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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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4회 - 첫 무대 그리고 섬뜩한 예감
제4회
첫 무대 그리고 섬뜩한 예감
1980.05.08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네번째.

- 들어와.
- 부르셨습니까. 야마모도 감독님.
- 오, 하나꼬. 이리 가까이 와라. 거기 앉어.
- 네.
- 하나꼬가 올 해 몇살이지?
- 열 여섯 됐습니다.
- 열 여섯. 어쩐지 확 핀다 싶었지. 그래 어떠냐. 무대에 나가고 싶으냐?
- 네.
- 나가고 싶어.
- 네. 나가고 싶어요.
- 그래. 연습은 많이 했지만 실수 안 할 자신 있느냐?
- 자신 있습니다.
- 자신 있다?
- 네.
- 실수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 네.
- 그래. 아, 어떡할까.


야마모도는 날 앞에 앉혀놓고 느물거리며 자꾸 고개만 갸우뚱 거렸습니다. 나는 속이 바싹바싹 탔지요. 야마모도가 한 번 안된다고 하면은 그가 다시 부를 때 까지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으니까요. 무대에 세우고 안 세우고는 야마모도 혼자 결정을 했지요. 아 인기를 끌고 잘 하면은 단장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만은 나같은 신출내기는 야마모도 손에 달려있었어요. 아 그란디 야마모도는 날 불러놓고 무슨 꿍꿍이 속인지 빙글 거리기만 했지요. 그러나 나는 끈기있게 기다렸습니다. 하긴 뭐 나 같은게 기다리지 않으면 또 어쩝니까.


- 정말 자신있나. 하나꼬?
- 네. 연습 많이 했어요.
- 그럼 어디 이리 가까이 와봐.
- 네?
- 이리 가까이 오라니까.
- 네.
- 바싹 다가와봐. 떨것 없다. 안마나 하라고 오랬어.
- 네?
- 안마 몰라. 등 좀 주무르란 말이야. 등.
- 네. 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의 살찐 등을 주무르기 시작했지요. 무대에 서게 해주기만 하면 안마 정도야 얼마든지 해 줄수가 있었습니다. 헌디, 야마모도란 놈은 역시 징그러운 놈이었습니다. 어느새 그의 손이 내 가슴팍에 와 닿지 않겠습니까.


- 왜 안마를 하다 말지?
- 합니다.
- 나는 얼른 다시 그에게로 다가 갔지요. 생각 같아서는 사무실 밖으로 뛰쳐 나가고 싶었지만은 문득 그랬다가는 또 월매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만요.
- 하나꼬는 얼굴만 예쁜게 아니고 몸도 좋단 말씀이야. 역시 우리 단장님이 눈이 밝아. 단장만 아니면 내가 널 애인 삼으려고 했는데 말씀이야.
- 그의 손길은 점점 거칠어 졌습니다. 허지만 나는 이를 악 물었지요.


- 화자 왔냐? 거기서 뭐하니?
- 아무것도 안해요 언니.
- 와 아무것도 안하면서 창고 구석엔 왜. 너 울었구나? 왜 울었어. 니 삼촌이 막 찾아다니던데 너 왜 여기서 울고 있니. 무슨일 있었니?
- 아니에요.
- 얘기하기 싫음 하지마.
- 숙자언닌 여기 왜 왔어요?
- 어 저기 걸레 할 것 좀 찾으러 왔어.
- 언닌 여기 몇년 있었어요.
- 십오년 있었다.
- 십오년?
- 열 다섯에 여기 팔려와서 지금 내 나이 서른이야. 허지만 무대에 선건 꼭 육년밖엔 안돼. 열 일곱에 무대 나가서 스물셋 되니까 뒷 심부름이나 하라고 하더라. 일본 애들은 스물다섯 여섯까지 무대에 세우지만 우리야 어디 그러니?
- 언니, 사실은 나 무대에 서게 됐어요.
- 아 그래? 그거 잘 됐구나. 응?
- 근데 이상해요.
- 이상하다니.
- 조금도 기쁘지가 않아요. 그렇게 나가고 싶었는데도 정작 나가게 됐는데 왜 기쁘지가 않은지 모르겠어요. 기쁘기는커녕.
- 그래서 울었구나? 야마모도 놈이 널 곱게 무대에 서게 해 줄 놈이 아니지.
- 어떻게 알아요. 언니가.
- 허지만 그 놈이 단장이 무서워서 그 정도로 해 두는줄 알아라.
- 단장이 뭘 어쩐다고 모두 날더러 단장이 어쩌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 그게 무슨 소린지 정말 모르겠어?
- 알 것 같기도 하고 도무지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언니한테 꼭 물어보고 싶었는데.
- 몰라도 돼. 니 삼촌이 있으니까 어떻게 해주겠지. 니 삼촌이 무슨 힘이 있겠냐만은 그래도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설마. 어이 참 너 삼촌한테 가 봐라. 막 찾았어.
- 네.
- 삼촌 한테 눈물 흔적 보이지 말어. 니 삼촌이 알아 봐라. 눈이 뒤집힐거다. 힘이 없으니 어쩌지도 못하고 속만 상하니까 눈치 보이지 말어.
- 어떻게 그 눈치를 보여요. 챙피해서.


