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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 제5회 항망 건설사
항구
제5회 항망 건설사
1979.04.05 방송
‘DBS 리포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심층보도의 본격적인 녹음구성프로그램으로, 4회에 걸친 개국특집프로그램에서 성가를 높인 이후 ‘군사혁명특집·혁명의 발자취’ ‘6월의 정치 풍토’‘선거바람 선심바람’‘학생운동의 이모저모’‘지리산 도벌사건’등 역작을 내놓아 동아방송의 보도시각과 역량을 과시했다.
(음악)

DBS 리포트 항구.

개항 100년의 물결을 따라.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일환 기자입니다.

(음악)

이 프로그램은 대한항공, 해태제과, 미원 공동제공입니다.

(음악)

(광고)

(음악)

오늘은 항만 건설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음악)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인접 국가들과의 교역을 위해 항만시설을 이용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한말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개항이 늦어지고 일제와 해방의 혼란기, 6.25사변 등을 거치는 동안, 항만 건설이 소홀히

되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항만 건설이란 정치와 사회문화, 군사경제 등 전반에 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고 국력의 신장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역사를 통해 입증되고 있는데도 위정자들이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경시해버려 항만 건설이 뒤졌다는 것은 심히 아쉬운 감 내지는 한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는 것이 항만 관계자들의 얘기입니다.

우리나라 항만의 역사는 멀리 삼한시대부터 상선이나 어선이 드나드는 포구와 군항의 기능을 가진 진으로 불러지며

인접지역와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짐을 본격화했고 이조시대에 들어와 중국과의 조공 수송, 그리고 쌀의 일본수출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비교적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항만은 선박을 안전하게 정박시키기 위한 조치로

비교적 자연조건이 좋은 지역만을 골라 이용하는 데 그쳤고 오늘날과 같은 인공적인 항만의 건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항만건설사를 쓴 최항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특히 대원군의 집정으로 서구문명의 배척은 쇄국정치라는 비극을 초래했고 이로 인해 항만 건설은 기나긴 동면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시대적 조류는 쇄국정치의 종지부를 찍게 했고 주변 열강들의 강요에 의해 우리나라는

개항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개항 당시의 항구는 어항과 상항, 포구 등이 종류별로 구분돼있지 않았으나 개항을 계기로

항구가 정부에 의해 최초로 분류됐습니다. 최항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이때부터 근대화로서의 항만 건설이 시작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항 후 해방될 때까지 항구 건설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의 역할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최항 씨는 말하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일제가 36년 동안 항만 건설을 한 것을 보면 하역 능력이 현재 북평양 한 개 정도의 능력인 1000만 톤에 불과한 빈약한 것으로

여기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항만 개발과 건설이 국가가 목적하는 국민 생활의 향상과 경제개발에 주안점을 두지 않고

통치자들의 야망 충족을 위한 도구로 타락했다는 점입니다.

(음악)

해방 당시 개항으로서 시설이 완료됐다고 할 수 있던 항만은 신의주와 진남포, 군산, 목포, 청진, 운기항 등뿐이었으며

확장 공사 도중이었던 항만은 부산과 인천, 원산, 해주, 송진. 다삼포 등이고 공사 도중이었던 항만은 여수와 삼천포,

마산, 묵호, 제주도 등이었습니다. 당시의 하역 능력은 1800만 톤이었으나 전시 중 항만공사의 부진과 파괴로

1500만 톤에 불과했고 접안시설 규모로는 부산항이 겨우 10000톤 급 선박 한 척이 접안할 수 있었고 기타는 대형 선박

접안시설이라고 해도 8000톤에서 5000톤 정도였습니다. 해방 후 약 1년 동안, 미군정 초기에는 행정방향이 확립되지

못했던 관계로 항만 건설 부문에 있어서 계획성 있는 정책의 수립과 능동적인 건설을 하지 못하고 군정 간의 수식연회에 따라

임시 편법적인 건설을 해왔습니다. 특히 항만 수축 조성이 육상수송과 크게 연관이 없다고 해서 예산에서 빼버려

지방 항의 경우는 방치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최항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음악)

동족상잔이라는 6.25의 비극은 항구 건설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시 남한항구 하역 능력인

