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소리 DBS | 동아방송 18년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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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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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제4회 한강 주변마을
한강
제4회 한강 주변마을
1978.05.04 방송
‘DBS 리포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심층보도의 본격적인 녹음구성프로그램으로, 4회에 걸친 개국특집프로그램에서 성가를 높인 이후 ‘군사혁명특집·혁명의 발자취’ ‘6월의 정치 풍토’‘선거바람 선심바람’‘학생운동의 이모저모’‘지리산 도벌사건’등 역작을 내놓아 동아방송의 보도시각과 역량을 과시했다.
(음악)

DBS 리포트 한강.

(물소리 및 배 갑판 삐걱거리는 소리)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나철삼 기자입니다.

(기차소리)

이 프로그램은 미원과 해태제과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오늘은 한강 주변 마을과 그곳 주민의 특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음악)

한강 주변에는 대체로 두 가지 종류의 마을이 있습니다.

산물의 집산지로서의 구실을 하는 마을과 순수한 강변마을입니다.

순수한 강변마을은 농업을 주로 해서 살아가는 마을입니다.

그곳에는 대부분 나루터가 있는데 그 나루터는 강 건너 집산지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날 한강변의 큰 도시는 대부분 오랫동안 집산지 구실을 해온 곳들입니다.

이러한 집산지는 그 부근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모여들기도 하지만은 배에 싣고 오는

물건들이 팔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장터가 형성되게 됩니다.

중앙대학교 임동권 교수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그러나 그런 곳 가운데에서는 한강이 교통수단으로서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하자,

도시 혹은 마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곳도 있습니다. 충청북도 중원군 목계나루가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중원군의 김해식 씨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이렇게 컸던 목계나루가 지금은 모래사장과 유명한 가흥창의 주춧돌 등 옛날 번영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한강이 교통수단으로 사용돼왔던 것은 지금의 도로를 생각하는 것이

설명하기에 좋습니다. 도로가 생기면은 그 주변에는 반드시 지나는 사람들의 휴식처인

음식점이나 술집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 옛날 한강이 한참 번성했을 때 수많은 배들이 한강을

올라가고 내려왔습니다. 지금처럼 배에 엔진이 있었다면은 하루에 몇백 리씩 달렸겠지만

노나 삿대에 의지했고 그나마도 올라갈 때는 앞에서 배를 끌고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쯤에선가에서 밥을 먹어야 했고 또 주막에서 술도 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배를 매어두고 잠자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한강변에는

이들을 위한 시설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강변에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음성 녹음)

강변마을은 내륙의 마을과 달리 접하는 사람이 많고 주거이동이 많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강과 연관 지어진 생활을 주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 나름의 생활양식이나 성격을

형성해 왔습니다. 같은 서울이면서도 한강변의 사람들은 한강의 말을 써왔습니다.

조풍현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뱃사람은 뱃사람다운 기질이 있습니다. 요즘 마포에 사는 사람들더러 뱃사람이라고 하면

놀라겠지만 오래전 마포에는 뱃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로 알려졌습니다. 언론인 유광렬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뱃사람의 기질과는 다른 얘기지만 한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 사람들이 싸운 일이 있었습니다.

충청북도의 중원군 앙성면과 경기도의 이천군 장호원읍은 한강의 지류인 청계천을 두고

도개를 이루고 있습니다. 양성면 사람들은 충청북도 사람인데도 생활권은 경기도 이천군의

장호원읍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닷새 만에 한 번씩 열리는 장날이면 으레이 배를

타고 장호원읍으로 가야 했습니다. 더구나 우시장의 경우, 대부분의 소들이 앙성면을 지나서

장호원읍으로 가서 팔리는 형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앙성면 사람들은 마을을 지나는

소떼를 보고도 사지 못하고 정미천을 건너서 소를 사가지고 다시 강을 건너 와야만 했습니다.

어느 누군가가 주동이 돼서 요즘말로 시장유치작전을 폈습니다. 이것이 다툼의 원인이었습니다.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의 조용신 씨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음악)

영남과 호남 등 남부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올 때에는 모두가 과천을 거쳐서 지금 동작동의 동자기나루를

건넜습니다. 과천에서 동작동까지 그곳 사람들은 강 건너 사람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유난히도

텃세를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이상옥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지금의 노량진은 노드리나루라고 오래 전부터 불리웠습니다. 서울 3대 나루 중에 하나인 노들나루에는

무당이 많기로 유명했습니다. 임동권 교수는 그것이 이조 때부터였다고 말합니다.

(음성 녹음)

한강이 뱃길로 한참 융성했을 때 한강변은 시장 구실을 했습니다. 멀리는 중국에서 물건을 가져왔고

경기도와 삼남지방의 곡물, 강원도지방의 나무. 그리고 바닷고기 등 의식주와 일상생활의 필수품들이

한강을 따라서 들어와서 판매됐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남대문시장과 중앙시장, 그리고 노량진 어시장 등에

도매단위 구실을 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변에는 소위 상권을 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유성의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한강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비록 상류라 하더래도 서울과 통하는 길목의 사람들입니다.

가까운 곳은 뱃길을 통해서 서울과 하루 생활권을 이루었고 멀리 상류에서는 서울은

못 갔지만은 서울사람들이 배를 타고 자주 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한강 덕분에 일상생활용품들을 직접 서울에서 가져다 쓰는 혜택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내륙지방의 주민들과는 다른 데가 있습니다. 김학수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지금도 서울 주변의 농촌 사람들은 서울사람들을 상대로 특용작물을 재배해서

한몫을 보고 있습니다. 한강이 교통수단으로 각광을 받던 시절, 서울에 가까운

한강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그런 혜택을 누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에서

그들 나름의 생활습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담수어 전문가 정문기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태백산으로 통하게 됩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많이 살지 않는 산골입니다.

이곳은 지금도 상투를 하고 갓을 쓴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닙니다. 얼마 전, 상투를 틀고 하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서울구경 왔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광화문 네거리를 두리번거렸고 텔레비전 방송국을 찾아 이곳저곳을

희한한 듯 쳐다봤습니다. 그때 온 사람들이 바로 한강 상류, 태백산 일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서울대학교 정창희 교수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음악)

한강변에는 인심을 알아내는 비법이 있습니다. 믿을 것까지야 없겠지마는 오랫동안 한강변 사람들은

그것을 법칙인 것처럼 전해 내려왔습니다. 첫째는 바가지로 한강물을 떠서 마실 때, 흐르는 물을

흐르는 방향으로 뜨는 고을이 있고 역류해서 거슬러 뜨는 고을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한강을 안고 있는

고을이 있고, 한강을 등지고 있는 고을이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 강북 지역은 한강물을 거슬러 먹고

한강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남 지역은 한강물을 흐르는 방향으로 먹고 한강을 등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지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내일은 한강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얘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나철삼 기자였습니다.

(광고)

(음악)

DBS 리포트. 해태제과와 미원 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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