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DBS 리포트 한강.
(물소리 및 배 갑판 삐걱거리는 소리)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나철삼 기자입니다.
(기차소리)
이 프로그램은 미원과 해태제과 제공입니다.
(광고)
(음악)
오늘은 한강의 나루터를 중심으로 한강을 어떻게 건너 다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음악)
한강에 다리가 처음으로 놓여진 것은 지금부터 61년 전인 1917년 10월의 일입니다.
지금 제1한강교로 불리는 용산에서 노량진까지의 인도교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만들어졌던 그 다리는 1925년, 소위 을축년 장마 때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2년 뒤인 1927년 5월에 다시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 다리는 제법 오랫동안 그 구실을 해왔지만
6.25사변 때 폭격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한강 인도교로 불리는 현재의 다리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58년 5월 15일에 완공을 봤던 다리입니다. 한강에 다리가 세워지기 전까지
한강 주변의 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한강은 물줄기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는 곳마다 수많은 나루터가 있었습니다. 서울 주변 나루터 얘기를
김학수 화백으로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서울의 열두 나루는 천호대교 부근,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광나루와
현재 잠실 윗부분의 송파나루. 그리고 뚝섬나루, 압구정나루, 금호나루, 옥수나루,
동작동으로 나가는 동작의 나루, 노량진의 노들나루, 또 서강나루, 마포나루, 양화나루 등이
있었습니다. 이 열두 개 나루 중에서 요즘 말로 교통량이 가장 많았던 곳은 세 곳이었다고 했습니다.
중앙대학교 임동권 교수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바닷가나 큰 강변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바지선이라고 하는 배를 기억할 것입니다. 자동차나 커다란 장비를
전문으로 옮기는 배가 바지선입니다. 이런 바지선이 오래 전, 한강 가에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때
실었던 것은 자동차가 아닌 우마차였다는 것이 다릅니다. 당시의 나룻배 얘기와 바지선 얘기를
지금의 잠실 부근 한강변에서 살아온 국악인 한혜성 씨로부터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나룻배의 규모나 이용하는 수는 차이가 있었겠지만 한강은 하구에서 상류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루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나루터 중에서 특이할 만한 나루터가 강원도 정선군에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다시 김학수 화백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배하면 우리는 동력선을 생각합니다. 디젤엔진을 달았건, 휘발유엔진을 달았건 기계의 힘으로
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강을 건너다녔던 나룻배들은 모두가 노나 삿대를 가진 조그만
배였습니다. 그래서 한강물이 많아져 흐르는 속도가 빨라질 때면 뱃사공들은 큰 어려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음성 녹음)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서 한강을 건널 수 있으면 다행이었습니다. 큰 물. 즉, 홍수가 나면은
아예 한강은 폐쇄돼야만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처럼 꽉 짜여진 바쁜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쯤 늦었다고 해서 그리 큰 장애를 받지는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왜정시대부터는 이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교평리에 사는 홍달성 씨는 양평대교가 세워질 때까지 한평생을
나룻배의 노를 저으면서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음성 녹음)
한강의 나룻배는 일 년, 열두 달을 거의 쉬지 않고 다녔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강물이
얼기도 했지마는 얼음 위를 다니는 것이 위험해서 탄탄한 곳을 빼고는 얼음을 깨고 배를 띄웠습니다.
이러한 한강나루의 원칙을 무시했다가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국악인 이충선 씨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나룻배가 떠나고 또 도착되는 곳을 나루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루터는 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각각 있었습니다. 이 나루터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다시 중앙대학교 임동권 교수의 얘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사도세자는 죄 없이 뒤주 속에서 죽어간 비련의 주인공입니다. 그의 아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슬퍼하며 한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찾아
그 넋을 위로했습니다. 정조가 얼마나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했고 어떻게 효도를 드렸느냐 하는 것은
이조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정조는 한때 서울을 능이 있었던 수원으로 옮기려는 구상까지
했었습니다. 정조가 능으로 갈 때 바로 이 한강을 건넜습니다.
(음성 녹음)
지금 말씀해주신 분은 김학수 화백입니다. 김학수 화백은 풍속도 화가로 지금 오대산 상류에서
서해에 이르는 한강을 250미터 길이의 화선지에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김 화백이 설명하고 있는 정조의 능행렬은 창덕궁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그림으로 보관돼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정양모 학예관의 얘기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음성 녹음)
이 배다리는 정조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주일 동안 놓여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다리를 놓지 않고 임시 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너는 방법을 부교라고 합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서양 사람들이 싸움터에서 부교를 놓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오래 전, 우리 선조는
서양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보다도 더 훌륭한 방법으로 배다리를 놓고 한강을 건넜습니다.
다만 그것을 필요할 때, 필요하게 사용하지 못했던 후예들이었다는 오점을 우리는 안고 있습니다.
(음악)
정조가 수원으로 능행렬을 벌였던 길은 지금 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지나는 산업도로였습니다.
지도를 놓고 그 길을 보면은 수원에서 서울로 오는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경부선 열차는 경인선과 합류하는 우회선을 따라오고 있습니다. 경부선이 이렇게 멀어진
것은 바로 정조의 능행렬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옥 박사의 얘깁니다.
(음성 녹음)
(음악)
나룻배로 생업을 이어왔던 뱃사공들, 그들은 어떻게 생활을 영위했을까. 한강변의 강 건너 사람들은
나룻배를 이용하든 안 하든 아예 일 년에 얼마씩 뱃사공에게 뱃삯을 선불로 지급했습니다. 다만 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배를 탈 때는 현금으로 지불했습니다. 뱃사공 홍달성 씨는 거기에다가 서양식의 팁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음성 녹음)
한강에는 지금 수많은 다리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땜이 있어서 이것 또한 다리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루터는 이제 없어졌습니다. 서울에만 철교를 빼고도 아홉 개의 다리가 있습니다.
광진교, 천호대교, 잠실대교, 영동교, 제3한강교, 잠수교, 제1한강교, 서울대교. 그리고 제2한강교가
그것입니다. 성산대교가 생기면 모두 열 개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 모든 다리가 옛날의 나루터의 위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나룻배는 없어졌지만 나루터의 구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1962년 제2한강교가 세워질 때, 건설비가 5억 원이었습니다. 그해 서울시의 전 예산이 37억,
줄잡아 서울시 예산의 7분의 1이라는 엄청난 돈이 한강교 건설에 쓰여 졌습니다.
1974년 천호대교를 만들 때 서울시 예산은 1022억이었습니다. 그리고 건설비는 3억 8000만원이었습니다.
규모와 위치 등의 차이는 있지마는 이제 한강 다리 하나 만드는 것이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 열두 나루보다는 적은 숫자입니다. 그래도 옛날 나루를 건넜던 때의 그 불편함을 생각해보면은
오늘 우리는 얼마나 편하게 살고 있는가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음성 녹음)
(음악)
내일은 한강변의 마을은 어떤 특색을 가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취재와 구성에 사회문화부 나철삼 기자였습니다.
(광고)
(음악)
DBS 리포트. 해태제과와 미원 제공이었습니다.
(음악)
(입력일 : 201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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