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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향기 - 제8회 송파, 양주, 산대놀이
민족의 향기
제8회 송파, 양주, 산대놀이
1980.10.08 방송
‘DBS 리포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심층보도의 본격적인 녹음구성프로그램으로, 4회에 걸친 개국특집프로그램에서 성가를 높인 이후 ‘군사혁명특집·혁명의 발자취’ ‘6월의 정치 풍토’‘선거바람 선심바람’‘학생운동의 이모저모’‘지리산 도벌사건’등 역작을 내놓아 동아방송의 보도시각과 역량을 과시했다.
(음악)

특집방송 DBS 리포트 민족의 향기 그 전통의 현장을 찾아서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창환 기자입니다.

오늘은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에 대해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전통음악)

송파산대놀이는 옛날 장터에서 진행됐던 탈놀이의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습니다.

지금은 복덕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아스팔트가 깔린 말끔한 길 위로

수많은 차량이 오가고 있어 옛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을축년 장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장터 중에 하나였습니다.

특히 서울과 가까워서 장날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사람들이 꽤나 붐볐습니다.

(음성 녹음)

송파산대놀이의 인간문화재 이범만 씨였습니다.

무형문화재 43호로 지정돼있는 송파산대놀이는 이조 태종 때 임금이 잡귀를 쫓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따라서 송파 주민들은 송파산대놀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뚜렷한 증거가 없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문화재 한유성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송파산대놀이는 200여 년 전에 가장 성행했다가 한때 중단됐으나 1900년대 초엽에

허윤이란 분이 구파발본산대에 윤희중 씨를 초빙해 다시 재건했다고 전합니다.

송파산대놀이는 정월대보름날과 단오절, 그리고 추석날에 놀이를 벌였는데

특히 단오절에는 일주일이나 계속됐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 송파산대놀이는 놀이에 앞서 동네를 돌아다니는 길놀이가 있었습니다.

길놀이의 행렬은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송파장터를 중심으로 돌았습니다.

길놀이가 끝난 다음, 본격적인 탈놀음은 장터 한가운데 넓은 마당에서 놀았습니다.

어두워지면 화톳불로 불을 밝혀 그 분위기를 더욱 돋게 했습니다.

이범만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전통음악)

탈놀음은 원래는 열두 마당이었으나 지금은 일곱 마당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전에는 점심 먹고 시작하면은 자정이 지나야 끝이 났으나

요즘에는 길어야 세 시간 반 정도로 끝을 맺습니다.

(음성 녹음)

한유성 씨의 말이었습니다.

송파산대놀이는 다른 탈놀음에 비해서 재담을 많이 합니다.

재담 중에는 욕지거리와 잡소리가 많아서 예전에는 탈꾼에는 물론

관람객에도 여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대사를 다소 바꿔서

여자가 참여하기도 합니다.

재담의 일부분을 한유성 씨로부터 계속 들어보시겠습니다.

(음성 녹음)

(전통음악)

송파산대놀이의 탈은 모두 바가지로 만들었습니다.

얼굴에 맞는 바가지를 골라 알맞게 오려서 그 위에 소나무 껍데기를 붙여

물감을 칠하고 얼굴형상을 만들었습니다. 탈은 모두 서른세가지로 돼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박이 필요했습니다.

(음성 녹음)

송파산대놀이에는 이수생이 2명, 전수 장학생이 8명이 있습니다.

옛날 강원도에서까지 배를 타고 오는 등 주변 100리 안팎의 장꾼들이 몰려

호황을 누렸던 송파가 한때는 복부인들의 부동산투기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는 등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지만 산대놀이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0평 남짓한 공터를 겨우 마련해서 매주 토요일마다 100여 명의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짧은 동안에 동작이 배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음성 녹음)

(전통음악)

양주별산대놀이는 이조 중엽 양주골의 목사가 군민을 위로하기 위해 한양에서

산대놀이를 초청한 것이 시초가 돼 그 후 4월초파일과 단오절, 추석 등을 기해

공연을 해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의 녹번동과 사직골, 구파발, 아현동 등

산대놀이와는 달리 양주는 별산대놀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가면극협회 김기수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 사직골의 산대놀이를 양주사람 이을축이 배워가지고

가서 시작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따라서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예전 서울지방의

산대놀이를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의 양주읍은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 구실을 했습니다. 양주는 한강 이북에서

제일 규모가 컸던 고을로 당시 사회나 문화적으로 볼 때 산대놀이가 발판을

굳힐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던 것입니다. 탈놀음은 송파산대놀이와 같이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길놀이로 시작됩니다. 낮에는 주로 양주골 유지를 찾아가서

춤과 덕담을 베풀어 술과 음식을 대접받고 흥취를 돋구다가 밤이 되면은

고사를 지낸 다음에 탈놀음을 시작했습니다.

무형문화재 2호로 지정된 양주별산대놀이의 인간문화재 유경성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양주별산대놀이의 춤사위는 우리나라 탈놀음 가운데 가장 발달돼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몸의 마디마디에 멋을 집어넣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과 타령장단의 께끼춤으로 구분돼있어

전체적으로 지루하지 않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사는 다른 탈놀이와 마찬가지로

상소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대중 앞에 서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욕지거리와 상소리 부분을 빼냈습니다.

(음성 녹음)

말뚝이역을 맡은 박교응 씨였습니다.

탈은 송파산대놀이와 마찬가지로 역시 바가지로 만듭니다. 탈을

집에 둘 수가 없어서 사직골이라는 곳에 두었다가 다음해에 꺼내 썼습니다.

양주에서도 박을 구하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탈 제작으로 지정된 유경성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양주별산대놀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는 동네 일부에서 시끄럽다고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안에서 손발을 맞춰보기도 했습니다.

박교응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양주별산대놀이는 이수자가 2명, 전수 장학생이 6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문화재가 너무 나이가 들어서 전수에 애로가 많습니다.

실제로 춤을 추며 뛰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음성 녹음)

인간문화재 고명달 씨였습니다.

인간문화재들은 이수생들의 협조를 얻어서 주말마다 조금씩이나마

탈놀이를 재현하며 양주별산대놀이를 이어갈 전수생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오는 대학생들도 성심껏 가르치고 있습니다.

(음악)

내일은 북청사자놀음에 대해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창환 기자였습니다.

(음악)

DBS 리포트를 마칩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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