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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7회 - 부산행 배. 탈출을 계획하다.
제7회
부산행 배. 탈출을 계획하다.
1980.05.12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일곱번째.

1931년 1월, 화자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 화자는 부산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착지는 부산이 아니라 하루빈, 배편으로 부산까지 가서 다시 기차로 한국땅을 지나서 하루빈으로 갈 참이었다.


- 이제 두어시간만 가면 부산이지 화자야.
- 그런가봐.
- 고향 산천이 가까워 오는구나.
- 정자 넌 고향이 어디니?
- 하동이 내 고향이야.
- 하동?
- 부산서 얼마 아니야. 진주까지만 가면 금방이지 뭐.
- 내 고향은 이리야. 너 보다는 멀지만 그래도 부산까지만 가면 하루 해안에 들어갈 수 있을텐데.
- 하. 엄니 얼굴이라고 한번 봤으면.
- 나두야. 난 우리엄마 얼굴도 잘 기억안나. 정말 엄마 얼굴 한번 봤으면 원이 없겠어. 고향 산천이 가까워 오니까 미치겠어.
- 차라리 고향땅 근처로 데리고 오지나 말지. 코 앞에서 고향을 두고 가보지도 못하고.
- 근데 만주까지 가면서 우리 조선땅에서는 왜 공연을 안하는지 모르겠다. 공연이라도 하면 혹시 우리엄마 만나 볼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 누가 아니래니.


아닌게 아니라 그들은 한번도 한국에서 공연을 하지 않았다. 그 속셈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한국에서의 공연이 수지타산이 안맞는 장사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워낙에 규모가 큰 서커스단이고 보니 왠만한 도시에서는 해봐야 이동하는데 드는 경비도 안나올 공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산까지 가는데도 관부 연락선을 놔두고도 커다란 배 한척을 전세 내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헌데 김정철은 부산가는 배를 타며 세밀한 탈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드디어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화자야, 잘 들어라.
- 네.

기회는 부산에서 하룻밤 잘 때 그 때 뿐이다. 배가 부산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이고 기차타는 시간은 다음 날 새벽이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행동할 때가 언제냐 하면은 배에서 여관으로 갈 때 하고 여관에서 기차타러 갈 때 그 둘 뿐이야. 여관으로 갈 때도 어둡고 기차타러 갈 때도 새벽이니까 어두워. 겨울 새벽은 밤이나 마찬가지잖아. 게다가 오고가고 할 때는 아무래도 어수선 하니까 기회가 좋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때를 잘 이용해야 돼. 알아듣지?

- 네.
- 이 때를 놓치면은 또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지 몰라. 어디 부산엘 자주 오니? 중국엘 가도 우리땅 안 밟고 곧바로 배타고 갈 때가 더 많잖아. 그러니까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 네.
- 그렇다고 긴장하면 안돼요. 놈들이 눈치 챈단 말이야. 안그래도 부산엘 가면 우리가 술렁거릴까봐 감시가 대단할거라고.
- 하지만 가슴이 떨리는걸요.
- 나도 마찬가지야. 붙잡히면 병신 되도록 맞아야 하는데 왜 안 떨리겠니. 실패 하면은 이번에야 말로 난 병신이 되고 말거야.


아닌게 아니라 정철 아저씨는 야마모도 한테 그렇게 맞고도 다행히 병신은 되지 않았지요. 야마모도란 놈이 병원한번 못가게 행패를 부렸지만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께. 약 가진 인도사람들도 있고, 부러진 팔 붙일 줄 아는 중국사람들도 있어서 그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병신은 면했구만요.


