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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 리포트 항구.
개항 100년의 물결을 따라.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광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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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은 대한항공, 해태제과, 미원 공동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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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개항 이후 부두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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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 노동자는 이조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이조시대 조운제도 하의 조군이라는 게
부두 노동자였던 셈이지만 사실상 조군은 상민부역의 일종으로 정치제도 상의 신분이었을 뿐,
임금 노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게 개항 이후, 부두와 광산에 임금 노동자가 맨 먼저
생겨나게 됐고 노동자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게 됐던 것입니다.
전국 부두 노조 교육선전부장 김봉석 씨는 부두 노동자들의 조직이 광산보다 더 빨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노동조합을 조직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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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898년 당시의 섬진 부두 노동조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조합의 운영상황이나
조직형태를 잘 알 수 없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1898년에 섬진에서 최초의 부두 노동조합이 탄생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목포에서는 일본인 하역업자들을 상대로 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목포에서는 아직
부두 노동자들의 조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목표를 위해 노동자들이
단체행동을 했다는 점에서는 목포파업이 부두 노동운동 사상 최초였던 셈입니다. 목포파업은
일본사람들이 조선 노동자를 구타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민족감정이 파업의 원인이었습니다.
민족감정이 개재됐던 만큼 파업은 격렬했고 또 시일도 오래 끌어 파업이 해결되기까지 4년이 걸렸습니다.
목포파업은 결국 노동자들의 승리로 돌아갔는데 이로서 부두 노동자들의 첫 번째 항일 노동 투쟁에서
조선 노동자들은 승리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목포파업에 깜짝 놀란 일제는 우리나라 정부에 압력을 넣어
부두에서의 노동자들의 공급과 근로 감독을 위한 모군 집장층을 설치했습니다. 이 모군 집장층이 그 후 해방 때까지
인천 등 일부 항구에 남아 부두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속을 방해하고 임금을 착취한 악명 높은 기관입니다.
인천의 향토사 연구가 최성현 씨의 설명이 되겠습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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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파업 이후에도 항구의 곳곳에서 일본 하역업자들과의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지만 1920년에 발생한
부산파업은 그 후에 일어난 원산파업과 함께 항일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노동운동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실패한 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노동운동을 통한 항일을 모색하게 됐고 이 결과, 문맹 퇴치에
앞장섰던 야학교 선생들의 지원으로 부산파업이 시작됐던 것입니다. 부산파업에 관해서 김봉석 씨가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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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은 부산 기타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부산 연쇄파업의 계기가 됐던 셈입니다.
그 후 1929년 원산항에서 일어난 원산파업은 파업의 동기에서부터 그 규모와 투쟁내용에 이르기까지 부두 노동운동의
꽃이었고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거족적인 항일운동이었습니다. 원산파업에 관해서 항일 노동운동 문제를 연구하는
김중렬 씨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1929년의 원산파업 이후, 각지에서 격렬한 항일 노동운동이 계속해서 벌어집니다만 그 후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지하로 잠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노동단체가 해산되고 노동운동을 주도한
많은 인사들이 투옥되거나 감시의 대상이 돼 합법적인 노동운동을 펼 수 없는 암흑기로 접어들게 됐던 것입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간혹 지하 노동운동이 있었지만 그것이 성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김봉석 씨는-.
(음성 녹음)
때문에 특히 1937년에 중일전쟁 이후 부두에는 떳떳한 조직부두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일을 했던 게 아니고 보국대라는 이름의 강제노동이 부두에서 판을 쳤던 것입니다. 부두 노조 여수지부
부지부장 김한순 씨의 말을 듣습니다.
(음성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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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해방을 맞은 직후, 각 부두에는 전평 산하의 좌익 부두노동조합들이 먼저 결성됐고 이어 우익 노동조합과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다시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노총 산하의 부두 노동조합들이 항구에
들어서고 6.25를 맞게 됩니다. 6.25동란 중에는 항구의 기능이라는 게 부산이 그 중심이었고 부산에 군수물자를
하역하기 위한 부두 노동자가 칠만 여 명에 가까웠습니다. 이때 부두 노동운동사에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파업이
발생합니다.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인 1952년에 일어난 부산파업은 놀랄 만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파업을 지도했던
안필수 씨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그 후 전쟁이 끝나고 휴전에 이어 부산 이외에 다른 항구들도 점차 제 기능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항구들이 안정되면서
부두 노동자들도 다시 항구에서 일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중단됐던 노동조합의 조직 활동도 계속됐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완연히 가시고 노동조합도 활발하게 움직일 무렵인 자유당 말기, 노동자들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해 부두노동조합은 대대적인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최봉상 전국 부두 노조 부위원장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5.16 후 경제개발계획이 수행되면서 60년대 말부터 항만의 기계화가 실현됩니다. 항만의 기계화는 결국
부두 노동자들의 고용감소를 초래하는 것이어서 부두 노동조합은 이를 방관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충남 장항의 풍농비료공장 쟁의가 장안에 기계화에 맞선 최초의 노동쟁의였다고 할 것입니다. 최봉상 씨는-.
(음성 녹음)
개항으로 시작됐던 부두 노동운동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 부침을 거듭하다 이제 하역 기계화라는 큰 도전에 봉착해
또 다른 시련을 맞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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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광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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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 리포트, 미원, 해태제과, 대한항공 공동제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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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 201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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