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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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8회 - 정자가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제8회
정자가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1980.05.13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여덟번째.

- 아, 빨리 빨리 가라 이 조센진들아. 아니 이것들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미적거리면서 개수작들을 부린다니. 어? 빨랑 빨랑 가. 이 새끼야.

- 아저씨.

- 아무말 말고 걸어라. 오늘밤은 틀린거 같다. 내일 새벽을 기다려 보는 수 밖에.


- 도리가 없었다. 칼을 빼들고 대열을 따라오는 놈들의 눈을 피하기란 목숨을 내놓기 전에는 어림없는 이야기였다. 화자와 정철은 눈 한번을 돌리지 못하고 여관에 당도했다.


- 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구나.

- 놈들이 눈을 까 뒤집게도 됐죠. 배에서 부터 도망자가 나오니.

- 왜 정자 걔는 배에 숨어 가지고 미련하게시리. 오가는 도중에 도망을 쳐도 칠 것이지. 후... 이렇게 엉뚱한데서 일이 틀어질지는 몰랐구나. 내일 새벽이라고 별 수가 있을것 같지가 않아.

- 그럼 어쩌죠. 네?

- 만사가 왜 이렇게 어렵기만 한지 모르겠다.

- 아휴.

- 가서 쉬어라. 내일 일은 내일 닥치는데로 하기로 하고. 괜히 여기 있다가 또 놈들 눈에 띄면 좋지가 않아. 그렇지 않아도 눈들이 뒤집혀 있는데.

- 그런데 정자는 어떻게 될까요.

- 어. 단장한테 끌려가는건 봤는데 이상하게 찍소리가 없으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겠어.

- 단장 방이 어디에요?

- 저쪽 구석방인가 보더라. 한데 근데 그건 왜.

- 왠요. 궁금해서 그러죠.

- 괜히 얼씬 거리지 말고 어서 방에 들어가.

- 네.


- 아휴, 이상하다.

- 뭐가.

- 어. 너 아직 안자고 있었니?

- 잠이 와요?

- 왜 이렇게 끽 소리가 없지?

- 아주 목을 눌러버린거 아닐까?

- 아주?

-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조용할리가 없잖아. 어떤 놈들이 정잘 그냥 놔주겠어.

- 누가 아니래.

- 지금 몇시나 됐을까.

- 아마 한시도 넘었을거다.

- 정말 아주 죽은거 아니야. 언니?

- 얘, 우리 단장방으로 한번 가볼까?

- 가서 어쩌려고?

- 문틈으로라도 봐야지. 궁금해서 살겠니. 응?

- 하지만 그러다 들키면.

- 들어봐. 쥐 죽은거 같애. 다 잠들었다구. 소리 안내게 살금살금 한번 기어가보잔 말이야.

- 난 그래도 무서워.

- 그럼, 나 혼자 가는 수 밖에.

- 아니야. 같이가 언니.

- 괜찮겠니?

- 겁은 나지만.

- 아니 그럼 따라와.
걷지 말고 기어. 그래야 소리가 안 나.

- 어. 알았어.


- 숙자 언니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라서 그런지 가끔씩 그렇게 간 큰 짓을 했습니다. 그런디도 별로 실수 같은걸 하지 않았지요. 그래 나도 숙자 언니를 믿고 방을 빠져 나가서 단장 방 앞까지 무릎으로 기었지요. 헌디 단장 방에 정자는 없었구만요. 문틈으로 들여다 보니께 단장이 불을 켜놓은 채로 혼자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마모도 방으로 갔지요. 헌디 정자는 거그도 없었지요.


- 이상하지.

- 그러게 말이야.

- 아휴. 이것들이 이 애를 아주 죽여서 내다 버린건 아닐까.

- 설마 그럴리야.

- 설마가 아니야. 얼마나 잔인한 놈들이라구. 가만 졸개들 방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 다시, 무릎 걸음으로 복도를 돌았다. 하지만 그 방에도 정자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정자 찾는 일을 단념하고 방으로 도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아아...

- 이게 무슨 소리지?

- 글쎄.

- 어디서 났니?

- 글쎄.

- 저 방인가? 저 구석 방. 이리 와봐.
아니, 문이 조금 열려있네.

- 하지만 뭐가 보여? 불도 없는데.

- 아아...

- 아이 가만.

- 왜.

- 아아...

- 정잔가봐. 정자.

- 그래?

- 어머!


- 차라리 안 볼걸 그랬어. 안 봤으면.

