 황천길 헤매고 있는거 같다. 세상에 사흘이 지나도록 정신이 안 돌아오니 이러다가 영영 안 돌아오고 가버리면 어쩌지? 화자야. - 아저씨. - 딴 사람들은 그래도 정신들은 다 돌아왔는데. 어쩌자고 정철이는 아직도 이러고 있을까. - 언니야, 그 중국 사람 좀 데려다 줘요. 지난번에 아저씨 팔 붙여줬던... - 그 사람 그런거 몰라. 넌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 소용 없는 일이다. - 그럼 어떡해 언니.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순 없잖아. - 너 몰래 내가 어제 청심환 한알 얻어다 먹였어. - 청심환? - 중국 사람들 한테 갔었지. 사정 얘기 하니까 주더라. 헌데 소용이 없잖아. 왠만하면 그거 먹고 정신이 돌아올텐데 말이야. - 청심환을 먹였는데도. - 속수무책이다. - 어쩜 좋아. 어쩜 좋아.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지 않더구만요. 기절하도록 맞은 사람이 사흘이 되도록 정신이 안돌아오다니. 급한디는 그만이라는 청심환을 먹고도 정신이 안돌아 오다니. 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지요. 그저 이제는끝이라는 그런 마음만 가슴을 꽉 매우다 그런디 그 다음날.
- 화자야. 화자야. 화자야. 화자야, 너 왜 이러고 있니? 막이 올라간 뒤 여기 이러고만 있으면 어떡허니. 응? - 흑. 흑... - 내가 대신 할 수만 있다면 너 대신 내가 무대에 서겠다고 그럴수도 없고 어떡허니. 나가야지 안 나가고 배길 도리가 있니? 응? 누가 니 마음을 살펴주니. 아무도 니 사정 봐줄 사람 없어. -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냥. - 화자야. 다음 니 차례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렇게 멍하니 있다간 실수해. 정신 좀 차려 이것아. - 걱정마 언니. - 아휴. 아슬아슬해서 견딜수가 있나. - 하나꼬. 하나꼬, 준비 됐지? - 나가봐라. - 어. - 정신 차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무대에 서야하는 화자의 심정. 그러나 그 즈음 화자의 무대는 좀 화려해지고 있었다. 삼촌한테 훈련을 야무지게 받은데다가 용모가 단정하고 보니 관중의 반응이 썩 좋은 편이어서 무대 1년 남짓에 2년 경력의 일본여자 보다도 출연 횟수가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다. 한 때는 무대에 서기위해 야마모도의 히롱을 감수 한 적도 있었지만 그 즈음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탈출, 그것 뿐이었다. 숙자가 염려한데로 화자는 사다리에서 기어이 굴러 떨어졌다.
게다가 그녀는 떨어지면서 우리말로 비명을 질러버렸다. 어찌된 셈인지 일인들은 무대에 세우는 사람들 중에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을 악착같이 감추려 했는데 그 때문에 실수하는 한국인이 다급한 상황에 몰려 우리말로 비명을 지르면 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 이리 와. 이것들이 그렇게 혼이 나고도 아직도 정신이 안들었어? 어? - 어어.. - 오늘은 한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이다. 하얼빈 공연 사흘째 벌써 두번째야 두번째. 단풍을 깨도 유분수지 어따대고 애곰이야. 어디한번 죽어봐라.
- 어어... 나 나 물좀. - 여깄어. - 정철 아저씨는. - 그 정신에도 정철씨니? - 아저씨 있는데로 데려다 줘요. - 니가 간다고 그 사람이 살아나니? 아직도 그러고 있는데. - 같이 죽을거야. 같이 죽어버릴거야. 더는 못 살아. - 그러게 내가 뭐랬니. 정신 차리랬잖아. 너까지 이러면 어떡해. 아휴, 속상해. - 숨 한번만 넘어가면 이 고생 안해도 되잖아.
통속에 들어가있는 두 시간은 너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한시간만 쳐박혀 있어도 그날 두시간을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더니 그냥 죽어버리는게 낫겠다 싶더구만요. 피가 모두 머리로 쏠리는데 거기다 숨구멍까지 확 트인게 아니라 그 고통이 어떻겠어요. 하지만 나는 기다시피해서 정철 아저씨를 보러 갔습니다. 숙자 언니가 부축해 주는것도 뿌리치고 나는 죽겠다는 결심만 자꾸 하면서 갔지요. 마음만 먹으면 죽어질것 같았지요.
허나 정철은 그 때 까지도 인사불성 이었다. 굵직한 각목이 부러질때 까지 닥치는데로 맞은 그의 처참한 육신에서 그의 슬픈 영혼은 아주 떠나는 것인가. 그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 아저씨, 우리 같이 죽어요. 같이 죽어요. 아저씨 혼자 죽지 말고 나랑 같이 죽어요. 너무 외롭잖아요. 혼자서 죽기도 외롭고 혼자서 살기도 외롭고. 아저씨, 우리 정말 죽어요. 죽어야 해요 우리. 죽으면 아무도 우릴 헤치지 않을거에요. 아무도 아저씨 한테... 아무도 날 통속에 거꾸로 쳐밖지 않을거야. 죽으면 일본놈 같은... 왜냐면은 우린 죽으면 고향에 갈거니까요. 고향에 가면 어머니도 있고 참 좋을거에요. 그죠?
늪 속에 빠져들 듯 그녀는 죽음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었다. 한번도 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그녀. 무대에 서고 싶었던것도 일인들의 학대를 감수했던 것도 모두 살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지금 그녀는 그렇게 몸부림쳤던 지난 순간들을 저만치 떨쳐 보내고 어둠속에 뼐려 들어가고 있다.
장미자, 이동주, 양성진, 유민석, 이기전, 김한진, 안경진, 정경애, 신성호, 서지원, 유해무,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 제2회 동아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아홉번째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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