- 자, 머리에 빨간 리본 매야지? 머리 이렇게 해봐. 하, 됐다. 어디 저리로 가봐. 이야, 정말 이쁘다 이뻐.
- 정말이야. 언니?
- 아이 내가 거짓말 하는거 같니? 야마모도 놈이 환장 하게도 됐지. 멀겋게 보면서 손 안에 넣지도 못하고 말이야.
- 야마모도 얘긴 왜 해요 언니.
- 니가 하두 이뻐서 그러잖니.
- 근데 떨려요 언니.
- 안 떨릴 도리가 있니? 첫 무댄데.
- 언니도 처음엔 이랬어요?
- 그럼. 자, 무대 뒤로 가자. 가서 대기 해야지.
- 네. 숙자 언니가 날 돌봐주게 돼서 정말 좋아요 나.
- 나도 왜년들 돌봐주는거 보다 훨씬 좋다. 자, 어서 가자.


- 떨리냐?
- 네. 삼촌.
- 떨지마. 아 삼촌하고 같이 나가는데 뭐가 떨려. 그저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돼. 괜히 사람들 쳐다본다고 긴장하다간 줄 사다리 놓쳐 가지고 망신만 당해. 마음 푹 놓고 연습 하듯이 하는거야. 알았지?
- 네.
- 그럼, 여기 앉았거라. 삼촌 자전거 탈 차례다.
- 하나꼬.
- 네.
- 니 차례다. 여기 있다가 삼촌이 손짓 하거든 달려 나가거라.
- 네.


어떻게 첫 무대를 치뤘는지 모릅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려도 용케 줄 사다리와 삼촌 얼굴은 보이더구만요.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고 나는 삼촌 손에 이끌려 무대 뒤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첫 무대는 성공 이었습니다. 뭐 성공이라 해봐야 실수하지 않고 무난히 해 냈다는 얘기지요. 삼촌하고 둘이서 줄 사다리를 공중에 매달아 놓고 그네 몇 번 타고 들어 온 거인디. 워쨌거나 나는 그날 밤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서커스 인생. 예나 지금이나 서커스라는건 묘한 것이어서 나팔소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면 구경꾼이나 무대에 나오는 사람이나 온갖 시름을 잊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녀가 온갖 곤욕을 치르면서도 그 생활을 견뎌 온 것도 어쩌면 알 수 없는 무대에 대한 향수 같은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절 일본의 서커스는 그 규모의 방대함이나 레파토리의 다양함이 요즘 한국의 시골 거리에서 보는 그런 류의 서커스가 아니었다.


