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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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5회 - 삼촌의 죽음 & 로맨스의 시작
제5회
삼촌의 죽음 & 로맨스의 시작
1980.05.09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다섯번째.

오사카. 우리의 장한 할머니 이화자 씨는 눈물 없이 오사카를 회상하지 못한다. 오사카는 물론이요 도쿄, 나고야, 교토 등 일본 전역과 중국대륙 더 멀리는 뜨거운 동남아까지 그녀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드물고 가는곳마다 눈물 뿌리지 않은 땅이 없지만 오사카에서 처럼 그렇게 피 같은 눈물을 뿌린적이 또 있었을까.

오사카에서의 이틀째 밤, 바로 그 밤.

- 아니, 하나꼬. 왜그러니?
- 네?
- 왜그렇게 얼굴이 백지장 같지? 어디 아퍼?
- 아니에요.
- 아니 그런데 왜그렇게 하얗게 질려있지? 무슨일이 있었어?
- 이상해요.
- 뭐가.
- 이상해요.
- 뭐가 이상하냐니까.
- 몰라요.
- 아아아악.
- 아니.
- 아니, 무슨일이야. 어?
- 화자야! 삼촌!
- 삼촌!
- 물물물. 담요 가져와요 담요.
- 이제 정신이 드니?
- 삼촌.
- 화자야.
- 삼촌 어디있어. 어?
- 병원에.
- 병원? 어느 병원. 왜 울고 있어. 설마... 우리 삼촌 죽었어?
- 아니야.
- 어느 병원이야. 빨리 말해요.
- 같이 가자.


무신 정신으로 병원까지 달렸는지 모릅니다. 아니 달린게 아니고 그거는 기어간거나 마찬가지 였지요. 마음만 급했지 발은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으니께요. 나는 숙자언니 한테 끌려가다시피해서 간신히 병원까지 갔었습니다.


- 삼촌!

그러나 삼촌은 대답이 없었다. 온 몸에 온통 하얀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삼촌. 그는 살아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화자는 그만 그 자리에 폭 주저 앉았다. 그리곤 다시 정신을 잃었다.


- 나, 물.
- 음. 그래. 물 마시고 정신 차려. 자.
- 우리 삼촌.
- 삼촌 쳐다보지 마. 또 기절할라.
- 아저씨, 우리 삼촌 살 수 있데요?
- 화자야.
- 설마 죽는건 아니겠죠? 네? 네? 아저씨.
- 화잘두고 삼촌이 어떻게 죽겠니. 죽고 싶어도 못 죽어. 못 죽고 말고.
- 하나님, 우리 삼촌 살려주세요. 우리 삼촌 좀 살려주세요. 우리 삼촌.
-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모르겠다. 너희 삼촌이 실수를 하다니. 불 속을 한해 두해 뛰었다고 불을 안고 넘어지니. 눈 감고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왜 두눈을 다 뜨고 불을 안고 넘어지니.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를일이야. 모를일.
- 아저씨, 우리 삼촌 죽으면 어떡해요. 어떡해요. 우리 삼촌 죽으면.


그러나 그녀의 애끓는 기도도 외면한 채 삼촌은 다음날 저녁 말 한마디는 커녕 눈 한번을 뜨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완강한 30대 까맣게 탄 육신을 하얀 붕대로 감싼 채 그는 어린 조카를 혼자 남겨두고 훌훌히 떠나버렸다.


- 아으. 왜 죽어. 왜 죽어. 왜 죽어.


두살 때 부모 품을 떠나 열여섯이 되도록 삼촌과 더불어 찬 손을 비비며 살아 온 그녀. 그녀에게 있어 삼촌은 어머니요 아버지요 형제요 스승이었다.


- 화자야. 화자 자니? 화자야. 눈 좀 떠봐라. 응?
- 나, 눈 뜨기 싫어.
- 그럼 눈 감고 물이라도 좀 받아 먹어라. 이러다가 너도 죽겠다.
- 나 살고 싶지 않아 언니.
- 니 맘 다 알어. 하지만.
- 나 제발 좀 내버려 둬요. 귀찮어. 말하기도 귀찮고 듣기도 귀찮고 다 귀찮어 다. 다 귀찮아. 다.
- 화자야.


