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두번째.
장한 할머니 이옥남 여사, 기구한 운명의 여인 이화자 여사.
생각해 보면 사람의 운명이라는거는 어느 한 순간에 결정이 돼버리는가 봅디다. 정말이지 어느 한 순간 이더라구요. 그 해 가을 삼촌이 날 데리고 가지만 안혔어도 아니 삼촌이 그날 오지만 안혔어도 나는 아매 여느 여편네들 마냥 시집가서 애 낳고 마 그럭저럭 한 세상 살았을거인디. 삼촌이 왜 하필 그 날 왔던지.
- 뭐라구요? 아 형님이 기집달고 만주로 가버렸다구요?
- 곡식 한톨이 집구석에 없는디. 마 새끼들은 밥 달라고 보채지 서방인지 남방인지는 코빼기도 안보이지 그래서 읍내 투전판꺼정 찾아갔드니 삼거리 주막에 새로온 계집하고 눈이 맞어서.
- 난 또 무신 소리라고. 참 형수님도. 아 형이 무신 돈이 있어서 만주를 가겠소. 허구헌날 투전판에서 뒹구는 양반이.
- 삼촌은 돈 있어서 돈 가지고 일본갔소?
- 계집하고 같이 갔다니께 하는소리 아니오. 땡전 한푼 없는 노름꾼 따라나설 기집이 어딨어서 기집을 달고 만주까정 가겄소?
- 아 기집 사내 봇전만 맞으면 못할것이 뭐 있소? 온 읍내에 소문이 쫙 퍼졌더라구요. 쫘악.
- 거 참. 으음.
- 세상에 내같이 박복한 년이 또 있을까. 이날 입때 까정 따신소리 한번 하는 꼴을 못보겠더니 이제는 새끼 넷을 나한테 다 떼맽기고 기집하고 줄행랑을 놓다니. 이 새끼들 데리고 난 워쩍에 살라구. 새끼들만 아니면 그냥 콱 목이라도 매고 죽어버렸으면 좋겄는디. 새끼들 땀시 죽지도 못하고.
- 형수, 사는데 까정 살아보소. 그러다가도 바람 잡히면 돌아 올거요 형님.
- 새끼 넷을 데리고 나가 무슨 수로 살것소. 젖먹이 저 지지배만 없어도 옥남이 저것땜시 드날살이도 못하고. 에그. 드런년의 팔자.
- 옥남이가 아직도 젖을 먹소?
- 젖이야 떨어졌지만 일을 가도 달고 가야 한께 누가 좋다고 하겄소.
- 형수, 옥남이 내가 데리고 가볼까라우?
- 데리고 가다니 어디로 일본으로 말이오?
- 야. 가믄 배는 안 곯을끼요.
- 저걸 달고 삼촌 어쩔라구요.
- 데리고 댕기다가 크면 서커스나 가르켜서 지 배나 안 곯게 맹글어 주지요 뭐. 여기서 굶는거 보다야 안낫겠소? 당장 형수 짐도 덜게 되구요.
- 데리고 가소. 데리고 가서 죽이던 살리던 삼촌 마음대로 하소. 새끼고 뭐고 다 구찮소 이제. 다 구찮여.
- 그 때 아버지가 만주로 여자와 함께 갔다는 소문만 안들었어도 어머니는 두살짜리 젖먹이를 그렇게 떼 보내 버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때 아버지만 있었으믄 삼촌도 날 데리고 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거고.
그러나 그녀의 운명의 그림자가 됐던 아버지의 사랑의 도피는 사실이 아닌 헛소문이었다. 그녀가 삼촌의 품에 안겨 한국을 떠나고난 다음날, 아버지는 며칠간의 방탕을 청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그녀의 일본행은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일본행 배에 실려진 그 해 1915년은 한·일 합방이 된지 5년째 접어드는 해로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무단 정치가 시작되어 우리 민족이 노예 생활을 하던 암울한 시기였으며 일본이 대자본을 투입하여 조직한 동양적식회사가 한국의 토지를 수탈하여 농토를 잃은 농민들이 기아를 견디지 못해 고향 산천을 버리고 일본으로 만주로 끝없는 유랑의 길을 떠났던 때였는데 그녀의 삼촌 역시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중의 한 사람 이었고, 그 삼촌 품에 안겨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 또한 그런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운명의 그림자는 그녀에게 그렇게 드리워졌다.
- 하나꼬. 하나꼬. 오, 여기있었구나. 아니 삼촌이 부르는데 왜 대답도 안하고 그러고 섰냐.
- 하나꼬라고 부르지 말아요 삼촌.