- 언니, 지금 우리 어디로 가죠?
- 내가 아니?
- 어디로 가길래 이렇게 하루 내내 가도 내리란 소리를 안하죠?
- 에휴. 어딜 가면 어떠니. 타라면 타고 내리라면 내리고 나고야면 어떻고 시모노세키면 어떠니. 어딜 가건 천막안이 내 잠자린걸. 안그러니?
- 하지만 지루해.
- 어 지루하면 저 승강구로 나가서 바람 좀 쏘이고 오려므나.
- 그럴께 언니.
- 어머, 정철 아저씨 아니에요?
- 어. 화자.
- 거기서 뭐하세요?
- 뭐하긴 저 바람 쐬고 있지.
- 저 어디로 가는거래요 지금?
- 낸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아.
- 우리 삼촌 어느칸에 있는지 아세요?
- 응. 저쪽 칸에 있더라. 화자야.
- 네?
- 너, 너 말이야. 너 나랑 함께 도망가지 않을래?
- 네?
- 도망가자. 우리.
- 도망.
- 그래.
-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저씬 매인 몸이 아니잖아요. 언제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잖아요.
- 너도 매인 몸이 아니잖어.
- 그래요. 나도 매인 몸은 아니에요. 하지만.
- 하지만. 왜. 도망가면 굶어 죽을 것 같으냐? 못 살거 같애?
- 아저씨 왜 도망가려고 해요?
- 왜냐구?
-그리고 왜 또 날더러 같이 가자고.
- 화자야.
- 네? 왜 불러놓고 대답을 안하세요.
- 난 말이야. 널 데리고 도망가고 싶다
- 왜요.
- 왜냐구?
- 그래요. 왜요.
- 아니 아니다. 아니라구. 어서 들어가. 아니 내가 들어가지.
- 이상해.


참말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정철 아저씨가 그 때 어째 그런 말을 했는지 난 도무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이 쓸데 없는 소리나 잘 하던 사람이면 모르겄는디 필요한 말 말고는 절대로 헛 입을 떼는 성격이 아니었거든요. 그란디 그 월매 후에야 난 그 분이 워째 날더러 그런 소리를 했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됐습니다.

그 때 그녀가 김정철의 제의를 제대로 이해를 했더라면 아마도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 때 그의 제의를 이해했더라면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처절한 젊음을 보내지 않아도 좋을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그녀의 운명은 언제나 한치 사이로 엇갈리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 아, 여기가 어디지. 깜깜해서 모르겠는데.
- 오사카로구나.
-오사카?
- 모두들 내려라


오사카. 세번째 오는 오사카였다. 화자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기차를 내렸다. 그리고 아무런 예감도 없이 천막에서의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의 오사카행은 그녀에게 더할 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는 여행이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오사카에 온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밤도 그녀는 분화장을 하고 무대 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 화자야.
- 삼촌 옆에 아야꼬가 있어요. 왜 한국말을 하는거에요?
- 들을라면 들으라지. 겁날 것 없다. 왜.
- 삼촌 오늘 좀 이상하다. 술도 먹었는데?
- 응. 정철이 하고. 나 빼갈 나눠 마셨다.
- 정철 아저씨 하고?
- 정철이가 아저씨는 왜 아저씨냐.
- 나이가 많은데 그럼 뭐라고 불러.
- 오빠라면 몰라도 아저씨라니. 겨우 스물 여섯 밖에 안 먹었는데.
- 그건 그렇고 왜 술 마셨어요. 삼촌 술 안 먹잖아요.
- 하지만 오늘은 좀 먹었다.
- 왜요.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요?
- 기분 나뻐서 마신게 아니라 그냥 좀 그럴 일이 있어서 마셨다. 나중에 다 얘기하마.
- 무슨 얘긴데요 삼촌?
- 지금 얘기 못 해. 끝나고 조용히 얘기하마. 그럼 난 나간다.
- 어 차례 됐어요?
- 응. 불 속 뛸 차례야.
- 조심 하세요. 삼촌.


참말로 이상한 일이었어요. 난 한번도 무대에 나가는 삼촌한테 조심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구만요. 그란디 그 날은 어째 그런 소릴 했는지 모르겠어요. 나가 조심하세요 삼촌 그랬더니 삼촌은 날 한번 힐끗 돌아보고 무대로 뛰어 나갔구만요. 헌디 그 순간 섬짓한 예감이 가슴속을 확 뚫고 지나가는거이 아니것어요. 그란디. 그란디.

장미자, 양성진, 윤병훈, 김원진, 안경진, 정경애, 장광,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입력일 : 200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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