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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 리포트 항구.
개항 100년의 물결을 따라.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광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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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은 대한항공, 해태제과, 미원 공동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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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주항에 얽힌 설화와 해녀의 역사와 생활상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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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따르면 제주도는 삼국통일시대에 부족국가의 형태를 이루고 농목사회를 형성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도 백제와 신라, 또는 중국과의 해상교통이 빈번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데 한반도에 처음 예속된 것은
고려 때였습니다. 1105년, 고려 숙종 10년 제주도는 당시 탐라라는 국호를 버리고 고려의 한 군으로서 편입돼 탐라령이라
불리었고 이조시대에 목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후 8.15해방 이듬해, 행정구역상으로 한 개의 도가 됐는데
우리나라 건국신화가 단군왕검으로 대표되듯이 제주도의 건국신화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삼성설화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제주도 역사연구가 황승만 씨는 삼성설화를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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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건국신화에 나타난 세 성은 고, 양, 부, 삼 성인데 아직도 제주도에는 이 세 성씨가 많이 살고 있습니다.
고려사에는 그 후, 고을나의 15대손, 고후, 고청, 고개 삼 형제가 신라에 입주했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제주도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셈인 것입니다. 북제주군 항파두리는 삼별초의 신화가 얽힌 곳입니다.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은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들어와 십오 리에 이르는 토성을 쌓고 인근 섬들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해상왕국을 건설해서
최후까지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 항쟁했던 것입니다. 당초 삼별초는 고려시대 최우가 몽고의 난을 피해 강화로
들어갔을 때 사병으로 조직한 것인데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하자 반란을 일으키고 몽고에 항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난을 일으킨 지 3년 만인 1273년 4월, 고려와 원나라 합동토벌군에 의해 삼별초군은 장렬하게 옥쇄했던 것입니다.
김통정이 옥쇄 직전,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처자를 죽여 피로 흑붉은밭의 붉은 흑은 지금도 그날의 비극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다를 무대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육지 사람보다 더 큰 위험이 항상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언제 풍랑이 불어와 배를 뒤집고
생명을 앗아갈지 모르는 불안감에서 고기를 많이 잡아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해달라는 기원에서
그들은 바다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익혀 왔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 제주도에는 음력 2월 초하루와 보름 사이에
행하는 의식으로 영등굿이 유명하다고 제주대학 김형동 교수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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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제주도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전설의 섬으로 이어도가 있습니다. 항상 바다와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는
이어도가 이상이었고 구원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홍승만 씨는 이어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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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는 제주도에서 중국으로 진상품을 싣고 가는데 파도가 심해 피신했던 구원의 섬이라고도 하며
풍랑에 시달리는 서러움의 상징으로도 노래 후렴에 붙여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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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리, 이것은 바로 해녀를 가르키는 이름입니다. 잠벵이 옷을 입고 물속 깊이 들어가서 전복, 소라, 해삼을 따는
이들을 우리는 비바리, 바로 해녀라고 불러왔습니다. 제주에는 아직도 만이천여 명의 해녀가 있는데 이 숫자는
제주수산협동조합에 등록된 것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는 아직도 이만 오천 명에서 삼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녀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한 설이 없다는 김형동 교수의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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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은 모두가 해녀가 된 이유를 생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국민학교 2,3학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바닷가에서 전복, 해삼을 따면서 학비를 보탠 어릴 때의 경험에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라는 관념이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해녀는 직업으로서 확립된 것도 아니고 대대로 전승되는 것도 아닙니다. 해녀들은 능력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 등으로 계층이 정해져 있기도 합니다. 상군은 가장 활동력이 강하며 연령적으로도 젊고 물속 10미터 이상 들어가서
여러 시간 동안 작업할 수 있으며 하루 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계층을 말합니다. 하군은 처음 시작한 해녀들로
물속 5,6미터밖에 들어가지 못하며 수입도 삼천 원 정도인 부류이며 중군은 상군과 하군의 중간층인데 대개가 나이가 많아
은퇴를 앞둔 해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군 해녀들은 하루 여덟 시간 동안 한 번도 물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계속
작업한다는 상상도 못할 얘기를 제주 산지 어촌계에 근무하는 황천자 양이 들려줍니다.
(음성 녹음)
해녀들은 제1종 공동어장에서만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수산업법에 따르면 제1종 공동어장은 정착성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것으로
돼있으며 수심은 지역마다 다르나 제주도는 15미터까지입니다. 그러기에 제주 해녀들은 최고 15미터까지 잠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 해녀들은 그들의 작업장을 잠수 배들이 침범해 들어오기 때문에 많은 애로를 겪는다고
서귀포에서 만난 해녀들은 이구동성으로 얘기해줬습니다.
(음성 녹음)
해녀들에게는 풍부했던 자원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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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금방 끝낸 해녀들은 제일 먼저 몸을 녹이느라 난롯가로 찾아듭니다. 차가운 물속에서의 작업이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라고 한 해녀는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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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부터 해녀들은 한 번에 4만원가량 하는 고무 옷을 입고 물에 들어가지만 방한복이 생기기 전에 그들의 고통은
상상이상이었을 것입니다. 해녀들에게 공통적인 즐거움은 바다 속에서 큰 전복을 땄을 때, 즉, 일당을 많이 올렸을 때라고
대부분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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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해녀들에 대한 전설은 제주도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과는 달리, 옛날의 해녀들은
농사를 겸했고 특별한 혈통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김형동 교수는 지적해주면서 고작 작업하는 사이에 물속에서 용왕을
만났다는 정도의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김형동 교수는 우리나라 해녀들이 일찍부터
해외로 진출했다는 사실이 있다고 전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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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외지로 나가기 시작했던 해녀들은 10년 전 까지만 해도 주로 영일만 일대로 수천 명이 나갔으나
요즘 제주도에서는 해녀 노동력의 수탈을 막고 안전을 기하기 위해 해녀 안 내보기 운동이 펼쳐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홍백상자 등에다 지고 가슴 앞에 두레박 차고 한 손에 비창을 지고, 한 손에 호미를 지고 한 질 두 질 수십 분 물속
허위적 허위적 들어간다. 이 민요가 말해주듯이 해녀들은 생명을 건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여다의 섬, 제주도.
그리고 제주여성을 대표하는 해녀들, 그들은 제주도를 이까지 끌고 온 질긴 줄인 것입니다. 바다의 문신이 새겨진 것 같은
그들의 다리에서 전달되는 강인한 생명력은 제주도를 국제관광지로서 한껏 꽃피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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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이광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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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 리포트, 미원, 해태제과, 대한항공 공동제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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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 201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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