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다섯번째.
오사카. 우리의 장한 할머니 이화자 씨는 눈물 없이 오사카를 회상하지 못한다. 오사카는 물론이요 도쿄, 나고야, 교토 등 일본 전역과 중국대륙 더 멀리는 뜨거운 동남아까지 그녀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드물고 가는곳마다 눈물 뿌리지 않은 땅이 없지만 오사카에서 처럼 그렇게 피 같은 눈물을 뿌린적이 또 있었을까.
오사카에서의 이틀째 밤, 바로 그 밤.
- 아니, 하나꼬. 왜그러니? - 네? - 왜그렇게 얼굴이 백지장 같지? 어디 아퍼? - 아니에요. - 아니 그런데 왜그렇게 하얗게 질려있지? 무슨일이 있었어? - 이상해요. - 뭐가. - 이상해요. - 뭐가 이상하냐니까. - 몰라요. - 아아아악. - 아니. - 아니, 무슨일이야. 어? - 화자야! 삼촌! - 삼촌! - 물물물. 담요 가져와요 담요. - 이제 정신이 드니? - 삼촌. - 화자야. - 삼촌 어디있어. 어? - 병원에. - 병원? 어느 병원. 왜 울고 있어. 설마... 우리 삼촌 죽었어? - 아니야. - 어느 병원이야. 빨리 말해요. - 같이 가자.
무신 정신으로 병원까지 달렸는지 모릅니다. 아니 달린게 아니고 그거는 기어간거나 마찬가지 였지요. 마음만 급했지 발은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으니께요. 나는 숙자언니 한테 끌려가다시피해서 간신히 병원까지 갔었습니다.
- 삼촌!
그러나 삼촌은 대답이 없었다. 온 몸에 온통 하얀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삼촌. 그는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화자는 그만 그 자리에 폭 주저 앉았다. 그리곤 다시 정신을 잃었다.
- 나, 물. - 음. 그래. 물 마시고 정신 차려. 자. - 우리 삼촌. - 삼촌 쳐다보지 마. 또 기절할라. - 아저씨, 우리 삼촌 살 수 있데요? - 화자야. - 설마 죽는건 아니겠죠? 네? 네? 아저씨. - 화잘두고 삼촌이 어떻게 죽겠니. 죽고 싶어도 못 죽어. 못 죽고 말고. - 하나님, 우리 삼촌 살려주세요. 우리 삼촌 좀 살려주세요. 우리 삼촌. -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모르겠다. 너희 삼촌이 실수를 하다니. 불 속을 한해 두해 뛰었다고 불을 안고 넘어지니. 눈 감고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왜 두눈을 다 뜨고 불을 안고 넘어지니.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를일이야. 모를일. - 아저씨, 우리 삼촌 죽으면 어떡해요. 어떡해요. 우리 삼촌 죽으면.
그러나 그녀의 애끓는 기도도 외면한 채 삼촌은 다음날 저녁 말 한마디는 커녕 눈 한번을 뜨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완강한 30대 까맣게 탄 육신을 하얀 붕대로 감싼 채 그는 어린 조카를 혼자 남겨두고 훌훌히 떠나버렸다.
- 아으. 왜 죽어. 왜 죽어. 왜 죽어.
두살 때 부모 품을 떠나 열여섯이 되도록 삼촌과 더불어 찬 손을 비비며 살아 온 그녀. 그녀에게 있어 삼촌은 어머니요 아버지요 형제요 스승이었다.
- 화자야. 화자 자니? 화자야. 눈 좀 떠봐라. 응? - 나, 눈 뜨기 싫어. - 그럼 눈 감고 물이라도 좀 받아 먹어라. 이러다가 너도 죽겠다. - 나 살고 싶지 않아 언니. - 니 맘 다 알어. 하지만. - 나 제발 좀 내버려 둬요. 귀찮어. 말하기도 귀찮고 듣기도 귀찮고 다 귀찮어 다. 다 귀찮아. 다. - 화자야.
- 정철 씨. - 왜요. - 화자한테 좀 가봐요. 물 한모금을 안 먹어요. 좀 가보세요. - 내 말이라고 듣겠어요? - 아이 그래도 좀 가봐요. 마냥 저렇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에휴, 해도해도 너무 해요. - 내가요? - 하나님이요. - 하나님? - 드러운 팔자 목숨이라도 길게 줄것이지. 어디 잡아갈 사람이 없어 화자 삼촌을 잡아가니. - 하늘 원망은 마세요. - 어째 하늘을 원망 안하겠어요. - 내 탓인지도 몰라요. - 내 탓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 안먹는 술을 먹었거든. 그날 나랑 둘이. - 난 또 무슨 소리라고. - 가만히 생각하니까 - 듣기 싫어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말아요. 화자 삼촌은 내가 잘 안다구요. 정철씬 여기 온지 7년 밖에 안됐지만 난 15년 이에요. 화자 삼촌은 16년이고. 내가 15년을 봤지만 화자 삼촌 술 먹었다고 실수하는거 한번도 못 봤다구요. 요샌 술 안먹었지만 옛날엔 고래였지. 하지만 아무리 취해도 실수는 안한다구요. 눈 감고도 불 속 같은거 백번도 더 뛸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 하지만. - 아이 술 때문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다 씌인데가 있어서. 아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말고 화자한테나 좀 가보세요. - 가도 소용 없어요. - 뭐라구요? - 가만히 내버려 두는게 나아요. - 아이 그래도. - 지금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도움이 안돼요. 그보다도 나는 야마모도란 놈이 걱정이에요. - 야마모도가 왜요? - 사람이 불에 타죽어도 눈하나 까딱 안하는 놈. 화자 사정 같은거 봐줄리 없고, 기운도 차릴 새 없이 무대에 끌어낼까봐 걱정이라구요. - 짐승같은 새끼. 그놈이 그러고도 남죠. - 그러다가 줄에서 떨어지기라도 해봐요. 그 매를 어떻게 견디겠어요. - 그것도 걱정이지만 이제 삼촌이 없어서 화자가 큰일이에요. 단장이란놈 그놈도 야마모도 그 새끼랑 다를게 없는데. 아휴 참말로 화자한텐 삼촌이 꼭 있어야 하는건데.