- 응? 왜?
- 싫단 말이야. 화자라고 부르란 말이야.
- 화자라고 부르면 안된다고 했지? 우리말 하다가 들키면 혼나는 줄 알면서 그러냐.
- 아무튼 안들을 땐 화자라고 부르란 말이야.
- 알았다. 그런데 너 울었구나?
- 삼촌, 배타고 지금 어디 가는거야?
- 중국에 가는거야.
- 중국? 중국엔 뭐하러 가?
- 뭐하러 가긴? 서커스 하러 가지.
- 근데 배타고 몇 밤을 가야 중국이 되지?
- 아직 한참 더 가야 돼. 배 타는게 싫지?
- 배 타는건 좋은데.
- 배 타는건 좋은데 우리 화자더러 멀미하는거 치우라고 해서. 화자야, 조금만 참아라. 열다섯살만 되면 내 어떻게 해서든 너 무대에 세워주마. 그럼 이 일은 안해도 돼. 알았지?
- 응.
- 틈틈히 사다리 타는것도 배우고, 줄 타는 것도 배우고, 하지만 아직은 안 돼. 다들 열일곱이 돼야 무대에 서는데 열살 부터 배우면 가만히 놔두겠냐? 그저 참는 도리밖에 없어.
- 중국에는 안갔으면 좋겠어 삼촌. 그러면 되는데.
- 하나꼬. 하나꼬.
- 또 부른다. 요 오라질것들. 아 토악질을 해도 쌌지. 배를 한두번 탄다고 탈 때 마다 저 지랄들인지 몰라 그거.
- 하나꼬. 하나꼬 어디있어.
- 가 봐라 화자야. 안 가고 배기냐?
- 삼촌.
- 하나꼬.
- 네.
- 부르는 소리가 안들려?
- 지금 가요.
- 이런 못된것. 아니 여기 있으면서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어디 맛 좀 봐라. 이리와.
- 아 잘못 했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 아니, 지금 뭐라고 지껄여대고 있는거야? 어?
- 아우...
그건 종살이 보다 더 고약 했습니다. 이 세상 어떤 종살이도 그 보다 더한 종살이는 없을 거구만요. 온갖 험하고 더러운 일은 다 내가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서커스단에서 자란 아이는 나 밖에 없었으니까요. 더구나 나는 한국인 아닙니까. 그 생활은 무대에 설 때까지 계속 됐구만요. 열 두살 되던 때부터 나는 틈틈히 삼촌 한테 훈련을 받았습니다.
- 자, 밑에 보지 말고 위만 쳐다 보고 올라가. 밑에 삼촌이 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자, 옳지. 옳지. 됐어. 됐어. 잘한다 하나꼬. 자, 이젠 내려와. 내려올 땐 말이야. 왼쪽 발 부터 내려놔. 그래. 그래. 옳지. 옳지. 자, 하나꼬. 이젠 뛰어 내려라.
- 어엇.
- 무서웠냐?
- 응. 조금.
- 자꾸 자꾸 올라가면 이젠 안 무서워져. 저거보다 더 높은 사다리도 있는데. 자, 조금 더 높은거 세워 볼까?
- 네. 삼촌.
- 부지런히 배워. 배워서 남들보다 잘하기만 하면 종살이는 면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참는거야. 자, 하나꼬 올라가거라.
- 네. 올라 갈게요.
나는 이를 악 물었습니다. 종살이를 벗어날 욕심이었지요. 이를 악 무니 높은 사다리도 무섭지 않더구만요. 그런 어느날 이었습니다. 나고야에서 밤공연을 마치고 나서 였을겝니다. 잠자리에 들기전에 인원점검을 하는 자리였어요. 나는 대열 맨 끝줄 맨 끝자리에서 내 차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란디 점호를 명령 해놓고 대열 사이를 누비며 검열을 하던 단장이 아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딱 멈춰서는게 아닙니까. 아니 내는 또 무슨 잘못한거이라도 있는가 싶어 오금이 저렸습니다. 하긴 뭐 꼭 잘못한게 있어서만 학대 받은건 아니에요. 일본인들은 아 심심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을 들볶았으니께요. 아 그란디 단장은 앞뒤를 훑어 보더니만은
- 너, 이름이 뭐냐.
- 하나꼽니다.
- 하나꼬?
- 예.
- 어. 몇살이지?
- 열 네살 입니다.
- 옳아. 바로 니가 두 살때 들어와서 자란 그 하나꼬구나. 그렇지?
- 네.
- 호호호호호. 어느새 그렇게 몰라보게 컸지. 응? 난 또 새로온 아이인줄 알았지 뭐냐.
