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회 동아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 특집. 논픽션 이화자의 일생.
극본 배명숙 연출 안평선 첫번째.
방금 도착한 목포발 서울행 열차. 수 많은 승객들 사이에 묻혀 플랫폼에 내려서는 노파 한 사람. 오늘 새벽 노파는 수십명의 전송을 받으며 김제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누구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떠나온 것일까? 그리고 서울행 기차엔 왜 몸을 실은 것일까? 그러나 폼을 빠져 나오며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아마도 서울이 초행인 듯 싶다. 불안한 표정으로 노파는 역곽장을 두리번 거린다. 그 때 스무살 남짓한 청년이 상기된 얼굴로 노파의 손을 덮석 잡는다. 순간 노파의 얼굴에 함박꽃이 핀다. 그들은 와락 얼싸안고 볼을 비비며 서둘러 광장을 가로질러 택시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바삐 노파가 가는 곳은 대체 어디일까?
동아일보사와 롯데제과 주식회사와 함께 마련한 제 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시상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시상 대상자 이옥남여사님은 앞으로 나와주시기 바랍니니다.
네 이제 시상으로 들어가는데요....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 대상 수상자 이옥남 할머니.
오늘 새벽 수많은 사람들의 전송르 받으며 서울행 기차를 탄 바로 김제의 그 노파. 일명 이화자 할머니. 시상식 시간에 맞춰 식장에 도착하기 위해 그렇게 바삐 서울역 광장을 떠났던 이화자 할머니. 어린이 날에 왜 할머니가 상을 타러 온 것일까? 아니 어린이날에 왜 어른이 상을 타야 하는 것일까?
어린이는 어른들로 부터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어른들은 그들을 당연히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어린 싹은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물과 햇빛과 자양분이 없어도 어린 싹은 싹을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고 만다. 그런데도 무책임하고 비정한 모정이 도처에 널려 있고 여리디 여린 싹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자비하게 짓밟는 행위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행되는 현실. 그 때문에 어린이날에 어른이 상을 받는 일이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화자 할머니 같은 분이 있기에 어린이 날에 어른이 상을 받는 일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는 지도 모르겠다. 아니 당연한 일이 아니라 오늘의 수상은 차라리 그녀에게 있어 너무 초라한 보상인지도 모른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가진것이라곤 가냘프기 그지없는 육신 하나 뿐인. 가난에도 불구하고 무려 열네명의 고아를 길러 낸 이화자 할머니. 삼십오년이라는 세월을 바쳐 그들을 기르고 가르치고 결혼까지 시켜 독립시킨 이화자 할머니.
먹고 남는 생활이여서 버려진 아이를 거두워 기른게 아니다. 남 다르게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려서 고아들에게 동정심을 베푼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기른 고아들 보다도 더 가련한 인생 산 여인이다. 그녀가 기른 고아들은 그녀의 사랑이 있음으로 해서 차라리 그녀 자신보다도 행복할 수가 있었다. 배풀음을 받는 자보다 배푸는 자가 더 가련한 이 아이러니.
그녀의 기구한 일생을 핏덩어리 두살 때 부모의 품을 떠나는데서 부터 비롯된다. 두살 때 부모를 떠나 숙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서커스단에 들어가게 된다. 그 서커스단 입단이 오늘 이 순간까지 그녀의 생을 지배하는 불행이 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두살 때 시작된 그녀의 서커스 인생은 열 아홉에 절정을 이루고 서른 두살까지 계속 되다가 해방이 되자 한 많고 서러웠던 유랑생활을 청산할 수 있어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삼십년 만의 귀국이었다.
일본 전역은 물론 만주로 동남아로 전전하며 눈물로 그리던 조국에 돌아와 보니 그리던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하직한지 오래고 그녀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낸 삶의 의욕을 잃었구먼유. 이곳 저곳을 할일없이 전전했지요. 그러나 이렇게 허망하게 생을 끝낼수가 있겠는가 싶어 호미를 들었지라. 지금 사는 김제군 청하면 바로 그 자리에 움막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구먼유. 밤낮없이 땅을 뒤졌어요."
길고 긴 유랑 생활이 그녀로 하여금 더욱 흙이 집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지난 악몽의 세월과 뼈저린 고독을 그녀는 흙에다 묻어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흙에 묻혀 지내기를 수년. 그녀는 어느날 배가 고파 길거리에 쓰러진 남자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무조건 업고 집으로 왔지요. 미음을 먹이고 따신 방에 눕혀 놯더니 다음 날 아침에 정신을 차립디다. 얼메나 기쁘던지요. 죽은 목숨하나 살렸구나 했구먼유."
그 때의 기쁨은 흙을 뒤지는 희열보다도 더 크고 가슴 뭉클한 무엇을 느끼게 만들었다.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자신의 모습을 그 아이에게서 봤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화자 여사의 생은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나 둘 눈에 띄이는 데로 버려진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그러나 가진 것 없이 여자 혼자의 힘으로 아이들을 키우기란 쉽지 않았다. 밤을 낮으로 삼고 땅을 파고 품팔이 노동도 했고, 그래도 힘이 부텨 어떨 땐 밥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구걸을 나선적도 있다고 했다. 자식을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이 버린 자식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구걸을 나서는 여인. 그녀에게 바치는 오늘의 동아일보 햇님 어린이 보호대상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화자 할머니는 대상을 받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식만 들었는데 소식만 듣고는 기쁜 줄도 모르고 나쁜 줄도 모르고 .. 하는디 뭣이냐믄 나 보다도 더 훌륭한 양반들도 있고 또 나 보담 또 더 못한 양반도 더 많고 한디 왜 해필이면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까장 하신가 싶으니까 거 이 가슴이 먹먹해짐서 미안한 생각 뿐이여. 미안하고 죄 많허고 헌 생각 뿐이지. 좋은 중도 모르고 낫은 중도 모르고 지금 더 많이 맘은 더 무거원짐서 불안해. 왜 나 같은 인간을 모두 이렇게 모두 생각을...."