- 정철 씨.
- 왜요.
- 화자한테 좀 가봐요. 물 한모금을 안 먹어요. 좀 가보세요.
- 내 말이라고 듣겠어요?
- 아이 그래도 좀 가봐요. 마냥 저렇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에휴, 해도해도 너무 해요.
- 내가요?
- 하나님이요.
- 하나님?
- 드러운 팔자 목숨이라도 길게 줄것이지. 어디 잡아갈 사람이 없어 화자 삼촌을 잡아가니.
- 하늘 원망은 마세요.
- 어째 하늘을 원망 안하겠어요.
- 내 탓인지도 몰라요.
- 내 탓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 안먹는 술을 먹었거든. 그날 나랑 둘이.
- 난 또 무슨 소리라고.
- 가만히 생각하니까
- 듣기 싫어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도 말아요. 화자 삼촌은 내가 잘 안다구요. 정철씬 여기 온지 7년 밖에 안됐지만 난 15년 이에요. 화자 삼촌은 16년이고. 내가 15년을 봤지만 화자 삼촌 술 먹었다고 실수하는거 한번도 못 봤다구요. 요샌 술 안먹었지만 옛날엔 고래였지. 하지만 아무리 취해도 실수는 안한다구요. 눈 감고도 불 속 같은거 백번도 더 뛸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 하지만.
- 아이 술 때문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다 씌인데가 있어서. 아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말고 화자한테나 좀 가보세요.
- 가도 소용 없어요.
- 뭐라구요?
- 가만히 내버려 두는게 나아요.
- 아이 그래도.
- 지금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도움이 안돼요. 그보다도 나는 야마모도란 놈이 걱정이에요.
- 야마모도가 왜요?
- 사람이 불에 타죽어도 눈하나 까딱 안하는 놈. 화자 사정 같은거 봐줄리 없고, 기운도 차릴 새 없이 무대에 끌어낼까봐 걱정이라구요.
- 짐승같은 새끼. 그놈이 그러고도 남죠.
- 그러다가 줄에서 떨어지기라도 해봐요. 그 매를 어떻게 견디겠어요.
- 그것도 걱정이지만 이제 삼촌이 없어서 화자가 큰일이에요. 단장이란놈 그놈도 야마모도 그 새끼랑 다를게 없는데. 아휴 참말로 화자한텐 삼촌이 꼭 있어야 하는건데.


- 음...어... 음음... 어...
- 아니 얘가. 화자야, 화자야. 왜그러니? 왜그래 꿈꿨어?
- 무서워.
- 무슨 꿈을 꿨니? 어제도 그제도 그렇게 자다말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하고.
- 잠을 잘 수가 없어.
- 왜.
- 눈만 감으면 삼촌이.
- 삼촌 꿈을 꾸니?
- 눈만 감으면 삼촌이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무대뒤로 뛰어 나가는 모습이.
- 아이고.
- 어쩌면 그렇게 끔찍하게.
- 이이구. 잊혀져야 할텐데 어서.
- 어떻게 잊어요. 어떻게 그걸 잊어.
- 하지만.
- 아마 삼촌이 저 세상에 가서도 편하지 못할거야. 어쩌면 죽어도 그렇게 끔찍하게 죽을 수가 있을까.
- 누가 아니래니.
- 아마 내 평생 잊지 못할거에요. 평생.
- 아이 그러나 저러나 어떡하니 잠을 못 자서.
- 무서워요. 눈 감기가.
- 아이 그러니 어떡하니.
- 내 걱정말고 자요 언니나.
- 자꾸 삼촌 걱정 하지마. 자꾸 생각을 하니까 꿈도 꾸는거야.