- 사람도 아니야. 사람이 아니야. 저놈들이 사람이니? 응? 사람이야? 차라리 죽여버리지 그게 뭐야 그게. 그 어린걸 어쩜 그럴수가 있어.


- 너무도 참혹한 광경이었다. 손바닥만한 들창으로 흘러들어온 달빛에 드러난 광경은 너무도 끔찍했다. 갈갈이 찢긴 하반신을 드러내놓은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정자.

- 정말이지 그렇게 참혹하게 쓰러져 있는 여자를 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백옥같은 열일곱 나이에 어쩌면 그런 일을 당할 수가 있었을까요. 지금도 그 모양이 눈에 선하고만요. 백지장 같은 얼굴에 달빛은 또 어찌 그리도 푸르게 쏟아 지던지.

- 그러나 정자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 자아, 출발한다. 정자 그년 끌어 냈으면 앞장을 세워.

- 자, 똑바로 서. 똑바로.

- 아니 그년 아직도 정신이 안 든거 아니야? 왜그리 흐느적 거리는거야. 어서 출발 해.

- 예. 자, 가자.

- 저러다 정자 죽겠다. 걷지도 못하는 애를 개처럼 끌고 가다니.

- 차라리 죽는게 나아요. 저러고 또 살면 뭐해요.

- 그래. 차라리 죽는게 낫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한테 저런 수모를 받고 더 살면 뭘 하겠니.

- 남의 일 같지가 않아요.

- 남의 일이 아니고 말고. 그러니까 우린 어떡하든 이 놈의 소굴 빠져나가야 해.

- 어떻게 빠져 나가요. 꼼짝 달싹 할수도 없는데.

- 틈을 만들어야지.

- 난 못해요. 난 못가겠어요.

- 못하겠다고.

- 정자 꼴을 보세요. 도망가다 잡히면 나도 저 꼴이 될 거 아니에요.

- 그러니까 안 잡히도록 해야지. 왜 잡힐 생각을 해.

- 하지만 오늘은 안 돼요. 오늘은 승산이 없다구요. 알면서 왜 그러세요.

- 승산 없는 줄 알면서도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올라서 한 시도 더 여기 있고 싶지가 않아. 정말 더는 못 있겠다. 여기 더 있다가는 나도 머지않아서 개가 돼 버릴지도 몰라.

- 하지만 오늘은 절대로 안돼요.

- 더러운 놈들.


- 여기가 어디에요?

- 밀양이다.

- 이리로는 안 지나가죠?

- 이리론 안가. 부모 생각 하니?

- 삼촌도 있잖아요. 이리에.

- 네 삼촌은 죽어서 갔지. 어쩌면 이러다 우리도 죽어서나 고향에 갈지 모르겠구나.

- 죽어서나.


- 얼마나 그리던 고향 산천 이던가. 얼마나 그리던 부모님 얼굴 이던가. 지척에 고향을 두고 그 고향을 스쳐가는 그들의 가슴속에 피눈물이 흘렀다. 더구나 한쪽 구석에 앉혀놓은 정자의 넋빠진 모습. 그 모습 때문에 그들의 설움은 한 층 더했다. 그런데 기차가 대구를 지날 때 쯤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 정자야.

- 정자?

- 아니, 쟤가.

- 아니, 정자야 왜 그러니?

- 쟤 미친거 아니니?

- 뭐? 미쳐?

- 저 눈을 좀 봐. 눈.

- 그래. 미 미쳤나봐. 눈이 하얘가지고 이상해. 어머나.

- 정자야, 정자야. 날 봐. 나라니까 나. 나 알아 보겠니?

- 엄니.

- 엄니?

- 엄니. 엄니.

- 정자야, 정신차려. 나란 말이야. 나.

- 엄니, 어디갔다 이제 왔어. 내가 얼마나 찾았다구.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 완전히 돌아버렸어. 돌아버렸어. 정자야.


- 개처럼 끌려서 짐짝처럼 기차에 태워진 정자. 그녀는 앉혀놓은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완전히 넋이 빠져 버린것 같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웃기 시작한 그녀. 그녀는 미쳐있었다.


- 이럴수가 없어. 이럴수가. 정자야, 정신 차려라. 정신.

- 엄니, 왜울어. 배고파? 배고파 그래? 배고파서 우는거야?

- 정자야, 엄니가 아니야. 숙자언니 아니니. 자 이리와봐. 자 여기 좀 앉어보렴. 응?

- 이거 놔.

- 왜. 왜그러니 정자야.

- 개새끼.

- 뭐?