- 화자야.
- 네?
- 거기서 뭐하니. 배가 항구로 들어가고 있어. 곧 부산에 도착하는거야.
- 저기가 부산이라고요?
- 그래. 저기 저 불빛 모여있는데가 우리 고국땅이야.
- 불빛도 다른거 같아요. 고향 불빛은.
- 그래. 불빛도 다르다.
- 가슴이 막 쿵쾅 거려요.
- 나도 그래.
- 아저씨.
- 쉿, 누가 온다.
- 거기 누구야.
- 네. 하나꼬에요.
- 하나꼬. 그 옆에 있는 놈.
- 저 정철이오.
- 너희들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야.
- 아이 뭘 하긴요. 바깥 바람 쐬고 있죠. 선실 안이 갑갑해서.
- 바람을 쏘여도 두 놈이 같이 쐬야 되나. 에? 이것들이 언제든지 같이 붙어 앉아서 히히덕 거린단 말이야. 이것들이 야마모도 감독 약올릴려고 작정들한거 아니야. 응?
- 아니 그럴리가.
- 단장님이 도데체 왜 너를 털끝하나도 안 건드리고 그냥 둬가지고 저런 놈 좋은 일만 시키는지 알 수가 없어. 도대체. 하하. 하지만 좋아들 하지 말아. 내가 봐도 창자가 뒤틀리는데 야마모도 감독이 너희들을 그냥 둘것 같으냐?
- 네?
- 야마모도 감독이 하나꼬 니가 저놈하고 바람난거 단장한테 일러 바치기만 하면 너희놈들도 끝장이야. 끝장! 그 소릴 듣고도 하나꼬 너를 단장님이 그냥 고스란히 놔둘것 같애? 하하하하. 어림없는 짓이지.
- 씨...
- 음? 아니 너 왜 눈에 불을 키고 그래. 날 칠 테냐? 음. 한번 살려줬더니 두번 살려줄줄 알고 까부는구만.
- 이게.
- 아저씨.
- 응? 검열인가. 네 놈 말이야 네놈. 아직도 살려거든 보자고. 응?
- 아저씨, 왜 또 그랬어요. 네?
- 뭐가 걱정이니. 부산 내려서 저놈들 얼굴 또 볼것 같아서 그래?
- 하지만.
- 그런 걱정은 말고 정신이나 바싹 차려. 너 말이야, 배에서 내려서 부터는 내 곁에 꼭 붙어다녀야 한다. 언제 어디서 들고 뛸지 모르니까 꼭 붙어 있다가 내가 신호만 하면 들고 뛰는거야. 그리고 뛸 때는 절대 같이 뛰면 안돼. 너랑 나랑 반대 방향으로 뛰어야 돼.
- 제각기 뛴다는 거에요?
- 그래야 붙잡히지 않지.
- 하지만 누구 한 사람만 붙잡히면 어떡해요.
- 그러니까 붙잡히질 않아야지.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몸 하나는 날쌔잖니?
- 날쌔기는 그놈 들도 우리 못지 않아요.
- 허긴. 하지만.
- 같이 뛰어요 우리. 가도 같이 가고 붙잡혀도 같이 붙잡혀야죠. 안 그래요?
- 그건 그렇다만은 제각기 뛰어야 저 놈들이 헷갈려서 쫒아오지 않도록 저만치 달아나는거지. 그래가지고 그놈들 떠난 다음에 만나는거야. 내일 아침에.
- 어디서.
- 그놈들 떠나고 난 부산역 앞에서. 왜.
- 난 싫어요.
- 싫다니.
- 같이 뛰어요. 제각기는 싫어. 불안하단 말이에요. 나 혼자 어떻게 뛰어요. 아저씨하고 같이래야 뛰지.
- 화자, 내 말 못 알아 들었니?
- 못 알아 듣긴요.
- 그럼 내 말대로 하는거야. 그래야 성공할 수가 있어.
- 꼭 성공 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그런데 혼자 뛰어요? 그러다 서로 떨어지게 되면 어떡하냐구요. 네? 도망 못가는것 보다도 내가 아저씨랑 떨어져 있게 될까봐 그게 더 겁난다구요. 나 이제 아저씨 없으면 못 살아요. 못 살아요.
- 화자, 나도 너 없이는 못 산다. 너만 보면은 세상 시름을 다 잊어.
- 아저씨.
- 니 말대로 죽든 살든 함께 가자. 어디든 함께 가자. 전라도로 가든 강원도로 가든 어디든 고향 가까운데로 가서 움막이라고 짓고 우리 둘이 사람처럼 한번 살아보자. 난 니 서방이 되고 넌 내 색시가 되서 말이다. 응?
- 그래요. 아저씨. 그렇게 살아요 우리. 거머리 같은 왜놈들도 없고, 우리 떼 놓으려는 야마모도 놈도 없는 고향 땅에서 아저씨랑 단둘이 살면 .


그들은 꿈에 부풀었다. 사랑에 부풀고 부산항에 반짝이는 고향의 불빛에 부풀고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그들은 부풀어 있었다. 과연 그들 애닯은 청춘 남녀의 꿈은 이루어 질 것인지.


