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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 리포트 항구.
개항 100년의 물결을 따라.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근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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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은 대한항공, 해태제과, 미원 공동제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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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천항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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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에 따라 조약체결 후 20개월 이내에 개항을 하기로 했던 인천은
우리나라가 개항을 지연시켜 당초 예정보다 개항이 늦어졌습니다. 인천의 개항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883년 1월에야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인천 개항을 주저했던 것은
인천이 바로 서울의 관문이었기 때문이고 역시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오히려 집요하게 인천 개항을
요구해왔던 것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인천은 개항하자마자 각국 세력이 밀려들어 교역이 국제화됐는데
국제교역이 이처럼 활기를 띤 것은 수도가 가깝고 역시 물자소비지가 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개화문물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전달됐고 일부 개화 인사들이 인천을 통해 일본 등으로 떠나는 등
사실상 인천은 우리나라 개화의 요람지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풍현 씨가 개항 전후 인천 모습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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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후, 일본 조계, 청국 조계, 각국 공동 조계 등이 인천에 들어서면서 인천은 이권외교의 각축장이 됐고 이에 따라
제물포 폴리틱스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인천은 외세가 판을 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인천의 조계에 대해서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 이현종 박사가 얘기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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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라면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20세기 초 여러 항구가 개항되고 개항된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외래문물들을 접한 국민들이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을 무렵, 하와이의 이민 모집 광고가
당시 황성신문에 실렸던 것입니다. 모험심에 불타던 많은 사람들은 이민모집에 응해 인천 항구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인천의 향토역사를 연구하는 최성현 씨가 하와이 이민 이야기를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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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민은 하와이만 갔던 게 아니고 일부는 멕시코 농장으로도 가게 돼 하와이 쪽으로 간 사람보다
더 심한 고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하와이를 비롯해서 멕시코와 그 근처 섬에 남아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 인천항을 떠나 이민을 떠났던 사람들의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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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해방 후에도 인천은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과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우선 8.15직후 하지 장군이
미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맨 먼저 상륙했던 게 바로 인천항이었습니다. 미군의 진주가 9월 7일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일본군대는 무장을 풀지 않고 있다가 미군의 상륙을 환영하러 나온 군중들에게 총질을 해서
여러 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었습니다. 인천은 그 후, 6.25동란 중 인천상륙작전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모습을 최성현 씨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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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역시 처음에는 몇 군데 나루터만 있는 한가한 어촌에 불과했으나 그 후 일본, 중국 등지와의
교역이 많아지고 특히 경기도지방의 쌀이 일본으로 많이 반출되면서 항구개발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부두노조 인천지부 서승욱 기획부장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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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많이 일본으로 실어내가다 보니 쌀의 중매업자도 많았고 또 정미소가 많이 들어서 한때 인천의 변두리지역은
정미소로 뒤덥히다시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 쌀과 관련이 많다보니 미두장이 인천에 생겨났고 인천 미두장에서
많은 우리나라 지주들이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습니다. 인천은 이처럼 쌀과 관련을 가지면서 미곡의 수출항으로서
발전을 해왔고 해방 후 몇 년 간 침체를 보이다가 6.25를 거치면서 미군이 주둔하고 또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서승욱 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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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천은 특히, 무역항으로서는 해방 후 큰 발전을 하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다른 항구와는 달리
갖추어둔 시설도 충분하게 운용하지 못하는 실정인데 그 이유는 외항선의 입장에서 볼 때 인천은 항로가 멀어서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항만청의 한 관계자는 인천항의 시설이 충분하게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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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인공업지대를 끼고 있는 인천항이 앞으로도 제자리걸음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따라 인천항은 지난 66년부터
시설 확장공사를 시작해 지난 74년 일단 준공을 봤던 것입니다. 인천지역 행운항만청장 배광호 씨가 1단계 공사내용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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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일부 시설이 제대로 이용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최근 들어 갑자기 수출입 물동량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75년의 경우, 수출입 물동량이 900만 톤이던 게 작년에 1600만 톤으로 늘어났고 입출항선박도 해마다 늘어 작년의 경우
2400척의 선박이 인천항을 들어오고 나갔는데 이는 77년에 비해 14퍼센트가 늘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물동량이 계속 늘고
입출항선박도 증가 추세에 있기 때문에 인천항의 시설을 또다시 늘릴 수밖에는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배광호 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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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확장공사가 완성되는 86년에 가면 인천항에서 처리하는 물동량이 300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전망돼
규모면에서 현재의 부산항과 비슷한 분주스럽고 활기찬 국제무역항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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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근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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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S 리포트, 미원, 해태제과, 대한항공 공동제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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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 201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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