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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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제3회 - 멍 투성이… 고달픈 서커스 인생
제3회
멍 투성이… 고달픈 서커스 인생
1980.05.07 방송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드라마. 어려운 가운데서도 14명의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시켜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을 수상한 이옥남 여사(일명:이화자). 어린시절 일본 서커스단에서 당했던 설움부터 귀국 후 아이들을 기르기까지 이 여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논픽션 드라마.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세번째.

- 하나꼬, 준비 됐지.
- 네. 삼촌.
- 그럼 줄 사다리 던진다. 정신 바짝 차리고 받아라.
- 네.
- 하나, 둘, 셋.
- 아악.
- 하나꼬. 하나꼬. 안 다쳤냐. 응?
- 발.
- 발? 어디 일어서봐라.
- 어억.
- 떨어지면서 삐었구나. 그러게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하지 않았더냐.
- 잡긴 잡았는데 그만 손이 미끄러워서.
- 어디. 발 이리 내 봐라.
- 어억.
- 부러지지 않으니 다행이다. 까딱하다간 병신 돼 이것아. 병신.


고달프기 그지없는 서커스 인생. 온몸에 멍 투성이다. 천덕꾸러기 종살이는 면했어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운 나쁘면 무대에 서보기도 전에 병신이 되버리는 수도 있고 잘못하면 아주 목숨까지 잃어버린다. 그러나 육신의 아픔 같은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육신의 고달픔 보다도 층층이 얽히는 여자로서의 사슬 때문에 울어야 하는 날이 다가오는 줄을 정작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때 까지도 어린 열 넷 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듬해 봄, 그러니까 화자 나이 열 다섯이 되던해의 봄이다. 삼촌에게서 익힌 솜씨가 제법 틀이 잡혀가서 점차 무대에 대한 선망이 싹틀 무렵 여자로서의 시련은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 얘, 하나꼬. 아니 얘가. 하나꼬.
- 네.
- 뭘 그렇게 정신없이 보고 있니. 아야꼬 상 코끼리 위에서 물구나무 서는거 처음보니?
- 아니에요.
- 옳아. 너 아야꼬가 부러운가 보구나. 옷도 제일 근사한걸로 입고 돈도 제일 많이 받고, 박수도 제일 많이 받는 아야꼬가 부럽다 이거지?
- 건방진 조센진 계집애. 니가 감히 아야꼬 상을 부러워 하니. 어?
- 누가 아니래. 아유 요게 아주 간댕이가 부었어.
- 간댕이야 진작 부었지. 허드렛 일이나 하던 조센진이 무대에 설려고 연습을 하는데 간댕이가 안 부어? 그러고 보니까 요게 간댕이만 부은게 아니고 꼬리까지 달린게 아니야?
- 네?
- 너, 단장님 한테 어떻게 했지?
- 네?
- 어떻게 했길래 니가 갑자기 출세를 했느냐고.
- 솜털도 안 가신게 눈웃음을 살살 쳤던거야. 그렇지 않고야 단장님이 왜 니까진거 한테 일을 안시키고 연습을 시키냐고. 대답을 해봐.
- 연습은 야마모도 상이 하라고 해서.
- 뭐어? 요게 앙큼을 떨고 있네. 야마모도 상이 뭐가 어쩌고 어째?
- 정말이에요. 야마모도 상이.
- 닥쳐, 이것아. 이게 어디서 앙큼을 떨어. 응?
- 왜 이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세요.
- 뭐가 어쩌고 어째? 어디 오늘 맛 좀 봐라.
- 어리다고 놔두니까 그게 아니야. 니 까짓건 혼 좀 나야 돼. 절로 끌고 가자구. 통속에 거꾸로 쳐박아버려.
- 아니, 왜이러세요. 네?
- 닥쳐 이것아. 쳐 넣어. 어서.


