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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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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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제6회 한강 홍수
한강
제6회 한강 홍수
1978.05.06 방송
‘DBS 리포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심층보도의 본격적인 녹음구성프로그램으로, 4회에 걸친 개국특집프로그램에서 성가를 높인 이후 ‘군사혁명특집·혁명의 발자취’ ‘6월의 정치 풍토’‘선거바람 선심바람’‘학생운동의 이모저모’‘지리산 도벌사건’등 역작을 내놓아 동아방송의 보도시각과 역량을 과시했다.
(음악)

DBS 리포트 한강.

(물소리 및 배 갑판 삐걱거리는 소리)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나철삼 기자입니다.

(기차소리)

이 프로그램은 미원과 해태제과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오늘은 한강의 홍수에 대한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한강은 홍수로 유명합니다. 강의 범람은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계속돼왔지마는

한강의 경우는 다른 강과 비교해서 조금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강이 홍수가

많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산을 가꾸지 않았고 강을 가꾸지 않았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의 인천항 부근을 하구로 하고 있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야 어떻든 한강의 홍수에 대한 기록은 멀리 백제시대까지

올라갈 정도로 유명합니다. 이병도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백제시대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한강의 홍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인 1972년에 홍수를 겪은 분들이 우리 주위에는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 여름, 안양천

주변에 홍수로 아직껏 어려운 고생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의 홍수는

오래전보다도 훨씬 그 질이나 양에서 떨어진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상옥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한강의 홍수는 오래전부터 유명했지만은 피해가 많은 것은 서울의 인구증가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살지 않아야 할 상습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얘깁니다. 특히 이런 일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강가의 판잣집들 때문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근사한 논리이건 아니건

한때는 그런 상습지역을 이용해서 뭐라도 얻어냈던 사람들이 서울에 있었습니다. 조풍현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음악)

한강의 홍수 중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냈던 홍수는 소위 을축년장마라고 불리는 1925년의 홍수입니다.

기록에 보면은 이씨조선 개국 470년인 1745년에도 큰 홍수가 있었다고 돼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해 역시 을축년이었습니다.

1925년의 홍수, 이상옥 박사로부터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을축년 홍수 때 서울 주변의 한강이 넘친 것은 7월 11일이었습니다. 당시에 그 날짜 동아일보는

은평과 광나루 교통이 두절됐고 왕십리가 물에 찼으며 인사동, 낙원동의 일부가 침수되고

마포의 전차가 두절, 용산 전화 불통, 서울과 평양 간 선로가 두절됐다는 숨 막힌 보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한강변은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음성 녹음)

급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젊은 청년들이 나서서 떠내려 오는 사람을

구해냈지마는 그것도 한계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손을 쓸 수 없었던 당시의 모습은 상상만 해봐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광렬 씨는 당시에 조선일보의 기자로 취재를 하면서 신문제작을 해왔다고 했습니다.

(음성 녹음)

을축년의 한강 홍수는 정확하게 1925년 7월 11일이었습니다. 그날 하루를 피크로 12일부터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15일과 16일 또 계속된 폭우로 17일에 연거푸 두 번째의 물난리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한강변은 보기조차 민망스러운 꼴이 돼버렸습니다.

정문기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1925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를 보면은 춘천과 가평의 교량이 유실됐고 이촌동의 주민이 물이

불어나자 불안해하고 있다는 기사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7월 9일자 신문은 대구지방이 호우로

교통이 두절됐고 7월 10일자에는 익산지방이 폭우로 피해를 입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그해 폭우는

남한 전체를 강타했었습니다. 그래서 한강뿐 아니라 낙동강, 금강이 범람했고 많은 인명을 앗아갔으며

농작물 피해를 입혔습니다. 한강은 상류에서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지역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리, 이봉구 씨로부터 당시 여주읍의 상황을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1925년 7월 23일자 동아일보는 당시의 홍수로 경기도지방에서만 285명이 사망했고 11100여 호의 가옥이 침수됐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총독부의 발표였으니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국악인 한유성 씨는 당시에 송파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 씨의 집은 그때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음성 녹음)

그리고 그들은 그 공동묘지에서 집을 짓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참상을 당하고도 당시의 수재민들은

구호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그들이 구호를 받았다면은 민간단체나 독지가,

그리고 신문사의 구호활동에 도움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7월 12일자 동아일보는 본사 구호위문대가

700여 명의 피난민들에게 아침밥을 지어먹였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짜 신문에 명월관에서

주먹밥 600명분을 만들어서 동부와 서부이촌동 주민에게 보냈다고 했습니다. 결국 당시의 수재민들은

국가 없는 어려움 속에서 자력으로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음성 녹음)

을축년 장마는 한강이 가진 비극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 홍수로 당시의 유일한 한강다리였던

용산에서 노량진까지 이르는 지금의 제1한강교가 물에 휩쓸려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비극 속에서도 비록 앗아간 생명보다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하나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이병도 박사의 얘기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한강에는 홍수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강서구 등촌동에서 방화동으로 가는 길목에

가양동이 있습니다. 이곳이 전에는 양천군이었습니다. 허 씨 중에 양천 허 씨의 본이 되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양천 허 씨가 나왔다는 허가바위가 있습니다.

그 허가바위 바로 옆에 또 하나의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상옥 박사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경기도 광주의 커다란 바윗돌이 한강 물줄기를 따라서 그곳까지 왔다는 전설입니다.

얼마나 물난리가 겪었으면 그런 전설이 있었겠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경기도 양평군에는

아예 산 하나가 충청북도 충주에서부터 떠내려 왔다고 해서 지금도 떠드렁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습니다. 양평군 양근리 김만성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금년에 충주땜 공사가 착공이 됩니다. 이 땜은 다목적 땜으로 농업용수나 상수도,

그리고 발전시설로 이용하게 되지마는 한강의 수위조절로 큰 몫을 차지하게 됩니다.

자연의 힘을 인간의 힘으로 막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완전하다 하더래도 인간의

힘은 완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래도 그런 노력은 계속 돼야 할 것입니다.

(음악)

내일은 한강 문화와 예술에 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나철삼 기자였습니다.

(광고)

(음악)

DBS 리포트. 해태제과와 미원 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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