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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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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 - 제2회 개항사
항구
제2회 개항사
1979.04.02 방송
‘DBS 리포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심층보도의 본격적인 녹음구성프로그램으로, 4회에 걸친 개국특집프로그램에서 성가를 높인 이후 ‘군사혁명특집·혁명의 발자취’ ‘6월의 정치 풍토’‘선거바람 선심바람’‘학생운동의 이모저모’‘지리산 도벌사건’등 역작을 내놓아 동아방송의 보도시각과 역량을 과시했다.
(음악)

DBS리포트 항구.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근 기자입니다.

(음악)

이 프로그램은 미원과 해태제과, 대한항공 공동제공입니다.

(음악)

(광고)

(광고)

(음악)

오늘은 개항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음악)

1875년의 운양호 사건, 그 이듬해 일본과의 불평등한 강화도조약, 이 조약에 따른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 우리의 개항이 당초부터 얼마나 비자주적으로 빗나가기 시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 이현종 박사가 개항 당시의 얘기를 들려줍니다.

(음성 녹음)

개항이 되자 예정된 스케줄대로 개항장에 일본인의 조계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조계가 가장

먼저 들어선 곳은 역시 개항이 가장 빨랐던 부산이었습니다. 부산이 개항된 그 이듬해인 1877년, 부산에 일본

단독 조계가 처음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일본의 단독 조계는 부산의 용두산 일대에 있었고 조계가 설정되자 일본인들은

떼를 지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부산 항만연구회 회장 김영호 씨의 말을 들어봅니다.

(음성 녹음)

일본이 조계를 설치하자 구미열강들이 역시 조계설치를 요구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등이

개항되면서 일부 개항장에 각국 공동 조계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의 각 항구에는

일본 단독 조계를 비롯해서 청국 단독 조계, 각국의 공동 조계 등 세 가지 형태의 조계가 들어서게 됐습니다.

조계가 각 항구에 들어서고 외국들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외국문물이 대량으로 항구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인천의 향토사 연구가 최성현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부산, 원산, 인천 등 개항장에 살던 외국인들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이권 쟁탈에 나섰습니다.

특히 인천의 공동 조계에서 살던 구미 사람들은 우리나라에서의 각종 이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이권을 얻기까지 활동상을 보면은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입니다.

다시 최성현 씨의 말입니다.

(음성 녹음)

이 같은 이권을 얻어 막대한 치부를 하면서 외국인들은 그들의 조계 안에서 별천지처럼 꾸며놓고 살았습니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은 1876년 개항 이후, 1898년까지 일본을 비롯해서 러시아,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열강들이 차지했던 중요한 이권은 무려 21건에 달했습니다. 철도, 광산, 어업, 임야의 벌채 등이 멋대로 열강에 의해

분할 강점된 채 이미 나라의 주권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음악)

각국의 조계가 설치됐던 개항장은 당시 문물의 교류 현장이었고 인종 전시장이기도 했으며 외래상품의

전시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개항장은 우리의 전통이 도전받는 곳이었고 귀중한 우리 문화재의

반출 현장이었으며 질이 나쁜 외국인들에 의한 범죄의 온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개항장에 있던 조계가 우리나라를 침투하는 거점이었다는 점입니다. 이현종 박사입니다.

(음성 녹음)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거치면서 득세하게 된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까지 그들의 조계 안에 살던 일본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한일합방 때까지 얼마나 몰려와

살았으며 그들의 직업이 또 어떠했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현종 박사의 설명입니다.

(음성 녹음)

일본인들이 빈손으로 몰려와 치부를 하고 일본군이 부산과 원산에 주둔하면서 호시탐탐 우리의 주권을 넘보고 있을 때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의 이름 아래 장안 시민을 동원해 전면적인 항의를 벌렸고

또한 기개 있는 우리 선비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투쟁을 벌였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항일독립운동사 연구관,

김유영 씨는 당시의 의병투쟁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음성 녹음)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된 화력 앞에 의병투쟁은 성공할 수가 없었고 일제는 본격적인 침략의 본성을 이제부터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경부선이 개통되고 관부연락선이 취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영호 부산 항만연구회 회장은-

(음성 녹음)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우리의 주권을 빼앗은 일제는 1914년까지 우리나라에 설치돼있던 각국의 조계를 철폐시키고

모든 항구를 그들의 손아귀에 거머쥐었습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항구를 그들의 수탈 항으로 이용하기 위한

항만 건설, 도로 건설, 철도 부설 등이 병행됐던 것입니다. 일제는 이미 개항돼있던 항구들만으로 부족해서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입지적인 조건을 고려해가면서 새로운 항구의 문을 열기도 했는데 여수도 그런 항구 중에 하나입니다.

여수가 개항하게 된 배경을 여수시청에 근무하는 송전석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성 녹음)

이렇게 개항된 모든 항구를 통해 일제는 이 나라의 모든 생산물부터 인력자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수탈해갔던 것입니다.

(음악)

내일은 항구를 통한 일제의 수탈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김근 기자였습니다.

(광고)

(음악)

DBS리포트. 지금까지 대한항공, 해태제과, 미원 공동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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