- 아휴, 되게 무겁네.
- 어... 어...
- 응? 무슨 소리지? 아니?
- 살려 주세요.
- 아니, 하나꼬 아니야?
- 어... 허...
- 하나꼬. 하나꼬?
- 아저씨.
- 괜찮아? 응? 어떻게 된거야. 누가 이랬어. 응?
- 흑...
- 죽일놈들. 정말 괜찮니?
- 물.
- 그래. 여기 누워있어. 내가 가서 물 떠올게.
- 거기 누구야.
- 네? 저 접니다.
- 나라니. 나가 누구야.
- 젠장할 놈.
- 아니, 너희들 여기서 뭘하고 있어.
- 저, 하나꼬가.
- 깜깜한 창고 속에서 뭘하고 있는거야. 어?
- 뭐 뭘하다니요. 보시다시피 하나꼬가 이 지경 입니다. 통 속에 거꾸로 쳐박혀 있더라구요.
- 이게 어디서 말 대답이야. 말 대답이.
- 잘못 했어요.
- 하나꼬는 얼른 네 숙소로 가라.
- 네.
- 갈 수 있어?
- 야! 그 손 놓지 못해?
- 저, 하나꼬가 쓰러지잖아요.
- 이 자식이. 이 자식이 어따가 손을 데고 있는 거야. 어?
- 아니 그럼 쓰러지는 사람을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 이게 그래도 말 귀를 못 알아 듣고 있어. 아니, 이게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거야.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거야. 너, 서커스 생활 몇 년 했지?
- 7년 했습니다.
- 7년. 이 자식이 뻔히 알면서 엉겨 붙는구나. 너, 이리 나와.
- 아저씨, 때릴려고 그러나 봐요.
- 이리 나오라는데 뭘 꾸물 거리고 있어. 저게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군. 어?
- 빨리 나가 봐요 아저씨.
- 죽기 아니면 살기지 뭐.
- 에잇.
- 어... 어...
- 대답해. 니 죄가 뭐냐. 대답해. 니놈 죄 니놈 입으로 말해. 이 자식. 건방진 조센진. 니놈 입으로 말할 때 까지 쳐.
- 말해. 죽고 싶으면 말 안해도 좋아.
- 말 하겠습니다.
- 니놈 죄가 뭐지?
- 단장님이 찍어놓은 여자의 몸에 손을 댔습니다.
- 이것 보라구. 그게 죄가 되는 줄 뻔히 알고 있잖아. 그런데도 모른체 시치미를 떼?
- 정말 입니다. 처음엔 하나꼬가 가엾은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 땐 단장님이 찍어놓은 여자란 생각을 깜빡 잊었던 겁니다. 정말 입니다.
- 하지만 나중엔 알았잖아. 그런데도 모른체하고 말 대답을 했어. 이게 바로 네놈의 죄야. 알겠어? 응?
- 죽을 죄를 졌습니다. 야마모도 감독님.
- 이제야 실토를 하는구나. 건방진놈 같으니라고. 얘들아 그놈 죽을 죄를 졌다만 죽지 않을 만큼만 만져 줘.
- 예.


