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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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DBS리포트
한강 - 제7회 한강문화
한강
제7회 한강문화
1978.05.07 방송
‘DBS 리포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심층보도의 본격적인 녹음구성프로그램으로, 4회에 걸친 개국특집프로그램에서 성가를 높인 이후 ‘군사혁명특집·혁명의 발자취’ ‘6월의 정치 풍토’‘선거바람 선심바람’‘학생운동의 이모저모’‘지리산 도벌사건’등 역작을 내놓아 동아방송의 보도시각과 역량을 과시했다.
(음악)

DBS 리포트 한강.

(물소리 및 배 갑판 삐걱거리는 소리)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나철삼 기자입니다.

(기차소리)

이 프로그램은 미원과 해태제과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한강은 우리나라 문화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해왔습니다.

오늘은 한강변의 문화와 예술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음악)

한강이 문화 발전에 공헌을 한 것은 뱃길로 이용해서

다른 곳의 문화를 받아들였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구실을 한강이 해온 것은 멀리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역사학자 이상옥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삼국시대에 한강을 처음 차지한 것은 백제였지마는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을 빼앗기고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강을 빼앗겼습니다.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이후, 한강은

더욱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한강은 문화면에서 커다란 구실을 하게 됩니다.

다시 이상옥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한강은 또 많은 문인, 예술인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합니다.

가야국의 우륵이 그의 말년에 가야금을 탔다던 탄금대도 바로 한강에 있습니다.

그래서 충청북도의 충주시와 중원군 사람들은 이 점에서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충주의 개업의인 김풍식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백제가 처음 수도를 세운 위례성이 한강변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초기 백제의 문명을 이루었고 특히 한강을 이용해서 중국의 문물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한강에 문명의 꽃이 피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선사시대부터였습니다.

그래서 한강변에는 선사시대에서 이조에 이르는, 시대가 구분되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국립 중앙박물관 정양모 학예관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음악)

한강은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그런 구실만을 해온 것은 아닙니다.

한강은 한강 특유의 구실로 이조시대에는 유명한 이조백자의 산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조백자가 만들어진 곳이 바로 한강변에 있는 경기도 광주군 일대였습니다.

정양모 학예관의 얘기, 다시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에 분원리가 있습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이조백자를 구워온 곳입니다.

이조시대에 왕실직속의 도자기 만드는 일을 관장하는 중앙관청의 이름이 상원이라고 했습니다.

이 상원의 지방현장, 즉 도자기를 직접 만드는 공장을 분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분원은 지명이 아니라 관청의 이름입니다. 문헌에 분원이 나오는 것은 인조대왕 3년 때부터입니다.

기록은 그때였지마는 실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초기의 이 분원은 한곳에 정착해 있지를 않았습니다. 도자기를 구울 때 필요한 나무 때문에

주위의 나무를 베어서 쓰다가 떨어질 때쯤인 10년 정도를 주기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다가 광주군 주위의 나무가 거의 없어지고 백자의 원료인 백토가 없어지자

더 이상 옮길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서강대학교 이광린 교수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지금 경기도 남종면 분원리는 이조시대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설치됐던 분원의 마지막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이 지명으로 바뀌어 분원리라고 지금까지 부르게 됐습니다.

한강은 또-.

(음성 녹음)

이조백자가 질적으로나 모양으로나 비할 데 없이 빼어났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조백자의 또 하나의 자랑은 백자 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백자 위에는 아름다운 산,

아름다운 강을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산, 그 강, 그리고 강 위에 떠있는 배.

이런 모든 것들은 모두가 한강 그것이었습니다. 한강은 도자기로 만드는 여건뿐만 아니라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의 존경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조백자의 특징이었습니다.

다시 정양모 학예관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음악)

한강을 그림으로 그린 사람은 많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산수화를 그린

화가치고 한강을 그리지 않은 화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 한강을 읊은 시인들도 많습니다. 오래전부터 한강은 시인묵객들의 휴양지이자

놀이터였습니다. 최근세시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언론인 유광렬 씨로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노들강변은 노들나루, 즉 지금의 노량진을 얘기합니다. 민요의 노들강변이 바로 그곳을

주제로 한 것입니다. 국악인 이창배 씨로부터 한강을 주제로 한 민요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음성 녹음)

(음악)

이씨조선 말에 학문이 공허한 철학으로서 끝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학문으로 발전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파가 생기게 됩니다. 실학이라고 부르는 분야가 바로 이 분야입니다.

한강은 이러한 실학자들과 연결이 됩니다. 이광린 교수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한강변에 실학파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조 말 한강변에는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난 남인계통의 사람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바로 실학의 중심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서로 만나는 방법으로 한강을 이용해왔습니다.

한강은 실학 발전에서 빼낼 수 없는 중요한 구실을 해왔습니다.

(음성 녹음)

실학과 더불어 한강변은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의 본산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이광린 교수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기록에 보면 실학의 거두였던 다산 정약용의 형제들 가운데 천주교의 신자들이

있었다고 돼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주교의 박해의 하나인 신유사옥 때 모두 죽었습니다.

다산은 그때 화를 면했지마는 귀향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다산이 처음

천주교에 대해서 들었던 것도 서울로 올 때 타고 온 배 안에서였다고 다산의 묘비석에

기록돼 있습니다. 천주교도들은 배 안에서 전도 사업을 벌였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한강은 백제시대에 중국의 동진에서 불교를 전해왔고, 이조 말에는 서양의 천주교를

들여 온, 그리고 발전시킨 곳이기도 했습니다.

(음악)

천주교에 관한 한 한강은 또 하나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서교동에서 한강으로 나가는

곳에 절두산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다시 유광렬 씨의 얘기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절두산의 ‘절두’라는 말은 머리를 잘랐다는 의미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한강변인 바로

그곳에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그 뒤 꼭 100년 뒤인 1966년에

그 지라에 기념박물관을 세우고 천주교 관계 서류를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절두산 성당을 만들었습니다.

(음악)

한강변에는 기록할 만한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내일은 이 얘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나철삼 기자였습니다.

(광고)

(음악)

DBS 리포트. 해태제과와 미원 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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