그녀가 35년동안 14명의 고아를 위해 뿌린 피눈물에 비하면 수상소감은 너무도 담담하고 겸손하다. 오른손이 한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기독교인이어서 일까. 상패와 꽃다발을 안고 앉아 있는 그녀의 주름진 얼굴은 착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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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코 이제 네 차례다. - 삼촌. 가슴이 떨려요. - 떨지마라. 떨지 말고 밑에만 내려다 보지 마라. 그러면 되. 그리고 혹 실수해서 떨어지더라도 절대로 `아이구 엄마` 소리는 하지 마라. 한국말 하면 너 또 통 속에 거꾸로 쳐 박혀 기절하도록 고생해야 되. 알았지? - 네 - 자. 어서 나가거라.
- 어쩔꺼야? 이 가죽 채찍으로 맞겠어? 아니면 통속에 거꾸로 쳐박히겠어? 응? 이 조센징아. 너 도대체 몇 번째야. 조선말 지껄이면 안 된다고 명령했는데 왜 떨어질때 마다 조선말로 비명을 지르냐? 응? 야! 이 더러운 조센징 계집애 끌고가서 한 시간만 쳐박아 놔! 생각같아선 이 채찍으로 흠씬 패 줬으면 좋겠다만. 상처가 나면은 장사에 지장이 있단 말씀이야.
- 아니 - 쉬 - 들키면 어쩔라구? - 이젠 괜찮어? 이 바보야 왜 번번히 떨어지니 떨어지길. 안 떨어지면 에이구 아이구머니야 소리 안 해도 되구. - 쉿! - 왜? - 저 소리! 빨리 도망가. 잡히면 죽어. - 셰퍼드 처럼 냄새는 잘 맡아가지고. - 아이 빨리 가라니까. - 이미 늦었어. - 하느님. 오. 살았다. - 아직 죽을 땐 안 된 모양이다. 응? - 어서 가~ 다시 돌아올지 몰라. 아니 금방 또 올거야. - 같은 천막속에서 살면서 말한마디 못 해보고. 화자야. 이게 사는거냐? 응? 우리 차라리 죽자. 아니면 도망을 치던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 흑흑흑
- 영일아~ 영일아~ - 흑흑흑 - 아니. 너 왜 울고 있냐? 배고파서 그러냐? 엄마 밥 가지고 왔어야. 자. 울지 마라이. - 나 배 안고파. - 왜 그려? - 엄마보고 거지 엄마래. - 거지 엄마? - 그래. - 엄마가 왜 거지여? - 거지잖아. 줏어다 키운다고 거지 엄마래. - 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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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교화와 선도에 헌신적으로 앞장서 사회의 귀감이 되었으므로 이에 제 2회 동아 햇님 어린이 보호상의 최고상인 대상을 수여...
"꼭 엊그제 일 같은디... 세월이 이렇게 흘렀어 이렇게"
주름진 얼굴에 눈물 한 줄기가 번져 나온다. 눈물로 얼룩진 60평생인데 오늘이라고 눈물이 없을 까닭이 없질 않은가.
"나. 암것도 이제 안 바래. 남의 자식을 14을 줏어 가지고 13을 짝을 지었어. 동서남북으로다 이렇게 심어 놨고. 지금 하나면 여의면 되았고. 지금도 소원은 아주 소원. 돈도 소원이 없고 옷도 소원이 없고 암것도 없어 와가지고 여태까지 헌 옷을 집집이 일해주고 얻어다가 입었어. 그랬는데 암 것도 소용이 없고 내 명이 좀 길고 조금 젊었다고 하면 이제라고 고아밖에 하고 싶은 마음이. 내 소원은 한국에 와서 암것도 없어. 부모동본간도 애초에 정이 없이 이렇게 고아로 컸고, 그런게 저렇게 애미 애비 없고 저런 거.. 하나씩 줏어서 밥주고 옷주고 갈치고 .. 그렇게 해갔고 앞에다 놓고 보는 것. 엄마 엄마 이 소리 하나 듣는 것 뿐이여.암것도 이 세상 소용 없어 나는. 이제라도 고아를...."
35년동안을 남이 버린 아이들을 거두워 키우느라 새 옷은 커녕 헤아릴수 없이 많은 날을 굶으며 살아 온 그녀. 그런데 그녀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기군한 삶을 살아온 여인의 삶에 대한 겸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그건 분명 삶에 대한 겸손이다. 생에 대해 투정할 줄 모르고 끝없이 겸손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녀 나름대로 60평생을 살아 오면서 터득한 그녀 나름대로의 철학 일런지 모른다. 대체 어떤 삶을 살면 그런 철학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일까? 오늘의 수상을 계기로 그녀 인생에 음지와 양지, 기쁨과 슬픔, 보람과 허무, 사랑과 배반의 파란만장한 드라마을 그녀의 육성르 곁들여 들어보기로 한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 이화자.
(입력일 : 200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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