- 어이고 청승맞게도 부네.
- 저 하모니카 누가 부는거에요. 언니.
- 몰라. 누가 부는지. 안 잘래? 겁이나서 못 자겠니?
- 잠이 다 달아났어요. 자고 싶지도 않고.
- 그래도 눈을 좀 붙여야 돼.
- 언니나 자요.
- 아유 어 어디가니?
- 바람 좀 쏘이고 올게요.
- 바람?
- 답답해요. 가슴이.
- 금방 들어와야 된다. 잠 안자고 막사안에 돌아다니다가 야마모도 졸개들한테 들킬라.
- 금방 들어올게.
- 아이 조심해.


- 정철 아저씨.
- 응? 아니 화자 아니야?
- 누가 부나 했더니.
- 어. 잠이 안와서. 너도 잠이 안와서 나왔구나.
- 응.
- 화자야.
- 네.
- 이 세상 나 혼자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너 지금 이 세상 천지에 아무도 없는 외톨박이 같다는 생각만 나는거지? 그렇지?
- 생각해 보세요 아저씨. 부모 얼굴도 모르는 내가.
- 말 안해도 다 안다. 내가 왜 니 심정을 모르겠니.
- 아저씨가 내 심정을 다 아신다고요?
- 왜. 모를것 같으냐?
-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 하지만 나는 알아. 왠지 아니? 난 니가 남 같지가 않아. 넌 날 남으로 생각하겠지만 난 그렇지가 않아.
후~ 이런말 하면 니가 알아들을지 모르겠다만은 난 니가 남 같지가 않아. 니 삼촌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고 니 삼촌이 없으니까 더 니가 남 같지가 않아. 화자, 넌 내가 싫으니?
- 내가 아저씨 좋아하는거 아저씨도 알잖아요. 우리 삼촌 다음으로 난 아저씨가 좋단 말이에요.
- 그럼 이제 삼촌이 없으니까 내가 제일 좋겠구나. 날 삼촌 의지하듯 의지해 보겠니? 무슨 일이든 내게 의논하고 말이야. 그런데 너는 내가 왜 좋으니?
- 왜 좋으냐구요?
- 응.
- 불춤 출 때 아저씨는 사람 같지가 않아요.
- 내가 불춤을 잘 춰서 좋으니?
-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 암튼 아저씨가 좋아요. 말로 할 수는 없지만.
- 흠...
- 아저씨, 나 하모니까 소리 듣고 싶어요. 불어 주세요.
- 그래? 그러지 뭐.
- 나 아저씨 하모니카 부는거 처음 봐요.
- 언제나 이불 뒤집어 쓰고 혼자 불었거든. 조그맣게 말이야.
- 그런데 오늘은 왜 여기 나와서 불어요?
- 가끔씩 나와서 불고 싶은 때가 있어. 왜?
- 아저씬 딴 사람들하고는 달라요. 다른거 같아요.
- 허허.
- 어서 불어 보세요. 참 듣기가 좋아요.
- 무슨 곡으로 불까.
- 음. 뭐든지요.


정철 아저씨가 부는 하모니카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께 마음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하더만요. 아니 정철 아저씨 옆에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편해졌었어요. 아닌게 아니라 나도 아저씨가 남 같지가 않았지요. 그렇다고 정철 아저씨가 삼촌같은 피붙이로 생각되는건 아니었구만요. 그게 남녀간의 인연이라는걸 난 조금 더 자란 후에야 알게 됐지요.

불춤 추는 사나이 김정철. 그 사나이로 해서 이화자 여사는 삼촌을 잃은 슬픔에서 조금씩 헤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나이로 해서 그녀의 젊음은 시작됐고 그로해서 그녀의 젊음은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열여섯의 이화자는 그가 그녀의 인생의 희비애락이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 하나꼬. 하나꼬 어디있나.
- 아니 저 자가 이 밤중에 널 왜 찾는다지?
- 글쎄.
- 하나꼬.
- 네. 저 여기있어요.
- 어. 여기있었구나.
- 왜 그러세요?
- 왜냐고. 헤헤. 왜냐구?


장미자, 윤병훈, 김원진, 안경진, 정경애, 장광,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입력일 : 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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