1000만 톤의 절반이 넘는 550만 톤의 시설이 파괴돼 정부가 막 수립하려던 항만 건설 계획이 완전히

좌초돼버린 셈이 됐습니다. 우리나라의 항만이 우리의 재력과 기술에 의해 본격적으로 건설이 시작된 것은

제3공화국 수립 이후 의욕적인 경제개발 사업이 본격화됨에 따라 늘어나는 물동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해운 개발과 항만 건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나서부터입니다. 정부의 정책목표인 수출과 증산은

각종 원자재의 도입과 수출상품의 해상화물량 증가, 선박의 대형화에 따른 새로운 항만의 건설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해양대학 박용석 교수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6.25동란 이후의 항만 건설은 1962년까지 전국의 혼란 등으로 답보 내지는 방치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66년부터 78년까지는 항만 건설 산업이 활발히 벌어져 그 주요 내용을 보면 인천항의 제2독구 건설,

포항 신항 제1기공사 완료와 마산항 수출자유지역 20000톤 급 유선자 준공, 제주항 8000톤 급 전자 준공,

울산항 제1234부대의 준공, 묵호항 제3부두 40톤 급 선자 준공, 부산항 제1단계 종합개발사업계획 준공으로

50000톤 급 유선자 컨테이너 전용부두의 완공 등입니다. 이에 따라 항만 능력도 동시 접안 능력이 160촉,

하역 능력은 연간 6500만 톤이 됐습니다.

(음악)

항만 건설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첫째, 오랜 시일이 걸리는 항만 건설이 행정기구 상의 직제가 자주 바꿔

장기계획이 수립 안 됐다는 점입니다. 즉, 그때그때 편법에 의해 행정적인 처리와 조치를 해와 해방 전에는

조선총독부 내무국 토목과 항만계라는 일개 계에서 사정국 토목과 항만계로 바뀌었고 뒤에 교통국 항만과로 바뀌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 당시에는 미 군정청 해수부 해상운수항만과에서 관리, 운영하다 정부 수립 후 내무부 건설국 항만과로

이관됐고 다시 해무청 설치에 따라 해무청 시설국 항만과와 관리과, 이어 국토건설청을 거쳐 건설부 창설 후에는

건설부 국토보존국 항만과로 편입돼 운용돼왔습니다. 3년 전에야 겨우 항만청으로 독립되는 등 수많은 수난을 겪어왔고

공업화 후 건설부에서 운용하는 등 아직도 건설부에 있어서는 이원화돼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처럼 어떤 부분의 행정체계가 자주 바뀌는 것이 항만 관계 부서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막대한 비용과 장기적인 계획

수립이 필요한 항만 건설이 일개 계나 과에 소속시켜 왔다는 것은 항만 건설의 낙후성을 면치 못하는 한 일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수지방 항만청장 김용훈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음악)

우리나라의 수출입물동량은 10년 사이에 평균 12프로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증가속도가 점점 가속화돼 이미

곳곳에서는 채화현상을 빚고 있습니다. 배광호 인천지방 항만청장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정부는 이런 채화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부산과 인천 등 주요 항의 외항을 확장해 현재의 하역 능력 6500만 톤을

81년에는 9300만 톤으로 늘릴 계획입니다. 하역 능력뿐만 아니라 선박 대형화에 따른 대형부두와 하역장비의

현대화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문제가 되겠습니다. 황호용 부산항 건설사무소 공사과장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앞서 드러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앞으로의 항만 건설 방향을 해운항만청 시설국장 정영세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음성 녹음)

항만 건설을 막대한 재원 투입을 필요로 하는 만큼 앞으로 600억 정도를 투입해서 기존시설의 개보수만으로 86년의 500억 수출과

91년의 1000억 불 수출이라는 정부의 야심적인 수출목표를 발맞추어 갈 런지는 의문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해운과 항만은 국가의 사활이 걸린 중대성을 가진 점으로 보아서라도 정책당국의 보다 과감한 투자와 장기적 안목의

정책수립이 필요하다는 것이 항만 건설 관계자들의 말입니다.

(음악)

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일환 기자였습니다.

(광고)

(음악)

DBS 리포트, 미원, 해태제과, 대한항공 공동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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