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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DBS리포트
항구 - 제9회 목포
항구
제9회 목포
1979.04.09 방송
‘DBS 리포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심층보도의 본격적인 녹음구성프로그램으로, 4회에 걸친 개국특집프로그램에서 성가를 높인 이후 ‘군사혁명특집·혁명의 발자취’ ‘6월의 정치 풍토’‘선거바람 선심바람’‘학생운동의 이모저모’‘지리산 도벌사건’등 역작을 내놓아 동아방송의 보도시각과 역량을 과시했다.
(음악)

DBS 리포트 항구.

개항 100년의 물결을 따라.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일환 기자입니다.

(음악)

이 프로그램은 대한항공, 해태제과, 미원 공동제공입니다.

(음악)

(광고)

(음악)

오늘은 우리나라 서남단에 위치한 목포항을 찾아보겠습니다.

(음악)

목포항은 앞에 수산자원이 풍부한 다도해를 끼고 있고 뒤에 호남평야의 곡창을 갖고 있어

일찍이 농수산물의 집산지로 발달했으며 또한 서남해안의 여러 항구와 제주도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발달해왔습니다. 이조시대에는 나주에 영산창이 있어 호남의 곡식이 영산창에

수납됐다가 목포항을 통해 중앙에 수송됐고 목포진이라 해서 수군이 주둔한 수군의 요새지이기도 했습니다.

개항 전에는 현재의 북교동 자리에 어부가 사는 50여 호의 집이 있었을 뿐, 갈대숲이 무성한 한산한 어촌이었습니다.

개항 당시의 얘기를 목포지방 해운항만청 최수인 청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목포항이 이처럼 일찍이 개항된 것은 배후지에 이른바 전남 삼백이라는 쌀과 목화, 소금이라는 풍부한 자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항구로서의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포지방 해운항만청 죽항사무소장

김형규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목포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이유를 목포시 자문위원 조효석 씨는-.

(음성 녹음)

(음악)

목포항이 개항됐을 당시, 주변 열강인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와 영국까지 네 나라가 각기 자기 나라 세력과

이해관계가 얽혀 각축전을 벌인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포에는 일본식 건물뿐만 아니라 러시아식 건물과

영국풍의 건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고 서산동 등기부에는 지금도 러시아 영토로 등기가 돼 있는 땅도 있습니다.

목포항을 통해 일제가 호남의 일흑삼백이라는 김과 쌀, 목화와 소금 등 원료를 수탈해가서 일본에서

가공품으로 만들어가지고 부산으로 상륙시켜 이중착취라는 악랄한 방법을 써왔습니다.

개항 직후 일제는 중국의 침략전쟁기지로 일본 관서지방과 부산과 목포, 인천, 대련을 잇는 구주선만선이라는

항로를 신설했고 이어 조선상해선이라는 인천과 진남포, 목포, 부산, 상해, 청도를 잇는 항로를 개설해 목포항은

일본과 만주, 중국에까지 교역하는 주요 항으로 발전했습니다. 항구가 번창하고 교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요정과 유곽이 번성해서 일제 때 가장 유명한 화항이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당시의

목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제는 고인이 된 이난영 씨가 불러서 크게 히트한 ‘목포의 눈물’이라는 대중가요입니다.

이 노래의 작사가 문일평 씨는 임진왜란 때 일제를 쳐부순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임으로 표현해

민족적 색채가 짙었고 가락이 애절해서 일제의 압정에 시달리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크게 유행해

당시의 최고발행부수인 10만장을 돌파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목포의 눈물에 얽힌 사연을 조효석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해방 전까지만 해도 무역항으로서, 또 수출산업과 관련된 도정공장과 비단공장이 활기를 띠었고 호남과 남해안 일대에

일용잡화 공급기지로서 자못 번성했던 목포가 8.15해방을 전후로 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일시에 무역이 끊긴데다가 후방과의 교통의 대중인 철도를 일제가 비교적 일찍 부설은 했으나 뺏어가기 위한 집산지로

단선만을 만들고 후방과의 교통을 발전시키지 않은 것이 큰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목포시 건설국장 오덕규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이밖에 해방 후부터 6.25사변을 거치는 동안, 정치와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목포를 낙후시킨 더 큰 이유가 된 것 같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물량구조는 많은 노동자들의 생활난을 초래했고 이 틈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이 파고들어

한때 좌익세력들이 판을 쳤습니다. 수복 후에는 우익에서 보복전을 벌여 악순환이 거듭됐습니다. 조효석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이밖에 목포는 신안군 일대와 주변 섬지방의 영세어민들의 착취가 가장 심했던 곳입니다. 구한말 때부터

객주와 갈매기떼들 같은 객주의 앞잡이들이 영세어민을 상대로 극성을 부리던 곳으로 한창 전성기 때는 이백여 명이

목포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는 신안군 수산협동조합장 양대평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이런 모든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서로 헐뜯는 투서율이 전국에서 목포가 가장 높았다는 사실이 검찰조사에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음악)

목포항이 발전 안 된 이유는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악조건 때문에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항만시설 건설에

거의 투자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목포지방 해운항만청 항무과장 강유신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더구나 만 톤급 외항선을 접안하거나 하역할 수 있는 유일한 항만시설인 삼악도 암벽공사가

20년을 질질 끌면서도 완공이 안 됐고, 그래서 외항선이 이중하역과 체선료를 겪는 등 불편을 겪어야 했습니다.

날로 늘어나는 물동량은 이미 하역능력을 초과했다는 죽항사무소장 김형규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또 목포항은 하루 300여 척의 각 지방에서 몰려온 어선과 연안 여객선, 화물선들이 한데 몰려 혼잡을 이루고

있다는 최수인 목포지방 항만청장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그래서 당국은 뒤늦게나마 목포항 개발의 필요성을 느껴 내항은 여객선 전용 부두로 북항은 연안어선과

화물선 전용 부두로 개발하기로 항만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이 밖에 선거 때마다 발파식을 갖고 말로만

건설한다던 영산강 하구언공사가 착공돼 오는 81년에 끝나는 목포와 순천, 부산을 잇는 남해고속도로와

현재 광주까지 연결된 호남고속도로가 4차선으로 목포까지 연결돼 배후지와 교통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 북한 하단의 백만 평의 땅위에는 현재 계획 중인 농수산물 가공처리 임해공단이 들어서면

인접 유휴 노동력을 흡수하는 한편, 수출항구로서도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밖에 80년대의 목포는

다도해를 낀 관광도시로서 멀리나 남지나해 어업도시로서의 발전이 약속되고 있는 도시입니다.

(음악)

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일환 기자였습니다.

(광고)

(음악)

DBS 리포트, 미원, 해태제과, 대한항공 공동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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