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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DBS리포트
항구 - 제3회 항구
항구
제3회 항구
1979.04.03 방송
‘DBS 리포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심층보도의 본격적인 녹음구성프로그램으로, 4회에 걸친 개국특집프로그램에서 성가를 높인 이후 ‘군사혁명특집·혁명의 발자취’ ‘6월의 정치 풍토’‘선거바람 선심바람’‘학생운동의 이모저모’‘지리산 도벌사건’등 역작을 내놓아 동아방송의 보도시각과 역량을 과시했다.
(음악)

DBS리포트 항구.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근 기자입니다.

(음악)

이 프로그램은 미원과 해태제과, 대한항공 공동제공입니다.

(음악)

(광고)

오늘은 항구를 통한 일제의 수탈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음악)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또는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 사건이 있을 때마다 그 틈을 노려

우리나라에 대거 이주해왔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이주해왔던 일본인들은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교육을 받지 않아 무지몽매하고 기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상당수의 작부까지도 끼어 있었습니다.

질이 좋지 않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많은 말썽을 부렸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소위 제국의회에서는

앞으로의 침략정책에 방해가 될 만한 사람들은 조선에 보내지 않아야 된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었습니다.

어찌 됐건 일본의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건너와 짧은 시일 안에 많은 돈을 벌어 자리를 굳혔습니다.

이처럼 되기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희생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는 짐작이 될 만한 것입니다.

1905년에 들어서면 일제는 착취를 위한 기반을 굳혀갑니다. 경인선에 이어 경부선 철도를 이 해에 부설하고

역시 관부연락선을 이 해에 취향시켜서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이주해 올 수 있는 교통수단을 마련했습니다.

이때부터 일제의 식민지 억압이 끝나는 1945년까지 줄곧 관부연락선은 운행됩니다마는 이 관부연락선의 이름을

자세히 살펴보면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산항만연구회 회장 김용호 씨의 말을 듣습니다.

(음성 녹음)

1910년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은 일제는 항구의 개발을 더 한층 서두르고 항구까지에 이르는 도로를

새로 닦는 등 우리나라의 자원반출을 위한 노골적인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현종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음악)

일제가 당시 가장 눈독을 들여 항구를 통해 실어내가기 시작한 게 양곡이었습니다. 인천의 경우는 개항의 조건

자체가 양곡을 실어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일제가 이 같은 약속을 지킬 리는 만무했습니다.

인천의 경우를 최성현 씨가 설명합니다.

(음성 녹음)

1909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서 우리나라 전체 농가의 절반이 되는 153만여 호의 농가가

조상 전래의 농토를 일제와 일부 친일군자들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이에 따라 농토를 빼앗긴

농민들은 화전민이 되거나 아니면 일본, 만주 등지로 방랑의 길을 떠났으며 이에 반해 일본인들의 농업이민은

부쩍 늘어 부산, 인천, 원산, 목포, 군산 등 항구를 통해 4만여 명의 일본 농민이 1919년까지 우리나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처럼 식민지적 농업생산관계를 확립한 일제는 이제는 얼마든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실어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항구에서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내가는 부두의 광경을 볼 수 있었지마는

특히 호남평야를 끼고 있는 군산항의 경우는 쌀을 실어내가는 철이 되면 더욱 분주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군산항에서 쌀을 실어내가던 모습을 한국합판회장 고판남 씨가 말합니다.

(음성 녹음)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 국내의 물가가 오르고 특히 쌀값이 네 배 이상 폭등하자 1920년부터 산미증산계획에

착수해 조선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강화했습니다. 쌀 증산계획에 따라 쌀 생산은 늘어났지마는 일제의 쌀 수탈 비율은

쌀의 증산 비율보다도 더 늘어나서 농민들은 많은 쌀을 생산하고도 오히려 생활을 더 어려웠습니다.

1921년의 경우, 쌀 생산고 1400만 섬 중 300만 섬을 일본으로 가져갔으나 1928년에는 1700만 섬 중 700만 섬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쌀 생산량은 이 동안 300만 섬이 늘어났으나 일본으로 가져간 쌀을 400만 섬이 늘어난

셈입니다. 이런 비율로 일본으로의 쌀 반출이 늘어남에 따라서 만주로부터 조, 좁쌀, 콩깨묵 등을 수입해

조선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웠던 것입니다. 군산 경로회 회장 차칠선 씨의 회고담입니다.

(음성 녹음)

쌀과 관련해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인천, 군산 등 쌀을 반출해내가던 항구에 개설돼 큰 성황을 이루었던 미두장입니다.

쌀 시세를 알아맞혀 일확천금을 할 수 있다고 선전됐던 미두장은 일제가 한국 지주들의 돈을 빼앗아간 합법적인 도박장이었던 셈입니다.

최성현 씨의 미두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음성 녹음)

(음악)

일제의 간악한 식민농업정책에 따라 우리나라에서의 소작농은 해마다 늘어나 1920년에 108만 호인 소작농이 10년 후인

1930년에는 133만 호로 25만 호가 늘어났습니다. 땅을 잃고 뿌리 뽑힌 상태가 돼버린 많은 소작농은 만주나 일본으로

일거리를 찾아 떠났는데 21년부터 27년까지의 사이에 만주의 간도로 이주한 농민의 수요는 36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또 21년에서 30년까지 10년 사이에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난 조선 사람은 13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여수에 사는 일흔 여섯 살의 전서경 씨는 농민들이 일거리를 찾아 연락선을 타고 떠날 때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음성 녹음)

중국과의 전쟁을 일으키고 급기야 태평양 전쟁까지 도발한 군국주의 일본은 양곡 등 생산물의 수탈과 병행해서

인력자원의 수탈을 위해 광분했습니다. 전쟁 말기인 1942년에 접어들면 일제는 징용노무자들을 소집영장을

발부해서 모집해가는 게 아니고 길거리에서나 아니면 심지어 논밭에서 노예 사냥하듯 마구잡이로 끌어갔습니다.

항일노동사를 연구하는 김중렬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이처럼 소집영장 없이 끌려간 징용노무자가 일본지역에 60만 명, 남양 쪽에 30만 명 등 90여만 명이고 이밖에도

만주 등지로 얼마나 더 끌려갔는지는 아직도 모르는 실정입니다. 장정들은 이같이 징용으로 끌려갔고

또 조선의 처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가 일본군대를 위한 창녀로 전락했습니다. 김중렬 씨는-.

(음성 녹음)

지금 어느 사람을 붙들고 물어도 정신대가 떠나는 광경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활한 일제는 이들 노무자나

정신대를 남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부산이나, 여수, 군산 등 항구에서 실어내갔던 것입니다. 차칠선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일제가 패전하면서 식민통치에 대한 중요 자료를 거의 없앴기 때문에 징용이나 정신대를 얼마나 끌려갔는지에 대한

확실한 통계가 없고 따라서 그들이 전쟁 중에 얼마나 희생당했는지 대해서도 아무런 통계가 없는 실정입니다.

일제의 저주받을 만행이 숫자로 밝혀지기는 영원히 어려울 것 같다는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음악)

내일은 부두노동자들의 노동운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근 기자였습니다.

(광고)

(음악)

DBS리포트. 지금까지 대한항공, 해태제과, 미원 공동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1.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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