아 그러면서 단장은 내 어깨를 한 번 두들여 줬습니다. 참 별난 일이었구만요. 단장이 점호할 때 나오는 일도 없었고 또 나같은 조센진 한테 말 한번을 걸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나는 십여년을 서커스단에서 살았지만 단장 얼굴을 본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어요. 단장은 단원들처럼 막사 안에서 먹고 자는게 아니고 가끔씩 막사로 나타날 뿐이고 또 단장 말고도 높은 사람이 많이 있어서 우리는 그 사람들 말대로만 움직였었죠. 아 참 그라고 한가지 빠뜨린게 있구만요. 우리 서커스단은 일본 사람하고 한국 사람만 있는게 아니고 미국 사람도 있고,중국사람, 인도 사람도 있었구만요. 단원들 수는 못해도 200명은 됐을거구요. 아 그란디 200명이나 되는 단원들 틈에 낀 날, 아 그것도 어린 나를 단장이 왜 말을 붙였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란디 더 이상한 일은 그 다음날에 일어났어요.
- 하나꼬. 하나꼬.
- 네. 저 여기 있어요.
- 뭐하고 있는거지?
- 바느질 하고 있어요. 무슨 일 시키시려구요?
- 그거 그만두고 야마모도 상한테 빨리 가봐. 하나꼬를 불러오래.
- 야마모도 상?
- 야마모도는 일본 사람 중에서 단장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었구만요. 나는 놀래서 허겁지겁 달려갔습니다.
- 들어와요. 오, 하나꼬.
- 부르셨습니까?
- 이리 가까이 와.
- 예.
- 넌 오늘 부터는 딴 일 하지 말고 훈련을 받아.
- 네?
- 일체 딴 일을 하지 말고 훈련만 받으란 말이야. 니 삼촌이 있으니까 딴 사람한테 받을거 없이 니 삼촌한테 받아. 알았지? 왜 대답이 없지?
- 네.
- 니가 꿈을 꿔도 아주 좋은 꿈을 꾼 모양이야. 아주 좋은 꿈을 말이야. 아닌게 아니라 아직 비릿내는 나지만 제법 윤기가 올라서 볼 만 해졌어. 자고로 계집이란 낯짝이 반반하고 볼 일 이라니까. 안 그런가?
- 누가 아니랍니까. 하하하하하하하하.
- 데리고 나가서 옷부터 갈아 입히라고 해.
- 네. 따라와.
- 네.
- 화자야, 어디보자.
- 삼촌.
- 원 세상에. 새옷을 입혀 노니까 몰라보겠구나.
- 나 이뻐요. 삼촌?
- 응. 이쁘고 말고. 딴 사람 같다니까 그러네.
- 근데 이상해요 삼촌.
- 이상하다니 뭐가?
- 왜 갑작스레 새 옷을 주고 일도 하지 말라고 그러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 글쎄 그 그야 뭐 니가 워낙 일도 잘하고 하니까 이제 고생 그만해라 하는거겠지 뭐.
- 피. 왜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나 고생 했다고 새 옷 주고 그럴까.
- 허긴.
- 삼촌을 알죠. 그렇죠.
- 알기는 뭘 안다고 그러냐.
- 왜 날 갑자기 대접해 주는지 삼촌은 알거 아니에요.
- 그래. 안다.
- 알아요?
- 너도 좀 크면 절로 알게 돼.
- 좀 크면.
- 아무려면 어떠냐. 좀 크면 알게 될거구 클려면 아직 이삼년은 더 있어야 할테니까 걱정할 것도 없고, 아무튼 니가 그 고생 면하게 돼서 삼촌은 무엇보다 좋다.
- 정말이에요?
- 응. 정말이 아니면.
- 근데 삼촌 얼굴이 왜 그리 근심이 있어 보여요? 말로는 좋다면서.
- 얘도 그 별소릴 다 하는구만.
- 열 네살 난 그녀의 주위에 벌써 먹구름이 서리기 시작하는데 삼촌이 좋아할리가 있겠는가. 헌데도 우리의 주인공 이화자는 그것이 먹구름인지도 모르는 어린 14세 였으니.
장미자, 양성진, 이동주, 유명숙, 정경애, 장광, 신성호, 장춘순, 해설 김규식, 음악 이훈, 효과 심재훈, 장준구, 기술 정천모, 주제가 작곡 김학송, 노래 문주란.
제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배명숙 극본, 안평선 연출 두번째로 롯데제과에서 보내드렸습니다.
(입력일 : 200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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