- 이 야마모도 놈아.

- 정자야?

- 날 봐. 정철 아저씨야. 자, 이리 와.

- 이 더러운 새끼. 어째서 날 팼니.

- 정자야. 난 야마모도가 아니야. 날 똑똑히 봐. 나 정철 아저씨야. 정철 아저씨.

- 이거 놓으란 말이야. 놔! 놔! 놔!


- 정자는 완전히 미쳐있었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어쩌면 하룻밤 사이에 미쳐번질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했으면 미쳐번졌을까요. 정자는 정철 아저씨 뿐만 아니라 남자만 보면 펄펄 뛰며 발광을 했습니다. 걔 눈엔 모든 남자가 다 야마모도나 그 졸개들 같이 보였던거죠. 참말로 기가 막히는 일이었구만요. 정자가 하는짓을 보고 있으니께 안그려도 서러운 마음 눈물을 걷잘수 없이 흐르더군요.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던 우리 동포들은 모두들 정자를 붙들고 울었습니다. 정자 신세나 우리들 신세나 조금도 다를게 없었기 때문이죠. 그란디 정작 기가 막힌 일은 하얼빈에서 일어났습니다.


- 모두들 내릴 준비를 해라.


- 멀고 먼 여행이었다. 섬에서 반도를 거쳐 대륙 깊숙이까지 눈물을 뿌리며 달려온 여행. 모두들 지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자가 없어진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숙소로 이끌려 갔다.


- 아이고, 피곤해라. 꼬박 사흘을 배타고 기차타고 했더니 머리가 다 빙빙도네 그랴.

- 머린 놔두고 허리가 아파서 난 죽을뻔 했어. 어디가 좀 드러누웠으면 좋겠어.

- 드러 누울새가 어딨어? 금새 또 천막 치라고 들이닥칠텐데. 개같은 놈들. 그저 우리를 못 잡아 먹어서 눈이 시뻘개가지고.

- 참, 정자는 어딨지?

- 아니, 그러고보니 정자가 안보이네.

- 참, 정말 정자가 안보여. 정자 어딨는지들 몰라?

- 그러고보니까 역에서 내릴 때 부터 안 보였어.

- 그래 역에서 부터 안 보였어.

- 아니야. 역에서 부터 안 보인게 아니라 기차안에서 부터 안 보였어. 아우, 내릴 준비 하느라고 그만 깜빡들 했잖아? 생각 나지?

- 그래. 그래. 그랬어.

- 아니, 그럼 얘가 어디갔지? 분명히 우리하고 같이 안 온거지?

- 아이 안 왔다니까 그러네. 봐 어디 있나?

- 아니 그럼 놈들이 데리고 갔나. 미쳐서 날 뛰니까 엇다가 두고 온거 아니야?

- 야야야. 거기서 웅성 거리지들 말고 천막 칠 준비 해.

- 여보시오.

- 왜.

- 정자 어딨어요.

- 정자?

- 엇다 두고왔어. 정자.

- 두긴 엇다 둬. 있어야지 뭘 엇다 두고 말고 하지.

-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있어야 두고 말고 하다니.

-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정자 그 년은 지금 여기 없어.

- 없다구요?

- 그래 없어.

- 그럼 걔가 어디있단 말이오.

- 아, 여기 여기 없으면 어디 있냐구요.

- 정자, 걔는 죽었다.

- 뭐? 죽어?

- 그래 죽었다. 그 미친년이 기차에서 뛰어 내렸어.

- 기차에서 뛰어내려?

- 그렇다. 이것들아. 그래서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어. 이제들 알겠어?

- 정자가 죽었다고?

- 아니, 정자 걔를 혹시 이것들이 기차에서 떠밀어 버린거 아냐?

- 떠밀어?

-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 아니겠어? 미쳐 날 뛰니까 귀찮아서 이놈들이 떠밀어 버린거 아니야? 응?

- 맞다. 맞어. 이것들이 떠밀어 버렸을거야. 틀림 없어.

- 아니, 이것들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고 있나. 조선말 하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그래?

- 닥쳐라 이놈아.

- 뭐라고?

- 야, 정자 찾아내.

- 찾아내. 찾아내.

- 아니, 왜들 이러니.

- 정자 데려와. 이 자식아.

- 야, 이 자식들아. 놔 이 자식들아.


- 장미자, 유민석, 윤병훈, 유근옥, 김한진, 이기전, 안경진, 정경애, 양미학, 신성호, 서지원, 유해무, 장춘순, 홍경화,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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