- 음...어... 음음... 어... - 아니 얘가. 화자야, 화자야. 왜그러니? 왜그래 꿈꿨어? - 무서워. - 무슨 꿈을 꿨니? 어제도 그제도 그렇게 자다말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하고. - 잠을 잘 수가 없어. - 왜. - 눈만 감으면 삼촌이. - 삼촌 꿈을 꾸니? - 눈만 감으면 삼촌이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무대뒤로 뛰어 나가는 모습이. - 아이고. - 어쩌면 그렇게 끔찍하게. - 이이구. 잊혀져야 할텐데 어서. - 어떻게 잊어요. 어떻게 그걸 잊어. - 하지만. - 아마 삼촌이 저 세상에 가서도 편하지 못할거야. 어쩌면 죽어도 그렇게 끔찍하게 죽을 수가 있을까. - 누가 아니래니. - 아마 내 평생 잊지 못할거에요. 평생. - 아이 그러나 저러나 어떡하니 잠을 못 자서. - 무서워요. 눈 감기가. - 아이 그러니 어떡하니. - 내 걱정말고 자요 언니나. - 자꾸 삼촌 걱정 하지마. 자꾸 생각을 하니까 꿈도 꾸는거야.
- 어이고 청승맞게도 부네. - 저 하모니카 누가 부는거에요. 언니. - 몰라. 누가 부는지. 안 잘래? 겁이나서 못 자겠니? - 잠이 다 달아났어요. 자고 싶지도 않고. - 그래도 눈을 좀 붙여야 돼. - 언니나 자요. - 아유 어 어디가니? - 바람 좀 쏘이고 올게요. - 바람? - 답답해요. 가슴이. - 금방 들어와야 된다. 잠 안자고 막사안에 돌아다니다가 야마모도 졸개들한테 들킬라. - 금방 들어올게. - 아이 조심해.
- 정철 아저씨. - 응? 아니 화자 아니야? - 누가 부나 했더니. - 어. 잠이 안와서. 너도 잠이 안와서 나왔구나. - 응. - 화자야. - 네. - 이 세상 나 혼자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너 지금 이 세상 천지에 아무도 없는 외톨박이 같다는 생각만 나는거지? 그렇지? - 생각해 보세요 아저씨. 부모 얼굴도 모르는 내가. - 말 안해도 다 안다. 내가 왜 니 심정을 모르겠니. - 아저씨가 내 심정을 다 아신다고요? - 왜. 모를것 같으냐? -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 하지만 나는 알아. 왠지 아니? 난 니가 남 같지가 않아. 넌 날 남으로 생각하겠지만 난 그렇지가 않아. 후~ 이런말 하면 니가 알아들을지 모르겠다만은 난 니가 남 같지가 않아. 니 삼촌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고 니 삼촌이 없으니까 더 니가 남 같지가 않아. 화자, 넌 내가 싫으니? - 내가 아저씨 좋아하는거 아저씨도 알잖아요. 우리 삼촌 다음으로 난 아저씨가 좋단 말이에요. - 그럼 이제 삼촌이 없으니까 내가 제일 좋겠구나. 날 삼촌 의지하듯 의지해 보겠니? 무슨 일이든 내게 의논하고 말이야. 그런데 너는 내가 왜 좋으니? - 왜 좋으냐구요? - 응. - 불춤 출 때 아저씨는 사람 같지가 않아요. - 내가 불춤을 잘 춰서 좋으니? -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암튼 아저씨가 좋아요. 말로 할 수는 없지만. - 흠... - 아저씨, 나 하모니까 소리 듣고 싶어요. 불어 주세요. - 그래? 그러지 뭐. - 나 아저씨 하모니카 부는거 처음 봐요. - 언제나 이불 뒤집어 쓰고 혼자 불었거든. 조그맣게 말이야. - 그런데 오늘은 왜 여기 나와서 불어요? - 가끔씩 나와서 불고 싶은 때가 있어. 왜? - 아저씬 딴 사람들하고는 달라요. 다른거 같아요. - 허허. - 어서 불어 보세요. 참 듣기가 좋아요. - 무슨 곡으로 불까. - 음. 뭐든지요.
정철 아저씨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께 마음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하더만요. 아니 정철 아저씨 옆에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졌었어요. 아닌게 아니라 나도 아저씨가 남 같지가 않았지요. 그렇다고 정철 아저씨가 삼촌같은 피붙이로 생각되는건 아니었구만요. 그게 남녀간의 인연이라는걸 난 조금 더 자란 후에야 알게 됐지요.
불춤 추는 사나이 김정철. 그 사나이로 해서 이화자 여사는 삼촌을 잃은 슬픔에서 조금씩 헤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나이로 해서 그녀의 젊음은 시작됐고 그로해서 그녀의 젊음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열여섯의 이화자는 그가 그녀의 인생의 희비애락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 하나꼬. 하나꼬 어디있나. - 아니 저 자가 이 밤중에 널 왜 찾는다지? - 글쎄. - 하나꼬. - 네. 저 여기있어요. - 어. 여기있었구나. - 왜 그러세요? - 왜냐고. 헤헤. 왜냐구?
장미자, 윤병훈, 김원진, 안경진, 정경애, 장광,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입력일 : 2007.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