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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 리포트 항구.
개항 100년의 물결을 따라.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광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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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은 대한항공, 해태제과, 미원 공동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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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원산파업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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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실패한 후 항일운동은 주로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노동운동도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됐습니다.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노동쟁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원산항의 부두 노동자들이 중심이 돼 벌인 원산파업은
그 규모가 크고 치열했던 데다 그 의미 또한 광주학생운동에 비견할 만한 항일운동이었습니다.
원산파업은 1928년 9월, 원산 부근의 한 제유공장에서부터 발단됩니다. 전국 부두 노조 교육선전부장
김봉석 씨가 원산파업의 발단에 관해서 말해줍니다.
(음성 녹음)
당시 원산에는 원산노동연합회라는 선진적인 노동조합이 조직돼 있었습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부두 노조를 중심으로
산하에 스물세 개의 단위노동조합을 가지고 있었는데 문평 석유공장의 노동조합도 물론 원산노동연합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문평 석유공장에서 사건이 나자 원산노동연합회의 김경식 위원장 등 간부가 회사 측을 찾아가 노사 간의
원만한 타협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오히려 노동자를 경찰에 고발하는 등 사건을 악화시켰습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사건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문평 석유공장 노동자들은 사건 이듬해인 1929년 1월 14일
오전 10시를 기해 동맹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이와 함께 원산노동연합회의 부두 노동자들도 이에 동조했던 것입니다.
항일노동투쟁사의 저자인 김중렬 씨의 설명이 되겠습니다.
(음성 녹음)
이렇게 되자, 원산노동연합회는 산하 조합원들에게 동정파업을 하도록 호소하게 됐고 원산 시내의 이천여 명 노동자들은
원산노동연합회의 호소에 따라 모두 동정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원산 변두리의 작은 공장에서 발단된
민족감정은 원산노동연합회라는 우수한 노동조합을 통해 순식간에 원산시 전체의 민족문제로 확대됐던 것입니다.
원산노련은 당초 1923년에 설립돼 사건이 있은 28년까지 스물여섯 건에 달하는 노동쟁의를 지도해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결실을 맺은 실력 있고 유능한 노동조합이었습니다. 때문에 원산노련의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터였고 이 같은 배경 때문에 원산노련은 파업 시작부터 노동자들의 빈틈없는 단결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원산노동연합회가 얼마나 선진적이고 활발한 노동조합이었는가 하는 점을 김중렬 씨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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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자들이 모두 파업에 돌입하자 일본인 기업주들의 모임인 원산상공회의소가 파업에 개입해서
원산노동연합회 자체를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습니다. 김봉석 전국 부두 노조 교육선전부장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인천, 만주 등지에서 노동자를 모집하는 등 인천상공회의소 측이 소란을 떨자, 인천에서는 인천노련, 인천청년회, 신간회 인천지부 등이 나서
모집에 응하지 말도록 노상강연을 하는 등 노동자들을 설득했고 노동자 모집 반대에 나섰던 일부 인사들은 구속을 당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만주에서 중국 노동자들을 모집해오자 인천에 있던 중국영사관에서는 성명을 내 노동자 모집에 응하지 말도록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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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본격화되자 원산파업은 원산만의 문제가 아닌, 전국적인 문제로 번져갔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몰려들고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일본 노동자들이 동정파업을 했으며 동경에 주재하던 세계 각지의 특파원들이 취재를
하기 위해 원산에 몰려오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파업기간 중 국민들이 얼마나 원산파업에 호응을 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김중렬 씨로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특히 원산파업에는 동아일보가 앞장서 파업을 지지해 국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도록 했었습니다. 1927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는
파업이 계속되던 원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23일은 바람도 몹시 불거니와 일기도 매우 쌀쌀한데 거리의
이곳저곳에서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노동자들의 뒤를 쫓아다니는 순찰대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기분에 빠져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런지. 이런 환경 속에서 원산상공회의소에서 일을 시키던 노동자를 때린 파업 노동자, 한 모 등
네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 같은 동아일보의 계속된 지지에 힘입어 국민들의 호응은 더해갔고 파업을 더욱 깊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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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이 계속되면서 일제는 함경도 각지의 경찰력과 군대까지 동원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심한 탄압을 했으나
노동자들은 거족적인 성원 아래 꿋꿋하게 싸워 나갔습니다. 노동자들의 기개가 결코 꺾이지 않자 일본 경찰은 김경식 위원장 등
간부들을 구속했었습니다. 간부들이 구속되자 원산노련은 김태영을 위원장 대리로 하는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했습니다.
그 후 새로운 지도부는 더욱 심해진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전열이 흐트러져 결국 패배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김봉석 씨의 얘기가 되겠습니다.
(음성 녹음)
노조 지도부가 굴복하고 난 다음에도 노동자들은 지도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취업을 거부한 채 30명씩, 50명씩 떼를
지어 다니면서 테러를 하고 경찰서에 몰려가 항의하는 등 저항을 계속했으나 결국 이 같은 저항은 이미 지도부가 패배하고 난
다음이어서 대세를 만회할 수는 없었습니다. 파업은 실패했지만 파업이 준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김봉석 교육선전부장이
얘기해줍니다.
(음성 녹음)
원산파업을 통한 투쟁은 조선민족의 일제에 대한 가장 격렬한 항일민족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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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광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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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 리포트, 미원, 해태제과, 대한항공 공동제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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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 201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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