- 자, 뜨거운 물 좀 부어라. 어쩌다 그것들 한테 말꼬리를 잡혀가지고 이지경이 됐니.
- 날더러 단장님 한테 꼬리를 쳤을 거라고.
- 나쁜 일본 계집들. 어린아일 가지고 질투를 하다니.
- 어, 정철 아저씨가 또 맞아요.
- 아니, 저것들이 사람 죽이는거 아냐?
- 괜히 나 때문에. 삼촌 어쩌면 좋죠?
- 너 때문이 아니다. 짐승같은 단장놈 때문이지.
- 네?
- 응. 아니 누워라. 아직도 얼굴이 핼쑥해.
- 삼촌, 어쩌면 좋아. 어?
-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드러운 놈들.
- 삼촌.
- 왜.
- 단장님 나쁜 사람 이에요?
- 화자야. 너 잘 들어 두어야 한다. 서커스단 안에 있는 남자는 조선사람 빼 놓고 다 나쁜 놈들 이란다.
- 다 나쁜 놈들?
- 그래. 다 나쁜 놈들이야.
- 왜?
- 왜냐구?
- 응. 왜.
- 우선 그렇게만 알고 있거라.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다.
- 어른이 되면?
- 우리 화자도 곧 어른이 될텐데. 하지만 내가 있으니까. 내가 곁에 있으니까.
- 아, 삼촌. 이제 정철 아저씨 비명소리 안들리죠? 정철 아저씨가 어쨌다고 저렇게 때리는지 모르겠어요. 잘못한거 하나도 없는데.
- 넌 잘못한게 있어서 통 속에 거꾸로 쳐박혔더냐? 화자야.
- 네.
- 어떡하든 서커스나 잘해라. 잘만 하면 왜놈들도 함부로 무시 보지는 않는다. 그저 왜년들 보다 낫게만 해. 그 길 밖에 없다. 인기를 끌어야 되는거야. 인기만 끌면 함부로 절대 못하지. 널 보러 오는 손님들인데 널 함부로 대하겠냐? 안그래? 장사 속인데.
- 알아요. 삼촌.
- 내년 봄엔 무대에 서게 될거다. 그러니 올 일년 이를 악물고 연습하자. 그래야 돈도 한 푼 만져 볼게 아니냐.
- 돈.
- 고향에 니 엄마 아부지는 어떡하고들 계신지 모르겠구나. 굶어 죽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 어머니.
- 어머니 안 보고 싶으냐?
- 보고싶어 죽겠는데 어머니 얼굴이 생각 안나요. 그저 아슴프레 하기만 한것이. 어머니 얼굴이나 한 번 봤으면.
- 나도 고향 산천 밟아 본지 참 오래로구나. 인생살이 왜 이렇게 서러운지 모르겠구나.


- 아저씨.
- 어. 화자로구나.
- 아저씨, 여기서 뭐해요?
- 뭐하긴 담배 피우지.
- 나 때문에 아저씨 매 많이 맞았죠?
- 너 때문이 아니야.
- 많이 아팠죠? 아저씨 아파서 무대 못 나갔죠? 왜 그렇게 쳐다 봐요? 뭐 묻었어요? 내 얼굴에?
- 너, 참 곱구나.
- 네?
- 고와. 여자는 너무 고와도 좋지 않아. 후... 가 봐라. 야마모도란 놈이 보면 또 야단 할지 모른다.
- 네?
- 가 봐. 앉았지 말고.
- 네.
- 차라리 앉아서 굶어 죽지 여긴 왜 왔냐. 여긴 마지막 사는 여자들이나 오는 곳인데. 아니 너 아직도 안갔니? 왜 할 얘기 있니?
- 아저씨 참 좋아요. 우리 삼촌 다음으로 좋아요.
- 좋긴.


서커스 단에는 참말로 나쁜 사람도 많고 좋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죠. 우리 조선 사람들은 서로서로 동기간 같이 지냈으니께요. 그 중에서도 나는 정철 아저씨가 제일 좋았습니다. 정철 아저씨가 불춤 추는걸 보면 사람같지 않을 때도 있을 만큼 근사 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이 정철 아저씨를 제일 많이 따랐구만요. 그란디 왠일인지 정철 아저씨는 늘 슬픈 사람 같았죠. 잘 웃지도 않고 언제든지 담배만 피웠죠. 어릴 때는 아저씨가 그러는 까닭을 몰랐는데 삼촌 말마따나 어른이 되니께 뭐든 다 알아지더만요. 하지만 역시 어릴 때가 좋았어요. 아무것도 모를 때 그 때가 좋았어요. 열 여섯이 되면서 내 인생이라는건 만신창이가 되기 시작 했으니께. 열 여섯, 참으로 한 많은 나이였지요.

열 여섯. 슬프도록 아름다운 나이 열 여섯. 영혼에 새겨진 문신같은 나이 열 여섯. 그런데 이화자 할머니는 어찌하여 그 오래 햇살 조각처럼 빛나는 나이를 한 많은 나이라고 회상 하는가. 여인의 문턱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는 그녀의 청춘은 과연 어떤 빛깔 이었을까.

장미자, 양성진, 윤병훈, 이기전, 유명숙, 정경애, 양미학, 장광, 신성호, 전기병,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입력일 : 200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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