- 다들 일렬로 서라는데 뭘 꾸물거리고 있어. 어서 일렬로 서. 일렬로. 어?
- 아저씨, 왜 이러는 거에요. 네? 왜 딴나라 사람들 먼저 보내고 우리나라 사람들만 따로 모아서 가려는 거죠? 네?
- 몰라서 그러니? 도망치는 사람 있을까봐서 저것들이 미리 손을 쓰는거야. 우리만 따로 모아서 가면 감시가 더 쉽잖아.
- 어머, 그럼 어쩌죠? 우린 어째요.
- 내 이럴줄 알았어. 이럴 줄 알고 생각해 논게 있어.
- 그게 뭔데요.
- 잘 들어 내말.
- 네.
- 줄 지어서 가다가 캄캄한 길로 접어들면은 넌 잡자기 길바닥에 주저 앉으면서 죽는소릴 해라. 배아프다고 말이야.
- 그러면요.
- 그러면 감시 하는 놈 하나가 너랑 뒤로 쳐질거 아니냐.
- 그렇죠.
- 그러면 내가 쫒아가서 그 놈의 머리통을 내리쳐버릴거야. 놈이 쓰러지면은 우리는 뛰는거야. 어때?
- 글쎄요. 그렇게 잘 될까요?
- 놈들보다 스무 발자국만 먼저 뛰면은 잡히지는 않아. 부산바닥 서툴기는 저희나 우리나 마찬가지니까.
- 빨리 빨리 줄 서라니까 이것들이 왜이리 꾸물거리나. 어? 빨리 빨리 서!
- 어. 줄들 다 섰나? 다 섰으면 머리수를 세어봐.
- 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 화자야, 내 옆에 꼭 붙어있어야 한다.
- 알았어요.
- 가다가 내가 신호 하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 네.
- 아니, 한 놈이 모자라잖아.
- 뭐이? 모자라?
- 네. 하나가 모자랍니다. 스물 여덟인데 지금은 스물 일곱 뿐이라구요.
- 아니 없는게 누구야. 누가 없어. 누가 없는지 빨리 빨리 알아 내.
- 정자라는 년이 안 보이는데요.
- 정자.
- 네. 분명히 안 보여요.
- 아저씨, 정자가 안보인다니 어찌된 일이죠?
- 글쎄. 아까 배에서 봤는데.
- 나도 봤어요. 나랑 얘기도 한참하고 그랬는데.
- 혹시, 바다에 빠져 죽어버린게 아닐까?
- 빠져 죽어요? 왜요?
- 죽고 사는거는 한순간이야. 한순간 마음 잘못 먹으면 못 뛰어들것도 없지 뭐.
- 어서 가서 배 안을 샅샅이 뒤져 봐.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샅샅이 뒤져 샅샅이.
- 네.
- 아저씨, 정자 아마 배 안에 있을거에요. 죽지 않았을 거에요.
- 배 안에 있다면은 들키지 말아야 할텐데. 일이 재미없게 돼가는군.
- 아니 그게 무슨소리에요?
- 정자가 안 죽고 배 안에 있다면은 들켜도 큰일이지만 안 들켜도 우리한텐 재미가 없단 말이야.
- 아 정말.


정자는 나하고는 동갑내기 였는데 2년 전에 서커스단에 팔려온 아이였지요. 어떻게 해서 팔려왔는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은 팔려온 사정이야 들으나 마나 뻔한 일이지요. 헌디 정자는 배 안에서 끌려 나왔습니다. 월매나 깊이 숨었던지 근 한 시간만에 정자는 두 왜놈들 손에 질질 끌려서 부두로 나왔습니다.


- 아저씨, 정자.
- 큰일 났구나. 큰일 났어.
- 이리 와! 조센진 계집아.
- 이년 어디서 찾았어.
- 아 글쎄 여기 옷 상자 속에 숨어있지 않습니까. 배 밑창까지 다 뒤져도 없어서 죽은 줄 알고 그냥 나오려다가 짐 상자를 낱낱히 풀어 헤쳤더니 옷상자 속에 들어앉아 있지 않습니까.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구요. 요걸 어떻게 할까요.
- 여관으로 끌고가라.
- 네?
- 아주 본 떼를 보여주지. 그 따위 수작을 하다가 어떻게 되는지 본떼를 보여주지. 이 년 부터 끌고 가.
- 네. 일어나!
- 이것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따위 수작이야 수작들이. 너희들 똑똑히 들어. 여관까지 가는 동안에 틀리는 짓 하면 그냥 그자리에서 죽여줄테니까. 알아서들 놀라고. 원한다면 이 니뽄도로 숨통을 끊어 줄테다. 자, 죽고싶어 환장한 것들 있으면 어디한번 도망쳐 보라고. 이것들 돈 쳐들여서 사와가지고 밥주고 옷주고 해놓으니까 이제와서 도망질이야? 이 더러운 조센진 년들 같으니라고.
- 아저씨.
- 겁낼 것 없어.
- 저 칼이 안보여요? 아저씨.
- 음.
- 아저씨, 오늘은 그만두는게 낫겠어요. 오늘은 안되겠어요 아무래도.
- 하지만.
- 살려고 가는 도망질인데 가다가 죽으면 어떡해요. 개죽음 할 순 없잖아요 아저씨. 네?
-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너랑 나랑은, 너랑 나랑은.


도망을 갈 수도 없고 안 갈수도 없는 상황. 과연 그들의 앞날의 길은 열릴 것인지.


장미자, 유민석, 윤병훈, 유근옥, 정경애, 신성호, 서지원,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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