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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향기 - 제2회 종묘제례악과 처용무
민족의 향기
제2회 종묘제례악과 처용무
1980.10.02 방송
‘DBS 리포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심층보도의 본격적인 녹음구성프로그램으로, 4회에 걸친 개국특집프로그램에서 성가를 높인 이후 ‘군사혁명특집·혁명의 발자취’ ‘6월의 정치 풍토’‘선거바람 선심바람’‘학생운동의 이모저모’‘지리산 도벌사건’등 역작을 내놓아 동아방송의 보도시각과 역량을 과시했다.
(음악)

특집방송 DBS 리포트 민족의 향기 그 전통의 현장을 찾아서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창환 기자입니다.

오늘은 종묘제례악과 처용무에 대해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전통음악)

종묘제례악은 조선조 역대 임금의 위폐를 모신 종묘의 제향에서 연주하는 장엄한 음악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음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종묘제례악은 이조 세종 때 중국 사신들을 환대하기 위해 처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세조 9년에 일부를 개편해서 종묘제례악으로 했습니다.

이 음악은 종묘에서 매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한 번씩 드리는 제사 때 연주해왔습니다. 정부는 종묘제례악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했습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람은 성경린 씨와 김기수 씨 등 일제시대 5년제 중학과정인 이왕직아악부양성소 출신 스무 명이었으나 지금은 열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종묘제례악에 대해서 무형문화재 김기수 씨가 들려줍니다.

(음성녹음)

종묘제례악은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두 가지의 모음곡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보태평은 조정의 문덕을 찬미하기 때문에 평화스럽고 은은하며 정대업은 조정의 무공을 찬미하는 것이어서 활기 있고 경쾌한 것이 특징입니다. 지휘를 맡은 성경린 씨의 설명입니다.

(음성녹음)

(전통음악)

음악과 함께 여덟 명씩 여덟 줄로 된 예순네 명으로 구성된 무용단이 춤을 춥니다. 이 무용은 종묘제무라 하지 않고 일무라고 부릅니다. 제례는 당상, 다시 말해서 뜰 위와 당하, 뜰 아래에서 교대로 진행됩니다. 뜰 위에는 등가라는 관현악대가 있고 뜰아래에는 헌가라는 관현악대가 있는데 각각 열여덟 명으로 구성됩니다. 폐백을 드리고 첫 술잔을 드리는 초혼례는 뜰 위에서 하고 신령을 맞아들이고 둘째 잔과 셋째 잔을 올리는 아헌과 종헌은 뜰아래에서 하게 됩니다.

(음성녹음)

종묘제례악은 앞전에서 뿐만 아니라 뒷전인 연명전에서도 같은 규모로 베풀어집니다.

그러니까 앞전과 뒷전에 100명씩 모두 200명이 놓인 가운데 제사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린 씨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녹음)

500여 년 동안 계속돼온 종묘제례악이 해방 이후 한때 중단되기는 했으나 세종실록과 세조실록에 악보가 그대로 실려와 오늘도 당시의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음성녹음)

(전통음악)

종묘제례악의 전수는 다른 종목과는 달리 특별하게 전수생을 정해놓지 않고 있습니다.

국악고등학교 교장 김기수 씨의 말입니다.

(음성녹음)

따라서 매년 5월 첫 일요일에 전주이씨종약원에서는 이들 학생과 함께 동묘제향을 받들고 있습니다.

(전통음악)

이번에는 궁중무용으로 전해 내려온 처용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39호로 지정된 처용무는 신라 49대 헌강왕 때 있었던 고사 한토막을 토대로 엮어진 궁중무용입니다. 이 처용무는 궁중연회석에서의 무용으로 계속 전해져 고관들만이 아니고 심지어 국왕까지 이 춤을 추었으며 외국사신의 접대연에서도 추어졌다고 합니다.

처용무의 인간문화재 김기수 씨로부터 처용무의 유래를 들어보겠습니다.

(음성녹음)

개운포에서 왕이 용왕을 위해 절을 짓는다고 하니까 용왕은 감사의 뜻으로 한 왕자를 그때 서울인 경주로

보냈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었습니다.

(음성녹음)

이런 연유로 그 후로는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든 제웅이라는 것을 아픈 사람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길가에 버리는 풍습이 생겨난 것입니다. 또 나라에서는 정초에 짚으로 커다란 제웅, 다시 말해서 처용을 만들어 1년 동안의 액을 씻어버리는 의식을 갖게 됐는데 이 의식에서 화톳불을 피워놓고 추었던 춤이 바로 처용무인 것입니다. 이 같은 전설을 갖고 있는 처용무는 다른 궁중무용과는 달리 남성적인 무용으로 모두가 남자무용수로 구성됐습니다.

(음성녹음)

(전통음악)

이에 따라 처용무의 가면은 눈썹이 진하고 눈이 영롱하며 볼은 붉고 이빨은 백옥같이 희고 턱은 아주 길어 한국사람 같지 않은 우락부락한 인상을 풍깁니다. 또 검은색의 관에는 복숭아가 달린 나뭇가지를 꽂고 있으며 고급스런 천으로 된 파랗고 빨갛고 희고 검고 노란 두루마기를 입고 있습니다. 처용무는 고려조까지 전승되고 산대놀이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처용무는 고려시대에는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추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출 때는 검은 옷을 입고 빨간색 가면을 썼다 합니다. 그러다가 처용무는 다섯 명이 각기 다른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오방무로 바뀌어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게 됐습니다.

(음성녹음)

처용무의 전수생은 모두 국립국악원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용무의 전수는 잘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때는 남자무용수가 없어서 여자가 이를 대신한 적도 있었으나 역시 어울리지 않아 다시 남자로 바꾼 적도 있다고 합니다.

궁중무용으로서의,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남성무용으로서의 처용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남자무용수의 양성이 가장 아쉬운 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전통음악)

(음악)

내일은 궁중음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창환 기자였습니다.

(음악)

DBS리포트를 마칩니다.

(음악)

(입력일 : 201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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